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무슨 상황인지 모르니 좀 지켜봐야지.’
바로 나서지 않고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흥분한 모습의 김영 일등항해사와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잔뜩 흥분한 김영 일등항해사가 위협하듯 손을 들어 올리며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어디 이 밀항자 새끼가 시키는 대로 안하고 눈을 부라려!”
“…….”
김영 일등항해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살짝 붉은 것이 오늘도 왠지 술을 한잔 마시고 올라온 게 아닌지 의심되는 상황.
김영 일등항해사가 말을 이어갔다.
“이 새끼 이거! 내가 며칠 지켜보니까 영어도 다 알아듣는 눈치던데 모르는 척 하고 말이야.”
“…….”
“이 새끼 이거 정체가 뭐야!”
이 썩을 놈이!
정체 밝혀지면 우리 다 죽는다! 이 멍청한 놈아!
얼른 달려 나가 일등항해사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
“이 새끼 가만히 보니까 일도 제대로 안하고 말이야. 배에서 밥이나 축내고.”
“…….”
“어? 여기가 호텔이야?”
“…….”
흥분한 김영 일등항해사가 영어도 아닌 한국말로 분노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압둘 무바라크의 얼굴에도 분노가 어려 있었다.
‘좀처럼 속마음을 표출하지 않는 양반이 완전 열 받았네.’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가 한국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눈치로 보아 일등항해사가 자신에게 험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다 알아들었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말려야겠어. 어쨌든 저 사람은 나 때문에 이 배에 탄 거니까.
그의 곁으로 다가서자 술 냄새가 살짝 풍겨 올랐다.
"일항사님, 진정하시죠.“
내가 일등항해사에게 다가서며 말리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뭐야!”
탁!
일등항해사는 내 손등을 강하게 쳐냈다.
‘이 새끼가 진짜!
“그래, 삼항사가 저 놈을 그렇게 감싸고 돌았다면서?”
“그런 게 아니라 다 사연이 있겠죠. 오죽하면 배에 올라탔겠습니까?”
“사연 같은 소리하네! 거지같은 놈이 어디 선진국 같은데 몰래 밀입국 하려고 한 거겠지!”
‘거지?’
이 미친놈이 중동 왕자의 친구한테!
모르긴 몰라도 저놈이 가진 자산만으로 이 배를 살 수 있을 정도라고!
하지만 갑판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밀항자 신분이니 뭐라 할 말이 없네.
그때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이희영 선장이 나타났다.
“서, 선장님.”
“부원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항해사들끼리 이게 뭐하는 짓인가!”
술에 취한 일등항해사도 선장을 보자 알코올이 날아간 듯 보였다.
이희영 선장은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말했다.
“갑판장, 부원들을 다 데리고 빨리 해산하게!”
“네, 선장님.”
평소 볼 수 없는 선장의 화난 모습.
갑판장이 선장의 말을 듣고 빠르게 부원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이희영 선장을 우리를 바라보며 따라 올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큽! 젠장! 이놈 때문에 나도 오랜만에 선장님 잔소리 좀 듣겠네!’
선장의 불같은 눈빛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일등항해사는 말없이 선장의 뒤를 따라 선교로 올라갔다.
우리의 뒷모습은 교무실로 끌려가는 문제아들과 다르지 않았다.
* * *
일과 시간이 끝난 후 선실.
똑똑똑!
“삼항사님! 삼항사님!”
나는 노크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방문을 열자 조셉이 문 앞에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삼항사님.”
조셉의 얼굴은 살짝 겁에 질려있었다.
“왜 그래?
“일항사님이 없어졌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야 그게? 일항사가 없어지다니?”
“당직시간인데 일항사님이 안 올라와서 찾으러 갔는데 안보여요.”
“음?”
“이항사님이 빨리 선교로 좀 올라오래요.”
“그래, 빨리 가보자.”
나는 조셉을 따라 빠르게 선교로 뛰어 올라갔다.
“이항사님,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에요?”
“몰라, 당직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도 일항사님이 안보이네. 방에도 없고.”
“뭐 어디 잠깐 둘러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방에 정복이 그대로 있다네. 준비도 안했다는 거잖아.”
“음, 그건 좀 이상하네. 찾아보라고 했어요?”
“응 부원들한테 찾아보라고 했지. 그런데 없어. 배에서 사라졌어.”
뭐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때 조셉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기, 써(Sir)"
좀처럼 볼 수 없는 심각한 표정의 조셉을 보며 내가 말했다.
"음? 조셉, 뭐 할 말 있어?“
“삼항사님, 혹시 말인데요. 그냥 근거는 없고 의견이긴 한데요…….”
“조셉!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시간 없어!”
“밀항자가 사고를 친 거 아닐까요?”
“뭐?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 어제 그 일이 있었잖아요.”
“무슨 일? 어제 일항사님이 밀항자한테 뭐라고 소리친 거 가지고 그러는 거야?”
“네. 사람들 말이 그때 밀항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고 했거든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무슨 소문?”
“밀항자가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치려고 배에 올라탄 게 아니냐는 소문 말이에요!”
“뭐?”
“누가 그러더라고요. 중동의 그 유명한 어쌔신 뭐 그런 조직 출신이 아니냐고 그게 아니면 두바이에서 밀항할 이유가 있겠냐고.”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이게.
아무튼 몇 개월 내내 선박에 갇혀 있다 보면 뒷담화는 선원들의 일상생활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없던 과거도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이 선박생활의 묘미.
그런 황당무계한 헛소문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냐고. 도대체.
“뭐? 살인!”
있네. 그런 사람.
“어쌔신?”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조셉의 말에 눈을 부릅뜬 채로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실종사건 or 살인사건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조셉!”
“네?”
“그 말이 사실이야?”
“저도 들은 소문인데요. 부원들 사이에는 이미 오래전에 퍼진 소문입니다.”
“…….”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잘 논다. 아주 이것들이 쌍으로.
그게 사실이겠냐!
전생에는 참 믿음직한 선배였는데. 다시 보니 쫌 덜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무튼 요즘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형!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신경 꺼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심각하게 듣고 있어요.”
“야! 진짜 밀항자가 범죄자면 어쩌려고 그래?”
음, 그건 그럴지도 모르겠네.
뭐, 사실 범죄자 신분으로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압둘 무바라크의 진짜 정체는 아마도 정치적 망명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본국에서도 그 정도의 신분일 테니 그 나라 권력자에 의해 범죄자 신분이 되어 버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부원들이 하는 소리잖아요. 근거가 없잖아요 근거가.”
“그럼 밀항자 정체가 뭔데? 너는 아니라는 근거가 있냐?”
“…….”
“이 새끼는 꼭 지는 뭐 아는 것처럼 말해요. 지도 아는 건 개뿔도 없으면서.”
“…….”
아놔.
진짜 답답하네. 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삼항사 너 그거 모르냐?”
“뭐요?”
“원래 밀항자들 중에는 범죄자들이 많거든.”
“…….”
“왜 대답을 안 해?”
“형이 봤어요? 어? 보기라도 했냐고요!”
“야! 아니면 아닌 거지 내가 너한테 한말도 아닌데 성질을 부리냐! 이 새끼가 오냐오냐하니까 이항사님한테!”
“…….”
이항사는 꼭 할 말 없어지면 랭크 가지고 사람들을 제압하려는 버릇이 있다.
뭐 항해사들 사이에는 그게 전부이긴 하지.
나같이 막나가는 놈들만 아니라면.
삼항사는 신나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옛날 선박에 실종사건들이 진짜 많았잖아. 왜 그런지 아냐?“
“뭔데요?”
“실종사고가 있으면 대부분 실족사로 보고되지만 실상은 그 중에 대부분은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이라는 소문이 뱃사람들 사이에는 있거든.”
“살인사건?”
“그래, 망망대해에서 몇 개월 동안 이 배에 갇혀 있으면 사람들이 제정신이겠냐? 지금이야 배도 좋아지고 했지만 옛날에는 말도 못하잖아.”
“그건 그렇죠.”
“미친놈이 배에서 사람 하나 밀어가지고 처리해버리는 건 사실 뭐 일도 아니잖아.”
“에이! 그래도 설마.”
“설마는 무슨 설마야. 솔직히. 요즘이야 통신장비도 발달하고 해서 선원들 간에도 폭행 사건이 없어졌지만 옛날은 완전 다르지.”
이항사의 말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이든 선원들은 아직도 종종 그런 괴담을 퍼트리곤 했다.
요즘이야 세상이 변한지 오래.
선박에서 선원들 사이에 폭행 사건이 벌어지거나 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옛날은 달랐다고 한다.
싸움도 잦고 선내에서 구타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그러면서 나이든 선원들은 꼭 충고를 덧붙였다.
선박에서는 싸우지 말고 잘 지내야 된다고.
안 그러면 혼자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일종의 도시전설 같은 그런 괴담이 종종 선박에선 퍼진다.
뭐 일종의 선박괴담? 그런 건가.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야, 아무튼 너도 조심해.”
“저요? 제가 뭘 조심해요.”
“뭐긴 뭐야 그 밀항자 말하는 거지.”
“…….”
“조셉 말대로 무슨 살인 사건이라도 저지르고 배에 들어온 거면 어쩌려고 그래?”
“…….”
“어제 보니까 밀항자 눈빛이 아주 살벌하더라.”
“…….”
“어휴.”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나는 뭐 내가 알아서 할게요.”
“조심해서 나쁜 건 없잖아.”
“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일 항사님 당직시간에 안 올라왔다고 선장님한테는 보고했어요?”
“아니, 선장님한테는 당연히 아직 보고 안했지.”
“네? 왜요? 빨리 보고 해야죠.”
“일항사가 곧 올 줄 알았지. 늦잠이라도 자다가 늦은 거면 또 선장님한테 된통 깨질 거 아니야.”
“늦으면 혼나야죠!”
“어제도 선장님한테 한 소리 듣고 완전 열 받았던데. 불쌍하잖아.”
“그래요?”
“응, 나 교대하러 올라왔을 때 너랑 밀항자 새끼 죽여 버리겠다고 아주 지랄발광 하던데.”
“…….”
이 선박의 어쌔신은 따로 있었네?
밀항자를 죽여 버리겠다고 발광했다고?
음. 설마 아니겠지?
진짜 그런 일이 발생한 건?
혹시 이 새끼 술에 취해서 밀항자한테 또 시비건거 아니야?
그랬다면 일항사가 술 취해서 압둘 무바라크한테 괜히 시비 걸었다가 쥐어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
‘밀항자한테 쳐 맞고 쪽팔려서 못 나오는 거 아니야?’
어디 구석에서 질질 짜고 있을지도.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