사실 오늘은 대학동창들과 술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구청장이 된 이후로 유일하게 마음 놓고 술을 먹을 수 있는 모임이었지만 오늘은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박수무당의 말이 여간 찝찝했던 게 아니었기 때문.
그 뒤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잠시 들렸다.
벌컥!
수행비서가 집무실 문을 벌컥 열거 들이닥쳤다.
“구청장님! 큰일입니다. 영도시장 근처 수산물 물류창고들이 밀집한 곳에 큰 불이 발생했답니다!”
‘불?’
오재민 구청장은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환불하러 왔습니다.
- 영도의 수산물 창고 인근
끼이익!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브레이크 소리를 내며 정차했다.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사내가 내려섰다.
그는 하의는 정장바지이지만 상의는 작업복을 걸친 상태였다.
화재 소식을 듣고 빠르게 현장으로 달려온 오재민 구청장이었다.
이곳은 영도구에서 수산물 창고들이 밀접해 있는 곳.
오재민 구청장은 긴장한 표정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불이 났다면 걷잡을 수 없을지도 몰랐기 때문.
‘다행이다! 불이 크게 번진 것은 아닌 모양이구나!’
오재민 구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여러 창고로 불이 옮겨 붙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 그리고 불이 빠르게 진화되고 있는 듯 보였다.
소방차 수십 대가 동원되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소방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화마와 싸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재민 구청장은 빠르게 지휘본부를 찾아 나섰다.
이런 비상시국에는 소방책임자들이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우선. 의전은 미리 생략하도록 지시했다.
되도록 방해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영도구청의 지원이 필요한 내용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에 확인이 필요했다.
오재민 구청장이 임시로 설치된 지휘본부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소방대원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 몇 명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고 많으십니다. 영도구청장입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오재민 구청장의 말에 안에 있던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네, 구청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고생이 많습니다.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피해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우려했던 것 보다는 피해가 크지 않아 다행입니다.”
“다행이군요!”
“네, 인접한 창고로는 불이 옮겨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걱정이 많았습니다. 인명 피해는 어떻습니까? 아직 창고가 전부 진화된 것은 아니지만 혹시 확인된 인명피해가 있습니까?‘
“다행히 아직까지 확인된 내용은 없습니다. 아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오재민 구청장이 근심을 덜었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를 바라보던 구급대장이 말을 이어갔다.
“다행히 구급대원이 도차하기 전에 미리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초기에 창고에 설치된 소화장비를 이용해서 불이 번지는 것을 막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네? 그게 누굽니까?”
“신원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는데. 저쪽에 창고 사람들과 함께 대피해 있습니다.”
“그런 장한 청년이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군요?”
“네, 그 청년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불이 난 것을 발견하고 창고의 관리실에 뛰어 들어와 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기에 소화 장비로 소화 작업을 시작해서 불이 크게 번지는 것을 막았습니다.”
“정말 고마운 청년이군요.”
오재민 구청장의 말에 구급대장도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구청에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네 구청장님, 감사합니다.”
“저는 대피소로 가서 사람들을 좀 만나보고 있겠습니다. 특이 사항이 있으면 연락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 * *
- 창고 근처 임시 대피소
“정말 고맙네. 다 자네 덕분이야! 오늘 야근 작업 중인 사람들이 창고 내에 있었는데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
“암! 그렇고말고! 정말 장한 청년이야!”
“그래 이름이 뭐라고?”
장보고는 임시 대피소에서 냉동 창고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장보고 도움으로 겨우 대피한 사람들이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숙였다.
장보고의 이웃인 최씨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장보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장보고라니까. 우리집 옆에 사는 청년이라니까.”
“진짜로 이름이 장보고라고?”
그 말에 장보고가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 이름이 장보고입니다.”
“장보고? 허허허.”
“네.”
“허허허. 이름도 좋네. 장보고라니! 큰일을 할 청년이군!”
사람들이 다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장보고도 그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다행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전생과 달리 인명피해 없이 사건이 마무리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이 사건은 매우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냉동 창고에 발생한 화재 자체는 그리 큰 규모가 아닐지도 몰랐지만 인명 피해가 여럿 발생해 큰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다.
특히 최초로 불이 발생한 창고 옆 인접 건물들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창고를 운영하는 영세업자들이 목숨을 걸고 불을 진화하려다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연이 많았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이웃집에 사는 최씨 아저씨도 있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며칠째 저녁 운동 겸 이 근방을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그 순간 대피소 안으로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그 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오재민 구청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영도구청장입니다.”
오재민 구청장이 들어서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다들 상심이 크시지요. 구청에서도 최대한 피해회복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구청장의 말에 대피소 안의 사람들이 오재민 구청장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하소연을 시작했다.
대화를 나눈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화재를 처음 발견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 장한 청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재민 구청장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이번에도 최씨 아저씨가 나섰다.
“구청장님한테까지 소문이 났습니까? 여깁니다. 장보고라고 합니다. 해양대학교 졸업하고 해신해운 배를 타는 항해삽니다.”
장보고를 소개하는 최씨 아저씨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 그렇습니까? 젊은 친구가 대단하군요.”
오재민 구청장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젊은 친구가 큰일을 해주었네. 나는 영도구청장 오재민이네.”
“감사합니다. 장보고라고 합니다.”
‘자, 장보고? 해신 장보고?’
오재민 구청장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오재민 구청장은 눈을 크게 뜨고 묻기 시작했다.
“그래, 화재를 제일 먼저 발견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네, 집이 이 근처라 종종 운동 겸 달리기를 하거든요.”
“그래? 정말 운이 좋았군!”
“뭐, 왠지 기분이 불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답답해 달리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와있더라고요.”
“그래?”
“네, 마치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에 있었는데 화재가 현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치 누가 이곳으로 저를 인도한 그런 느낌이랄까요?”
‘나도 귀신에 홀린 기분이구나. 정말로 신기한 일이다. 혹시 영도 박수가 말한 귀인이 이 사람일까?’
오재민 구청장은 영도 박수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귀인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그것도 무려 ‘해신’과 접신한 상태에서 말이다.
“그나저나 달리기라니? 젊은 청년이 무슨 답답한 일이 있다고?”
“최근에 집안에 힘든 일이 있어 스트레스가 심해서요. 이 주변을 좀 뛰었습니다. 달리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더군요.”
“집안에 무슨 일이 있나?”
“음, 이걸 말씀드려도 될지…….”
“개인적인 일이라 말하기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괜…….”
“가족이 다단계 사기에 휘말렸습니다!”
“음?”
오재민 구청장은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최근 그의 머릿속을 가장 복잡하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골칫거리. 그것도 바로 다단계 사기문제였다.
오재민 구청장은 영도 박수를 만난 이후 집에 돌아가 그 동안 자신의 속을 한 번도 썩인 일이 없던 배우자를 닦달했다.
그리고 결국 의료기 대여를 하는 법인에 꽤나 많은 돈을 대출받아 투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치를 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한 거 모르냐며 살짝 눈물짓는 와이프에게 오재민 구청장은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주변에서 수익이 보장되는 확실한 업체라고 소개 받아 투자한 것뿐이라는 말에 그저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 이후 오재민 구청장은 인맥을 동원해 이 업체의 실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단계 피라미드 업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초기에 자금을 투자했던 터라 투자 한 이후 꼬박 꼬박 수익금이 들어오고 있다는 말에 오재민 구청장도 순간 욕심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단계 사기가 서민들에게까지 널리 퍼져 있다면 이건 도저히 가볍게 취급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재민 구청장이 장보고를 보며 물었다.
“그래, 다단계 사기라니 무슨 일인가?”
“어머님이 어떤 의료기 대여 업체에 돈을 투자하셨거든요. 제 생각에 다단계 사기가 분명한데, 제가 찾아 갔더니 어리다고 무시하며 돈을 돌려주지 않더군요.”
“그 회사 이름이 뭔가?”
“주식회사 싸이엔입니다.”
“으으음!”
오재민 구청장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자신의 배우자가 투자한 회사와 같은 회사였기 때문.
그리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한 것이다.
지금은 자신이 정치인인 이상 도저히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 * *
- 주식회사 싸이엔 본사 고객센터
“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나는 접수창구의 안내원에게 다가섰다.
“네, 투자금을 좀 환불 받으려고요.”
“네? 환불이요?”
“네, 제 명의로 된 계좌가 10계좌 정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장보고입니다. 주민등록번호는 …….”
안내원은 컴퓨터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네, 확인해보니 10계좌가 있으신 게 맞네요. 한계좌당 지금 매일 평균 3만5천원 임대배당금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걸 해지하신다고요?”
“네. 바로 해지해주세요.”
안내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음, 그런데 해지하게 되면 전액 환불이 안 되거든요. 손해를 많이 보시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나도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네?”
“띠링!”
+ 스킬[협상 Lv.2]를 사용합니다. +
+ 스킬[고소고발 Lv.2]를 사용합니다. +
나는 준비해온 두 개의 서류를 안내원에게 내밀었다.
한 서류의 제목은 ‘고소장’, 그리고 또 다른 서류의 제목은 ‘소장’이었다.
나는 해신해운 법무팀의 사내변호사 현재형 차장의 도움을 얻어 두 개의 서류를 준비한 상태였다.
안내원이 서류를 뒤적이더니 말했다.
“뭐, 뭐죠 이게?”
“그건 고소장과 소장입니다. 오늘 전액 환불이 안 되면 두 개를 바로 접수할 예정입니다. 사기 사건으로 부산지검에 제출할 고소장입니다. 소장은 투자한 돈 외에 추가로 피해까지 보상하라는 내용이지요.”
“무슨 소리에요!”
안내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나는 또 준비한 서류를 내밀었다.
그 서류는 ‘진정서’라는 제목이 적혀있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이건 영도구청에 제출할 서류입니다. 법인의 목적이 목적 이외의 사업을 하거나 설립허가의 조건에 위반한 경우, 기타 공익을 해하는 경우 주무관청은 법인의 설립허가를 취소할 수 있다고 되어 있거든요.”
“…….”
나는 묵묵부답하는 안내원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 스피커폰을 눌렀다.
“띠링!”
+ 스킬[협상 Lv.2]를 사용합니다. +
+ 스킬[고소고발 Lv.2]를 사용합니다. +
전화신호음이 몇 차례 울린 후. 전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영도구청장님 집무실입니다.”
그 소리에 안내원이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네, 저 장보고라고 합니다. 구청장님께 오늘 전화 드리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요.”
“네 장보고님, 안그래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구청장님께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띠리리.
전화 대기음이 울려 퍼지고.
나는 안내원에게 말했다.
“계속 통화 할까요? 아니면 환불 하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