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200)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는 물건을 하나도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짐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안전모와 조끼를 입는 것으로 압둘 무바라크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찰리를 향해 한번 고개를 끄덕인 후 선실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선실을 빠져 나온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와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컨테이너 사이에 몸을 숨겼다.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하선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갑시다.”

내가 압둘 무바라크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작업을 마친 듯 하선할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 목격됐다.

우리는 빠르게 배를 내려가는 라싱업체의 작업부들 뒤로 따라붙었다.

선원들도 하선하는 하역업체 작업부들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이제 선적작업을 마치고 출항준비를 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두로 빠르게 내려섰다. 작업부들을 따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입국장 근처로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빨리 갑시다.”

우리는 입국장을 향하기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뭐지?’

우리 등 뒤로 플래시 라이터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빛이 우리의 등을 강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멈춰(Freeze)!"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경찰로 보이는 몇 명의 사내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목격됐다.

“경찰인가?”

내 말에 긴장한 표정의 압둘 무바라크가 말했다.

“경찰? 삼항사님, 괜히 저와 같이 있으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혼자 도망치십시오.”

“네?”

“저는 잡혀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난민신청을 하든지 아니면 망명신청을 해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입국장에서 신청하려고 했던 것이니 경찰에 잡혀도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음…….”

압둘 무바라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만약 비너스호에 타고 있던 선원이 신고를 한 것이거나 혹시라도 압둘 무바라크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는 경우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찰들이 강제로 압둘 무바라크를 비너스호에 승선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 경찰들이 가까운 거리까지 도착했다.

“삼항사님! 도망 안가고 뭐하는 겁니까? 빨리 도망치세요!”

압둘 무바라크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같이 있으면 밀항자를 도운 공범으로 처벌 받을 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지만 나는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 도망치게 되면 임무를 달성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만약 비너스호로 다시 보내진다면 퀘스트를 달성할 수 없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

경찰로 보이는 사내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이 들고 있는 강력한 랜턴의 빛이 내 눈을 향해 쏟아졌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 빛을 손으로 가렸다.

경찰 뒤로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새끼! 여기서 도망칠 줄 알았다!”

응? 이 목소리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그림자가 경찰들 뒤에서 걸어 나왔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나는 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흥! 미리 해경에 신고해 놓길 잘했네.”

망명자 or 테러범

경찰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의 정체.

그는 바로 김영 일등항해사였다.

김영 일등항해사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경찰들을 바라보며 크게 외쳤다.

“바로 저놈입니다! 저놈이 바로 중동에서 밀항한 놈입니다.”

김영 일등항해사의 손은 압둘 무바라크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놈은 중동에서 말항해서 영국으로 밀입국하려는 것입니다. 테러범이 분명합니다!”

잔뜩 흥분한 표정.

"일항사님?“

내가 그를 불렀다.

김영 일등항해사는 내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테러범이라니 무슨 소리에요?”

“어? 삼항사가 왜? 일찍 나간 거 아니었어? 뭐하는 거야 여기서?”

김영 일등항해사도 내가 압둘 무바라크가 밀항하는 일을 도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

내가 말없이 그를 노려보자 김영 일등항해사는 황급히 시선을 회피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자기를 구조해준 나까지 이 일에 휘말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겠지.

김영 일등항해사 옆에 있던 정복의 사내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손을 랜턴으로 우리를 비추고 한손은 허리춤에 있는 총에 손을 올린채로 천천히 말했다.

“Don't move. We are Coast Guard!(움직이지 마세요. 우리는 해양경찰입니다!)”

코스트가드라고 정체를 밝힌 사내가 이어서 말했다.

“Kneel down and put your hands above your head(무릎을 꿇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세요.)”

나와 압둘 무바라크는 경찰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아무리 그동안 대담한 사건들을 해왔더라도 경찰에 반항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한 사내가 수갑을 빼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I will inform you of Miranda's principles. You have the right to appoint a lawyer…….(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겠습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큰일인데.’

경찰에 잡혀 가면 밀항자의 공범으로 처벌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 일을 타개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압둘 무바라크의 표정도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두두두!

‘이 소리는?’

두두두! 두두두!

하늘에서 큰 소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의 정체는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헬리콥터에서는 강하고 큰 라이트 우리를 향해 비추기 시작했다.

날아온 헬리콥터는 어느새 우리의 머리 바로 위 상공에 위치해 있었다.

두두두! 두두두!

촤라락!

헬기에서 하강 로프가 떨어져 내렸다. 우리가 무릎을 꿇고 있는 바로 옆.

그리고 헬기에서 두 명의 사내가 로프를 타고 빠르게 하강을 시작했다.

번개 같이 내려선 사내들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입고 있는 복장은 검은색 전투복.

그들의 전투복에는 특수부대원들이 사용할 법한 나이트비전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다, 당신들 뭡니까?”

코스트가드가 그들에게 소리쳤다. 코스트가드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MI6(영국의 해외정보 전담 정보기관)에서 왔습니다. 저는 더블오나인(009)입니다.”

“네? MI6?”

“이들의 신병은 우리가 확보하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기밀사항입니다.”

MI6 요원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가 기밀이라고 하자 코스트가드들은 벙어리가 된 것 마냥 입을 그대로 다물었다.

MI6 소속의 더블오나인(009) 요원이 옆에 있던 사내에게 턱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저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이동한다.”

“예 써.”

짧게 대답한 사내가 나에게 다가와 복면을 뒤집어씌우기 시작했다.

“뭡니까!”

“조용히 하십시오.”

‘무슨 일이야 이게.’

나는 도대체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끼이익!

곧이어 자동차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급제동하는 타이어 소리가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덜컥.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 탑승합니다. 따라 오십시오.”

나와 압둘 부바라크는 복면을 뒤집어 쓴 채로 차량에 태워졌다.

그리고 우리를 태운 차량은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탑승한 차량은 한차례 막힘도 없이 계속 질주 했다. 항구를 빠져나갈 때면 검문이 있을 텐데 검문을 받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프리패스인 듯 막힘이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Where are we going?(어디로 가는 겁니까?)”

“Be quiet. It's confidential.(조용히 하십시오. 기밀입니다.)”

“…….”

딱딱한 MI6 요원의 대답에 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정적만이 흘렀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한참을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 영국 모처 MI6의 안가

우리는 차에 태워진 채로 몇 시간을 이동했다.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이들은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몇 시간을 달린 차가 드디어 멈추고.

우리는 어떤 건물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나는 방안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을 들은 후 복면을 벗을 수 있었다.

복면을 벗은 후 의자에 앉은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통 회색으로 색칠된 벽면.

이곳은 헐리우드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취조실의 모습이 분명해 보였다.

회색 방에 탁자와 의자 두 개.

그리고 눈앞에는 유리로 된 창이 있지만 외부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저 건너편에 사람들이 있겠지?’

영화 속에서는 분명 그랬다.

그나저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뭐? MI6?

‘MI6라면 007같은 영화에서 나오는 영국의 정보기관 아니야?’

미국으로 치면 CIA, 우리나라로 치면 국정원 같은.

그런 정보기관에서 왜 우리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닌 압둘 무바라크를 찾아왔겠지.

나는 아마도 그와 같이 있다가 끌려 온 것이 분명했다.

살짝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일개 선원에 불과한 나를 MI6 같은 곳에서 데려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문득 김영 일등항해사가 외쳤던 소리가 생각났다.

‘설마 압둘 무바라크가 테러범이거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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