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이 새끼 때문에 나도 머리가 어떻게 됐나보네.’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었다.
물론 김영 일등항해사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
하지만 압둘 무바라크는 다르지 않은가.
중동의 신사, 경제관료,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엘리트.
그리고 성격도 젠틀한 중동의 신사이지 않은가.
그런데 갑자기 어제 본 그의 살벌한 눈빛이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
신사 맞겠지?
‘아마도?’
어제 압둘 무바라크의 분노한 표정을 떠올리니 나도 갑자기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살짝 고개를 가로 저은 후 이등항해사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일항사님이 30분이나 지각하고 배에도 없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지. 그럼 조금만 더 찾아보고 선장님한테 보고하지 뭐.”
“네, 그럼 일단 나도 나가서 찾아볼게요. 갑판장 시켜서 부원들도 한 번 더 찾아보라고 하고.”
“그래, 무전기 들고 가.”
“네.”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무전 때리고.”
“예 써!”
‘알코올중독인 거 같던데 어디서 술 취해서 자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무전기를 받아 들고 선교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내가 처음 찾아간 곳은 일등항해사의 방이었다.
‘나보고는 선교 정리하라는 둥 잔소리 심하게 하더니 자기 방은 완전 돼지우리 저리가라네?’
잡동사니가 널려 있는 방바닥 사이로 술병들과 맥주 캔이 잔뜩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 정도면 완전 알코올 중독 아니야?’
휴지통에도 맥주 캔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선원으로 승선생활을 하는 것은 외로움과 싸우는 일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들과 몇 개월간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통 항해사들의 승선생활은 선장들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장이 탁구를 좋아하면 항해사들은 돌아가서 선장과 탁구 대결을 펼치게 된다.
그렇게 몇 개월 하다가 하선할 때가 되면 웬만한 탁구선수 뺨치는 실력을 쌓게 된다.
마치 드래곤볼에 나오는 정신과 시간의 방같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후임으로 오는 항해사들에게도 원만한 직장생활을 위해서 선장의 취향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승선 전에 꼭 좋은 탁구채를 준비해서 오라는 팁을 주는 것이다.
다른 취미가 없는 사람들은 일을 마치고 맥주 한잔 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생각하는 선원들이 부지기수다.
육지에서 근무하면 퇴근이라도 있지만 선박에서는 그런 것도 없다.
일과 시간을 마치고 선실에서 맥주라도 한잔 하지 않는다면 승선생활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승선생활이 외로움과 싸우는 시간이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갑판
웅성웅성.
갑판부에는 몇 명 외국인 선원들이 한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잘 들리진 않았지만 간간히 크게 고함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아니다 다를까.
외국인 선원들에게 둘러싸여 벽으로 몰려 있는 사람은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였다.
‘설마 또 어쌔신이 어쩌고 그러면서 사람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갑판장을 발견하고 빨리 그에게로 다가섰다.
“무슨 일입니까?”
“삼항사님, 오셨군요.”
“항사님 찾는 거 아니었습니까? 왜 여기 다들 모여 있습니까?”
“아, 여기 없는 사람들이 찾고 있을 겁니다.”
“네? 그럼 여기에는 왜 모여 있는 거죠?”
“부원들 말로는 밀항자가 범인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아까부터 저러고 있네요.”
“왜요?”
“뭐 범죄를 저지르고 밀항한 게 아니냐! 그리고…….”
“어쌔신 어쩌고 뭐 이러고 있는 건 아니겠죠?”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나는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압둘 무바라크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주위의 선원들에게 말했다.
“자,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흩어져서 일항사님을 찾아봅시다.”
“삼항사님! 저놈이 한 짓입니다.”
“맞아요. 저놈이 범인입니다.”
“어제 일항사님을 계속 노려보는걸.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선원들이 돌아가며 소리쳤다.
이들은 압둘 무바라크가 범인이라고 확신에 가득찬 모습이었다.
“그만하세요!”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선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나도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외국인 선원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몸.
평소 큰소리를 내지 않는 내가 호통을 치자 선원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만약 우리가 이러고 있는 사이에 일항사님이 어디 쓰러져 있기라도 하면 어쩔 겁니까!”
“…….”
“자, 그만 하고 빨리 흩어져서 찾아봅시다. 밀항자를 추궁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요.”
내가 갑판장을 바라보며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갑판장이 내 말듣을 알아듣고 빠르게 대답했다.
“네, 삼항사님. 조를 나눠서 구역별로 살펴보겠습니다.”
“네.”
갑판장이 부원들을 모아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압둘 무바라크.
살펴보니 그의 얼굴에도 살짝 상처가 있는 듯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네, 뭐…….”
“얼굴에 뭐 긁힌 자국 같은 게 있네요?”
“아? 그렇습니까?”
압둘 무바라크가 황급히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닦아냈다.
“벽 사이에 뭐가 보여서 청소하려고 들어가다 긁혔나 봅니다.”
“음?”
벽 사이? 그런 곳까지 굳이 청소하려고 했다고?
그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뭐…….”
“일항사가 선박에서 사라져서 난리가 났답니다. 그래서 저러는 것이니 이해를 좀 해주세요.”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선원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나 보네.
그런데.
이어지는 놀라운 목소리.
“제가 오늘 새벽에 그 사람을 봤거든요.”
“……?”
컥!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켰다.
뭐? 뭐라고?
“네? 무슨 소립니까? 그게?”
나는 놀란 눈으로 압둘 무바라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와는 달리 그의 눈은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그는 전혀 흥분한 기색이 없어보였다.
언제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본 살인자의 눈빛.
그런 느낌인가?
“봤다니 무슨 소리에요?
“그 사람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
무슨 소리야 이게.
설마? 혹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 혹시 중동에 그런 조직이 있다고 하던데요”
“음?”
“어쌔신……, 뭐 그런 곳 출신입니까?”
압둘 무바라크이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사늘한 미소가 나에게 날아와 꽂혔다.
꿀꺽.
나는 싸늘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I am King of the world
- 선박 ‘M.V. 비너스’호의 갑판
압둘 무바라크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네?”
꿀꺽.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어쌔신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하하하. 아, 아니겠죠?”
“…….”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혹 그 자체.
“하하하. 헛소문이 선박에 돌고 있다고 해서요.”
“어떤?”
“외국인 부원들 사이에 당신이 중동의 어쌔신 길드 조직원이다.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이 배로 밀항한 것이다. 뭐 이런 말도 안되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하네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허허허.”
“그, 그렇지요? 하하하.”
나도 살짝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유치하게 어쌔신이라니!
그나저나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일항사가 바다로 떨어졌다는 게 무슨 소리입니까?”
“일등항해사 그 사람 말입니다. 그 사람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네?”
“제가 좀 전에 봤거든요.”
“……. 혹시 뒤에서 일항사를 바다로 밀어버리거나 하신 건 아니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허허허.”
“그럼?”
“산책 겸 청소나 할까 해서 일찍 일어나 갑판을 좀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앞에서 술에 취한 건지 살짝 비틀거리며 걷고 있더군요.”
“그런데요.”
“난간에 올라가 바다를 향해 소변을 누더군요.”
“…….”
“그러더니 갑자기 두 팔을 벌리더니 타이타닉 영화에 나오는 대사를 흉내 내면서 소리쳤습니다.”
“아임 킹 오브 더 월드(I'm King of the world)?”
압둘 무바라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미친 새끼! 술에 취한 놈이 뭐하는 짓이야!
다급하게 물었다.
“그래서요?”
“술에 취해서 그런지 중심을 잡지 못하더니 갑자기 바다로 떨어져 버렸지요.”
“…….”
바다로 떨어져 버렸지요?
뭐야 이 사람.
무슨 영화 속 한 장면을 설명하는 사람 처럼 담담하네.
‘역시 이 사람도 정상은 아니구나!’
이런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이쯤 되니 일등항해사가 미친 건지 이 밀항자가 미친 건지 이해가 안 되는 지경이다.
‘아, 둘 다 미친 건가?’
아무튼.
“그럼 빨리 사람들한테 알려야지 이러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음? 사람들이랑 말하지 말라면서요. 정체가 탄로 난다고.”
“…….”
시발 뭔 소리야 이게.
사람 목숨이 달렸는데 이 사람이!
이거, 이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새로운 스타일의 고문관이네.
할 말을 잃은 내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나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을 이어갔다.
“삼항사님, 크게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지금 걱정 안하게 생겼습니까? 그 사람은 수영도 못한다고요! 그 사람 별명이 맥주병이라고요!”
“그래요? 그럼 다행이군요.”
“네?”
“그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달려가서 재빨리 구명 튜브를 던져줬습니다.”
“아! 그럼 어디로 갔습니까?”
“규명튜브를 잡는 것 까지는 봤습니다. 그 이후로는 떠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아마 조류를 타고 바다로 떠내려갔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