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200)

‘해상법 전문 변호사를 육성하라고?’

내가? 무슨 수로?

내가 무슨 대학교수도 아니고 어떻게 저 사람을 전문 변호사로 육성하라는 거야!

거기다 육성 퀘스트라니?

황당하지만 장기간 진행되는 퀘스트가 분명해보였다,

제한 시간도 따로 없었기 때문.

그나저나 영국변호사를 나보고 육성하라니.

해운과 선박의 중심은 단연 영국이다.

그렇다 보니 세계 해상법 분야에서도 영국법이 준거법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영국 변호사들이 세계적으로 활약하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영국변호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두 종류로 구분된다.

영국의 변호사 자격은 법정을 출입하는 법정변호사(Barrister)와 법정을 출입하지 않고 사무업무만을 담당하는 사무변호사(Solicitor)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중에서 의뢰인들로부터 의뢰를 받아 1차 적인 법률 자문을 하는 것은 대부분 사무변호사인 Solicitor들의 몫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김태형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사무변호사인 Solicitor.

자세히 바라보니 전생에서 만난 그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 20대에 변호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그는 제법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수해 보이는 표정.

내가 그를 기억하고 있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해신해운에 의리를 지켜준 몇 안 되는 영국변호사였기 때문이다.

전생에 해신해운이 파산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해신해운이 이미 파산할 것이라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 소식이 퍼져나가자 시장은 냉혹하게 돌변했다.

해신해운과 수십 년간 거래를 해온 업체들마저도 하나둘씩 거래를 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평소 해신해운과 거래가 활발하던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냉정한 비즈니스의 세계라지만 해신해운의 직원들은 하루아침에 변해가는 거래처 사람들의 모습에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내가 담당하던 선박의 소유자와 용선계약(선박임대차 계약의 일종)에 관한 분쟁이 발생했다. 그도 해신해운이 망해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제 곧 무너진다는 해신해운을 대리해서 업무를 수행하려는 변호사를 찾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평소 해신해운으로부터 수억의 수임료를 받아가던 영국변호사들도 해신해운의 사건을 더 이상 맡지 않겠다고 법무팀에 통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신해운의 상대방을 대신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해신해운 법무팀에 직접 연락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김태형 영국변호사였다.

평소 해신해운과 거래 관계가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가 전생에 그다지 유명한 변호사는 아니었기 때문.

해신해운 같은 글로벌 대형 해운회사의 법무팀에서 굳이 업계 무명에 가까운 김태형 변호사를 선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해신해운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은 평소 해신해운으로부터 수억의 수임료를 받아간 변호사들이 아니었다.

아무런 인연도 없는 김태형 변호사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나는 서울로 출장을 온 그를 만나 이유를 물은 적이 있다.

돈도 되지 않는 사건에 나서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는 그저 고국의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영국에서 발생한 일을 모르는 척 하기 힘들었다며 웃어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김태형 변호사는 그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상념에 빠진 나를 깨운 것은 현재형 차장이었다.

“삼항사님? 가시죠?”

“네?”

그 순간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삼등항해사에 불과한 나는 이 사람을 육성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느새 생긴 글로벌 인맥들이 있지 않은가?

특히 현재형 차장은 해신해운의 사내변호사이자 법무팀의 에이스.

곧 가까운 미래에 법무팀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람이다.

현재형 차장이라면 김태형 변호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나는 현재형 차장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형 차장님.”

“네?”

그는 내 표정의 의뭉스럽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이렇게 이국땅에서 우연히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났는데 그냥 가는 건 너무 야박하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현재형 차장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그도 알아차린 것이다.

‘김태형 변호사 어필 좀 해볼까?’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와 관련된 사소한 정보들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김태형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장보고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희는 해신해운의 직원들입니다. 해신해운이라고 들어보셨나요?”

“해신해운이요? 당연히 알고 있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해운회사이고 해운업계 TOP 10안에 드는 회사인데 모를 리가 있나요?”

나는 현재형 차장의 표정을 살피기 위해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김태형 변호사의 대답이 다행스럽게도 현재형 차장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해신해운과 같은 해운 회사들은 회사의 규모에 비해 업종 특성상 일반 국민들의 인지도가 비교적 낮았다.

업계에서 세계 선두그룹에 있는 큰 회사인 해신해운도 마찬가지.

해운회사는 기업들을 대상으로 하는 B2B 업종이기 때문에 업계 종사자가 아닌 일반 국민들은 잘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오히려 해신해운 매출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한 계열사 브랜드인 해신택배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더 유명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나는 김태형 변호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서 뭐하시는 중이신가요?”

“이번에 다니던 로펌을 퇴사하고 사무실을 차렸습니다. 인사도 할 겸 P&I 클럽들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영 쉽지 않네요.”

당연하지. 그렇게 막무가내로 찾아온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한편으론 김태형 변호사는 젊은 시절에도 열정이 가득한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태형 변호사님은 해상법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네, 제가 영국에서 해상법으로 유명한 사우스햄튼 로스쿨을 나오다 보니 아무래도 그쪽으로 관심이 많습니다.”

김태형 변호사의 대답에 오히려 관심을 가진 사람은 현재형 차장이었다.

“사우스햄튼이요?”

“네, 맞습니다.”

“오! 저도 몇 년 전에 사우스햄튼에서 LLM(1년 과정의 법학 대학원 전문석사 과정)을 했습니다.”

“아 그럼 동문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음?

갑자기 친해졌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과거의 인연을 도울 수 있다.’

이번 P&I 클럽 투어에 동행 시키면 도움이 많이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육성 퀘스트도 제법 신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런던 히드로 공항

나는 P&I 클럽 투어 일정을 마치고 현재형 차장과 귀국길에 동행하기로 했다.

현재형 차장 덕분에 주요 P&I 클럽들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론 김태형 변호사도 우리 일정에 며칠을 동행했다.

그는 이 공항까지 따라와 우리를 배웅했다.

그가 이번에 만난 인연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그도 알 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막 변호사업을 시작하는 김태형 변호사가 이국땅인 영국에서 업계의 핵심에 있는 이들을 만나 인연을 맺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난 P&I 클럽의 클레임담당자들은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선박과 관련된 사건들을 핸들링하는 사람들이었다.

해상변호사들에게는 사건을 맡기는 그야말로 갑중의 갑인 사람들.

김태형 변호사가 이번에 받은 사람들의 명함은 그의 값진 재산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김태형 변호사와 헤어진 이후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티켓 발권을 위해 잉글랜드 에어라인 카운터로 다가갔다.

우리가 다가서자 카운터의 직원이 말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대한민국 인천입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제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고 들었스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권을 건넸다.

“음?”

카운터의 직원은 여권 정보를 입력하더니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퍼스트 클래스로 예약이 되어 있네요.”“네?”

“동행하시는 분이 있다면 무료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도록 예약되어 있습니다.”

현재형 차장과 나는 마주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 * *

- 한국 부산 영도

런던에서 인천을 거쳐 부산으로 오는 시간은 힘들었지만 살짝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인천 공항에 내리자마자 집에 전화를 걸어 도착을 알렸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가 해주는 집밥이 너무 먹고 싶다고.

지난 몇 십년간 먹어보지 못했던 집밥이 너무 그립게 느껴졌다.

어릴 때는 외식하자고 그렇게 졸랐는데.

지금은 그저 어머니가 해주는 집밥이 제일 그리웠던 것이다.

인천을 지나 부산으로 오는 길은 꽤나 멀게 느껴졌다.

집에 가까워질 수는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미 오래전에 이별했던 가족들을 찾아가는 길이었기 때문.

내가 태어나서 쭉 자란 고향 부산 영도의 어느 골목.

어린 시절 친구들과 공을 차고 술래잡기를 했던 골목들이 아직도 여전했다.

전생에서는 개발되어 사라진 동네였지만 아직은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던 영도 골목의 주택가 곳곳에서 추억이 떠올랐다.

전생에서도 영도를 자주 찾았기 때문에 오랜 만에 집을 찾아가는 길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골목의 끝에 위치한 어느 수수한 주택집 앞에 섰다.

초록색 대문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대로네. 기억 속의 집. 그대로다.

끼이익!

나는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었다.

‘흐흐흐. 대문을 잠그지 않는 것도 기억 그대로네.’

어머니.

그리운 이름을 솟구쳐 올랐다.

나는 이십대 시절 어머니를 부르던 그 방법 그대로 크게 소리쳤다.

“엄마!”

“…….”

“엄마!”

“…….”

“엄마?”

“…….”

여러 번 소리쳤지만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음? 무슨 일이지?’

내가 온다는 것을 알렸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머릿속으로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현관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혹시? 지금이라면 그 일이 있었을 때인가?

현관문을 열기위해 잡아 당겼지만 문은 잠겨 있었다.

안돼!

‘열쇠! 큰일이다.’

아 장독대!

나는 현관 옆 장독대 밑을 뒤졌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어머니가 키를 숨겨놓았던 곳.

역시 그대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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