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200)

그 사람이 뭘 알고 한 소리일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별의별 망상이 다 내 머릿속에 우후죽순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그때.

문 밖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덜컥!

문이 열리더니 방안으로 한 중년의 신사가 들었다.

또각또각.

그는 깔끔하고 비싸 보이는 정장을 입고 머리를 짧고 단정하게 정리한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모습이었다.

007 실사판 뭐 이런 느낌?

구두소리를 내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미스터 장.”

이 사람들이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괜찮습니다. 여기까지 온다고 고생했을 텐데 자리에 앉아계십시오.”

일어난 김에 자리에 앉지 않고 그냥 서있기로 했다. 건방져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겁을 먹은 것은 아니다.

"저는 영국의 비밀정보국(Secret Intelligence Service: SIS)의 이안 요원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저는 장보고입니다. 해신해운의 삼등항해사입니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습관적으로 악수를 위해 손을 내민 것.

하지만 이안 요원은 말없이 내 손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마주 잡진 않았다.

“하하하. 악수는 좀 그렇죠?”

“…….”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 손을 거둬들였다.

“미스터 장,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의자에 편하게 앉으십시오.”

그는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내가 자리에 앉아 그도 마주 앉아 말을 이어갔다.

그가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미스터 장, 당신은 같이 온 밀항자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까?”

“그의 이름은 압둘 무바라크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압둘 무바라크를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제가 승선하던 해신해운의 선박에 몰래 승선한 밀항자였습니다.”“그게 전부입니까?”

“그를 알게 된 경위는 그렇습니다.”

“음, 그럼 그가 영국으로 밀입국하게 도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에게 목적지를 물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당신은 해신해운의 항해사가 아닙니까? 굳이 밀항자를 그렇게 열심히 도울 이유가 있습니까?”

“…….”

나는 섣불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내가 그 동안 압둘 무바라크를 도운 이유.

첫 번째 이유는 우선 그가 향후 복권하게 되는 카타르 3왕자의 최측근이기 때문.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의 부탁이 있기 때문. 그리고 마지막은 전생에서 망명하는 데 실패한 그에 대한 개인적인 연민.

이 세 가지 이유였다.

뭐 하나 밝힐 수 없는 이유들이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이유는 내가 회귀한 사실을 밝히는 것이니 미친놈 취급당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에게 나민 아세르의 이름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지금 과연 옳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고 있는 상황.

결정을 쉽사리 내릴 지 못하는 순간이 초조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

불현듯 협상 스킬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생각을 집중하자 작은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스킬[협상 Lv.2]을 사용합니다. +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스킬의 효과가 발동된 것.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 말이 떠올랐다.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저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호?”

이안 요원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두바이항에서 선박대리점으로부터 받은 현지의 영문 뉴스가 있었습니다. 카타르에서 실각된 관료로 실종되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음!”

이안 요원의 표정은 그야말로 감탄한 표정.

“항해사들이 항구에 들리면 그런 정보도 수집하는 것이 일반적인 업무입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나정도 되니까 하는 거지.

물론 전생에는 그런 기억이 없지만.

“아닙니다. 제가 호기심에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 저는 정보를 중시하거든요.”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놀랍군요.”

이안은 정보기관에 근무하는 요원.

나의 그에게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해 일부러 정보의 중요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압둘 무바라크는 망명 신청을 했습니까?”

“음? 무슨 뜻입니까?”

이안 요원은 말을 아끼는 듯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심문하는 사람이 말을 아낄 것이라는 거은 예상했던 일. 나의 번뜻이는 재기를 보여줘서 그의 호감을 사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영국으로 오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요.”

“음.”

“그리고 MI6도 그 사람에게 아직 관심이 있지 않겠습니까. 정확히 말하면 카타르의 3왕자에게 말입니다.”

“……!”

이안 요원은 표정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 이채가 발하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압둘 무바라크는 카타르 3왕자의 최측근이 아닙니까?”

“……!”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아직 놓치지 싶지 않아하는 영국이라면 서방세력에 우호적인 그의 측근을 MI6를 동원해서라도 보호하고 싶어 하지 않겠습니까?”

“……!”

“그리고 당신은 중동에서 일어나는 이 일을 담당하는 요원일 테지요. 그리고 뭔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이안은 놀라는 표정도 감추지 못했다.

짜식, 감동 받은 표정이네.

하긴 바다의 삼등항해사가 이정도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내가 생각해도 나의 안목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사실은 전생의 기억이 떠오라 약간의 유추를 했을 뿐이지만 그 사실을 굳이 이안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래에 왕권을 물려받게 되는 3왕자는 친서방 성향으로 분류되는 사람.

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이곳에 오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사람이 다시 왕권을 잡기 위해 도움을 주는 세력이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중동에서 그런 물밑작업을 지원할 세력이라면 어디일까?

그 답을 맞히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런 짓을 할 곳은 미국의 CIA과 영국의 MI6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중동에서 발생하는 굉장히 많은 문제들이 이 영국 놈들 때문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닌가?

한국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영국 놈들은 그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다.

원래 때린 놈들은 기억을 금방 잊는 법.

그는 내 말을 듣고 이번에는 진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하하! 이거 제가 정말 한방 먹었습니다.”

이안 요원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오히려 많이 배웠습니다. 미스터 장 당신의 식견이 정말 날카롭습니다.”

그가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저는 MI6에서 중동 담당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사보이 호텔(Savoy Hotel)

- 영국 정보기관 MI6의 안가

MI6의 미남 요원인 이안요원이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는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느새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나에 대한 호감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미스터 장, 사실 제가 이곳에 직접 온 이유는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미스터 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개인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부하직원들에게 뒤처리를 맡길까 했지요. 하지만 이렇게 직접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그저 선박회사의 삼등항해사에 불과한데요.”

“하하하. 그 삼등항해사가 큰일을 해낸 것이지요.”

“네?”

“두바이에서 압둘 무바라크를 성공적으로 탈출 시킨 사람이 있다고 하니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살짝 찔리는데?

엄밀히 말하면 압둘 무바라크를 탈출 시킨 건 내가 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나민 아세르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실직고 하는 게 낫겠지?

MI6 정도 되는 기간이면 이미 관련 정보를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MI6를 상대로 허세를 부릴 이유도 없다.’

나는 이안 요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요원님, 저는 사실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저 약간의 도움을 준 것에 불과하지요. 사실 압둘 무바라크에게 제일 필요한 도움을 준 사람들은 따로 있습니다.”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안 요원.

그도 이미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눈빛.

“네, 그렇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압둘 무바라크를 탈출시키기 위해 협조한 두바이의 조력자도 누군지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와 긴밀하게 협의하던 중이었으니까요.”

우리 둘 다 그 조력자가 누구인지는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나민 아세르.’

나는 두바이에서 만난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의 얼굴을 떠올렸다.

‘능구렁이 같은 인간!’

이안 요원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이 일에 미스터 장의 도움이 컸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이번에 망명을 시도한 사람이 모두 몇 명인지 아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에 망명을 시도한 3왕자의 최측근이 모두 총 5명이었습니다.”

“5명? 그렇게 많았습니까?”

“네, 이들은 모두 3왕자의 최측근 핵심 세력으로 정재계의 요직에 있는 인사들이었죠.”

5명이나?

하지만, 우리 배에 승선한 사람은 압둘 무바라크가 유일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중 유일하게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바로 압둘 무바라크입니다.”

“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본국을 탈출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두바이에서 본국으로 송환되었습니다.”

“……!”

“목숨을 잃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꿀꺽. 목숨을 잃었다고? 도망치다가?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위험한 일에 개입되어 있었구나!’

압둘 무바라크가 송환되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탈출 과정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

처음 듣는 이야기에 나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전생에서도 몰랐던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한 일에 개입되어 있다니.’

어쩌면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전생에서 압둘 무바라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이 일이 발생한 지 한참 지난 뒤였기 때문이다.

이 일이 있은 후 약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3왕자가 왕권을 잡는데 성공하게 된다.

내가 전생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그제야 BK 해운이 밀항자를 잘못 태워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대한민국의 해운업계에 퍼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때도 밀항자 이외에 다른 측근들에 대한 정보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우리나라 해운업계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에 관심 있어 할 사람도 없었을 테지.’

내가 이안 요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왜 진작 비너스호로 와서 압둘 무바라크를 인계 받지 않았습니까?”

“정보기관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 국적의 선박에 함부로 실력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보통 선박은 해당 선적국(선박의 국적)의 영토로 간주된다.

따라서 아무리 MI6라 하여도 남의 나라 영토를 침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외교적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안 요원이 내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뭐, 사실 해신해운 배에서 압둘 무바라크를 탈출 시키는 작전을 실행하자는 의견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두바이의 협조자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네? 무슨 이유로?”

“미스터 장을 믿어보자고 하더군요. 만나보니 믿음이 간다고.”

“……!”

“용감한 사람 같다고. 친구와 손님을 배신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

나민 아세르가 나를 그 정도로 신뢰했다고?

‘그동안 능구렁이라고 욕했던 게 미안하네.’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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