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면 조셉의 뒤통수를 한번 툭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 부둣가를 걷기 시작했다.
“삼항사님!”
부두를 걸어가다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선원들이 갑판의 난간으로 나와 전부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씨맨쉽! 씨맨쉽!”
조셉이 크게 외치며 양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요란하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조셉 주위로 같이 있던 선원들이 조셉을 보며 한바탕 크게 웃는 모습도 보였다.
이희영 선장, 김호영 이항사, 김현호 기관장, 갑판장, 조셉 그리고 다른 선원들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시선은 마지막 한사람을 찾고 있었다.
선원들의 맨 왼쪽에 서 있는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서있었다. 찰리.
찰리도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지차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 *
- 펠릭스토우 컨테이너 터미널 부두 화장실.
몇 시간 후.
아직 비너스호의 하역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입국장으로 바로 나가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와 미리 준비해둔 작업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어둠이 깔리면 작전이 개시될 예정이다.
비너스호로 잠입하라!
- 선박 “M.V.비너스”호의 갑판
비너스호는 컨테이너 하역 작업을 위해 펠릭스토우 항구에 접안하고 있는 상태.
선박 위에서는 크레인을 이용해서 한창 컨테이너화물을 내리고 싣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여전히 부두의 한쪽 구석에 숨어서 비너스호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되어 가는 것 같네.”
잠입을 준비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컨테이너 화물의 선적(화물을 배에 실음)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선박으로 다시 몰래 잠입할 생각이었다.
‘살다보니 참 별에 별일이 다 있네.’
비너스호는 얼마 전까지 내가 삼항사로 승선했던 선박.
방금 전에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내렸던 선박에 몰래 잠입해야 한다니?
지금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내가 노리고 있는 기회는 라싱(Lashing)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라싱은 컨테이너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작업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고박작업이라고 부르는 작업.
컨테이너를 선박에 적재하게 되면 바다를 운항하는 중에 파도 등을 만나면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운송 중에 흔들려 외부의 충격이나 제품 간의 데미지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는 의미.
따라서 반드시 컨테이너 외부와 내부를 고정하는 작업이 필요한데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고박, 영어로는 라싱(Lashing)이라고 불렀다.
해신해운과 같은 글로벌선사들은 기항하는 항구마다 현지의 라싱업체들과 용역계약을 체결해서 이용하게 된다.
컨테이너선이 항구에 도착해서 화물을 내리기 전에 고박을 풀고, 화물을 선적한 후에는 고박을 하는 업체가 필요하기 때문.
즉, 나는 컨테이너를 모두 선적한 이후 비너스호에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올라가게 순간을 노리는 것이다.
라싱업체의 작업부들 속에 섞여서 선박에 진입할 계획.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비너스호의 선적 작업도 거의 마무리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준비해둔 안전모와 형광색 안전 조끼를 꺼내 들었다.
“이 정도면 문제없겠네.”
안전모를 쓰고 형광색 안전 조끼를 입자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의 인상착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나타나면 바로 뒤를 따라 붙을 계획이었다.
‘그래도 밀항자의 목적지가 영국이라서 다행이네.’
영국은 유럽이지만 이민자들이 많은 나라.
이곳의 항만노동자들도 세계 각국에서는 오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항만노동자들 중에는 동양인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에 얼굴만 잘 가린다면 들킬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저기 왔구나!”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나타났다.
작업부들은 라싱작업을 할 때 사용하는 긴 막대기 같은 도구를 들고 있었다. 고박할 때 쓰는 도구였다.
나도 얼른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마스크처럼 입을 가려 얼굴이 잘 드러나지 않게 착용했다.
그리고 빠르게 라싱업체 사람들 뒤로 따라 붙었다.
안전모에 형광조끼를 입은 채로 선박으로 들어서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비너스호의 선원들도 작업에 여념이 없는 상황.
라싱업체의 작업부들이 선박으로 우르르 몰려 왔지만 다들 각자의 일을 수행하느라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 펠릭스토우에서 선적하는 컨테이너화물이 많아서 다행이다!’
고박작업을 완료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소요될 예정.
밀항자를 데리고 나올 시간은 충분했다.
‘그래도 서둘러야지.’
나는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 근처의 컨테이너에 작업을 하러 가는 척 컨테이너를 살피며 이동했다.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다다랐을 무렵.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빠르게 계단으로 뛰어 들었다. 다행히 내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 비너스호 내부의 선실
빠르게 달려 도착한 곳은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가 대기하고 있는 선실.
항구에서 선적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은 선원들이 가장 바쁜 시간.
다행히 선실 근처에는 아무도 없는 듯 보였다.
압둘 무바라크는 선실에 대기하고 있었다.
항구에 입항하면 밀항자는 선실에 대기하도록 이희영 선장이 명령했기 때문.
밀항자들은 항구에 도착하면 몰래 항구에 내려서 도주할 수 있기 때문에 이희영 선장은 선실 대기를 명령했다.
이희영 선장은 돌아가는 길에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를 두바이 당국이 인계할 계획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압둘 무바라크가 영국에 내리기 위해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뜻이었다.
압둘 무바라크가 있는 선실문으로 다가설 무렵.
또각또각.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누가 오는구나.’
급하게 복도 끝으로 몸을 숨겼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걸어오는 상대를 살폈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갑판부원 찰리.
찰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어느새 압둘 무바라크의 선실 근처까지 다가왔다.
찰리가 내가 있는 방향을 등지고 섰다.
그 순간.
나는 빠르게 찰리에게 달려들었다.
+ 스킬[고무고무킥 Lv.4]을 사용합니다. +
팡!
찰리가 목뒤를 순간적으로 가격 당하자 정신을 잃은 듯 비틀 거렸다.
나는 찰리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게 그를 부축했다.
딸칵.
압둘 무바라크가 있는 선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가 들어서자 압둘 무바라크가 정신을 잃은 듯 보이는 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뭡니까? 이 사람은?”
“근처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제압했습니다.”
압둘 무바라크가 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찰리를 의자에 앉힌 후 손과 발을 끈으로 묶었다.
“굳이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압둘 무바라크가 물었다.
“선장님이 밀항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명씩 교대로 감독하라고 하셨거든요.”
“네, 그렇군요.”
“그리고 이 정도는 해 둬야 다른 사람들도 찰리가 밀항자에게 제압당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네?”
압둘 무바라크는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 나는 웃으며 말했다.
“제대로 묶어야 티가 안 나죠. 그렇지 찰리? 아프진 않지?”
“예, 써.”
눈을 감고 있던 찰리는 눈을 살며시 떴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물어보면 밀항자는 중동 어쌔신 조직원이었다고 싸움을 잘하더라고 말하면 될 거야.”
“예, 써.”
압둘 무바라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찰리가 한 주먹 하거든요. 조직원 정도는 돼야 사람들이 믿을 겁니다. 하하하.”
“그, 그렇군요.”
졸지에 어쌔신 길드의 조직원이 되어버린 압둘 무바라크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하선하기 전에 미리 찰리에게 말해뒀습니다. 라싱작업이 시작되면 감시 업무를 교대해달라고요.”
“아, 그렇군요.”
“찰리는 의리가 있는 사내이니 믿어도 됩니다.”
압둘 무바라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도 선원들과 어울리며 생활해온 터라 찰리의 성품은 신뢰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삼항사님은 그 조타수랑 더 친하지 않았습니까?”
“…….”
끙. 맞긴 맞는데.
조셉은 이런 일을 몰래 하기에는 살짝 부담스러운 스타일의 캐릭터였다.
일단 입이 싸고, 수다스러워 비밀 유지가 안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차후에라도 입단속이 안 될 가능성도 있고.
그에 반해 찰리는 인도네시아 씨맨스클럽과 싱가포르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에도 내 옆을 지켰던 듬직한 사내.
조셉에게는 살짝 미안하지만 이런 일에는 찰리가 좀 더 믿음이 가는건 어쩔 수 없네?
“찰리 조금만 참아 금방 사람들이 찾으러 올 테니까.”
“예, 써.”
“김영 일항사는 배에서 하선했나?”
“음, 삼항사님 내리시고 좀 있다가 인수인계 마쳤다고 하면서 하선했습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갔네?”
“네, 뭐 병원 갔다가 가야된다면 선장님한테 빨리 내리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병원을 또 갔다고?”
아직 치료할게 남은 모양이었다.
보통 같은 항구에서 교대하는 선원들은 한국까지 함께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업무 방법이었따.
한국까지 돌아가는 길이 심심하기도 하거니와 구태여 선원들이 따로 이동할 이유도 없기 때문.
회사에서도 항공권을 같이 예약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업무 절차였다.
하지만 나는 압둘 무바라크의 일을 처리해야 되기 때문에 따로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미리 회사에 영국에서 개인적으로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항공편도 따로 예약을 해둔 상태.
물론 김영 일등항해사도 나와 함께 이동하는 게 불편한지 따로 이동하는 것에 대해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찰리의 손과 발을 의자에 묶은 후 찰리에게 말했다.
“찰리 도와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제가 더 고맙죠.”“삼항사님 덕분에 빚도 갚고. 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동안.”
나는 말에 말없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다사나이들의 우정에는 긴 말이 필요 없는 법.
어깨를 두드리는 동작만으로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는데 충분했다.
나는 배낭에서 안전모와 형광 조끼를 꺼내 압둘 무바라크에게 건넸다.
“이걸 착용하십시오. 곧 작업이 끝날 시간입니다. 올라가서 분위기를 보고 내려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압둘 무바라크가 빠르게 준비를 시작했다.
“다른 건 없습니까?”
“네, 저는 밀항자 신분 아닙니까?”
“아! 그렇지요. 허허허.”
그는 밀항자로 선박에 승선한 상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