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일항사님.”
“그런데 듣기로는 삼항사는 비너스호가 초임으로 승선한 선박이라고 하던데?”
“네, 맞습니다. 저도 영국에서 후임 삼항사와 교대하기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래, 이런 좋은 분들과 같이 승선해서 참 좋았겠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선장님과 일항사님이 좋은 분이라서 다행이지. 만약 내가 일항사로 타고 있던 선박에 승선했으면 아마 정말 고생했을 거야.”
“네?”
“나는 배에서 겁 없이 사고치는 삼항사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거든.”
“…….”
“음, 대답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무슨 소문입니까?”
“비너스호의 삼등항해사가 겁대가리를 상실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이 새끼가!
‘내 명성이 올라간 게 얼만데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그런데 그런 헛소문을 어디서 들은 것인지 그 출처가 궁금하긴 했다.
“일항사님, 그런 소문이 있습니까?”
“그래 이배에 올라간다고 하니 말해주더군.”
“혹시 누구한테 들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흐흐흐. 그래, 뭐 정지형 일항사라고 아나? 내 동긴데.”
이런 썩을 놈들이!
정지형 일등항해사라면 중국 국적의 선사인 씨오라인(CO LINE)에서 일항사.
나와는 인도네시아 씨맨스클럽(Seaman's Club)에서 뱃사람들의 주먹다짐(?)을 할 뻔 했던 사내다.
아, 그리고 씨맨스클럽에서 나와 나의 친구들인 바다의 어벤져스 들에게 크게 한턱 골든벨을 울려주신 고마운 선배님이기도 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불꽃이 튀자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나섰다.
그도 씨맨스클럽에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김영 일등항해사가 나를 향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일등항해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하하하. 일항사님, 인수인계 하려고 바쁘실 텐데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시죠.”
“그래, 그러지.”
“삼항사도 할 일 많잖아. 나가서 일 보고.”
“네, 이항사님.”
나는 선장에게 인사를 건넨 후 선교를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놈이 배에 올라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곰곰이 새로 나타난 김영 일항사에 대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기 시작했다.
* * *
일등항해사 김영.
전생에서는 몇 차례 승선 근무를 같이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는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현생에서는 악연이 되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그나저나 정지형 그놈하고 김영 일항사가 같은 기수였구나.’
어쩌면 그때의 일 때문에 현생의 인연이 꼬여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해신해운을 살리기 위해서는 김영 일등항해사는 반드시 관리감독(?)이 필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등항해사 근무를 마치면 더 이상 선원으로 승선근무를 하지 않고 육상직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해신해운의 육상직원 전환 근무를 시작하게 된 그는 시간이 흘러 본사로 발령 받게 된다.
미래에 그는 해외 터미널을 개발하는 사업팀에서 근무하면서 해신해운이 스페인 알헤시라스에 터미널 운영법인을 설립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그는 주재원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된 알헤시라스에서 해신해운의 자회사인 현지 터미널 운영법인의 자금을 횡령하고 각종 배임죄를 저지르게 되는 인물.
그리고 나도 몇 년 후 육상근무로 전환해 본사로 들어가게 된다.
본사에서 김영이 전생과 같은 범죄를 저질러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때를 대비해서 김영 일등항해사와 관계를 전생과 다르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맥주병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일항사가 하선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선교로 향했다.
양화종 일항사가 인수인계를 마치고 하선하기 위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가 선교로 들어온 나를 발견했다.
나에게 다가와 주변을 한번 둘러보니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삼항사, 조심해야겠더라. 김영 일항사가 삼항사 가만히 안두겠다고 잔뜩 벼루고 있던데.”
“저를요? 왜요?”
“몰라. 그냥 마음에 안 든다네.”
“…….”
“싸가지도 없다고.”
“……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 그건 맞는 말이라고 했지.”
“…….”
“맞잖아 그건. 바다사나이가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지.”
“…….”
“흐흐흐. 농담이야. 삼항사, 뭐 이런 일로 정색까지?”
농담?
진짜 재미없거든요.
양화종 일등항해사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억울한 표정이 가관이라며 한참을 웃어댔다.
‘배 내린다고 하니까 신났네. 아주 신났어!’
양화종 일항사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씨맨스클럽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별일 없었어요. 말씀드린 게 답니다.”
“그게 전부라고?”
“네.”
“그런데, 김영 일항사는 왜 저러는 거야?”
“…….”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겁니다! 미치고 환장하겠네.
그나저나 생각할수록 진짜 웃긴 새끼네.
회사의 일을 하는데 어디서 개인감정을 끌어들여?
정지형이고 나발이고 자기 친구지 내 친구냐?
양화종 일항사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인수인계하면서도 트집 잡으려고 꼼꼼히 보더라.”
“네. 꼼꼼한 성격인가 보네요.”
“서류 작업 할 때 트집 잡히지 않게 잘해야 되겠던데? 당직 인수인계할 때도 그렇고.”
“네.”
“뭐, 장보고 삼항사는 워낙 잘하니까 걱정은 안하거든. 사실 이등항해사가 걱정이지. 하하하.”
“뭐,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면서요. 이등항해사한테 까지 그렇게 하기야 하겠습니까?”
“씨맨스 클럽에서 이항사도 같이 있었다면서?”
“아, 그건 그러네요.”
불쌍한 우리 호영이형.
좋은 사람인데. 나 때문에 고생하게 생겼네?
“아무튼 조심하고. 한국 들어오면 연락해. 술이나 한잔 크게 살게.”
“네, 들어가면 꼭 연락드릴게요.”
“그리고 필요한 서류 작업들은 어지간한 것들은 내가 하선하기 전에 미리 다 챙겨놨으니까 아마 트집 잡으려고 해도 큰 문제없을 거야. 미리 준비해놓길 잘했네.”
“오! 역시 엘리트 선원!”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전생에는 정말 싫은 사람이었는데.
지금 보니 일도 이렇게 잘하고 싹싹한 사람을 왜 그렇게 미워했나 싶다.
뭐, 내 얼굴이 좀 미안하네. 하하하…….
양화종 일항사가 손을 내밀었다. 우리는 세가 손을 마주잡았다.
“그럼, 나는 간다.”
“감사했습니다. 일항사님 많이 배웠습니다.”
“아니야. 이번 항차는 내가 오히려 삼항사한테 많이 배우기만 하다가 내리는 것 같네.”
“그럴 리가요. 허허허”
양화종 일항사가 배에 내려서 부두로 내려가자 사람들이 갑판에 나와 손을 흔들었다.
선원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반은 아쉬워하는 표정. 반은 부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몇 달을 함께 배를 타다 보면 좋은 순간만 있을 순 없었다.
육지에서는 회사에 마음에 안 드는 놈이 있어도 퇴근하거나 주말이면 안보는 시간이라도 있다.
하지만 선박은 어디 갈 데도 없는 것이 현실,
서로 싸우기도 하고 뒤에서 욕도 하지만 배를 같이 타는 동안에는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살 수 밖에 없는 곳이 선박이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같이 승선하던 선원이 먼저 떠나는 순간은 항상 아쉬움이 가득한 시간이기도 했다.
* * *
- 선박 “M.V. 비너스”의 선교
양화종 일등항해사가 내리고 비너스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항구를 향해서 나아갔다.
삼등항해사의 선교 당직근무는 8시부터 시작이지만 인수인계를 위해 보통 15분 전까지 선교로 올라가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나를 먹잇감으로 노리고 있는 김영 항해사의 트집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매번 당직시간 보다 30분 일찍 준비를 마치고 선교로 올라가고 패턴을 유지했다.
오늘도 인사를 하며 30분 일찍 선교로 들어섰다.
오늘도 기회를 놓친 김영 일등 항해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삼항사, 벌써 왔나?”
“네. 일항사님, 미리 미리 올라와서 인수인계를 준비해야죠.”
“그, 그래.”
아마도 내가 좀 늦게 올라오길 기대한 눈치.
하지만 나도 바닷물 좀 먹어본 사람.
김영 일항사의 속셈이 내 눈에 빤히 보였다.
‘내가 네놈 머리위에 있다 이놈아!’
김영 일항사는 힐끔 힐끔 나를 살펴보았다.
뭐라도 하나 걸리길 바라는 심정이 분명했다.
나는 철저하게 매뉴얼대로 당직근무를 위한 인수인계 업무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우선, 선교로 들어서며 빠르게 배의 전방과 좌우를 살폈다.
“이상무!”
과장된 액션을 취하며 괜히 크게 한번 소리쳤다.
그리고 레이더를 꼼꼼히 확인한다.
“주변에 주의할만한 것들은 없네요.”
마지막으로 종이해도와 전자해도를 비교해가며 꼼꼼히 변경된 점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이로 없음!”
“그, 그래…….”
일등항해사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그는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특이 사항이 없자 인수인계를 위한 서류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 일등항해사에게 다가갔다.
오늘은 별 다른 이슈가 없었기 때문에 인수인계는 짧게 진행될 것 같았다.
정식 인수인계 시간인 45분경이 되어가자 이희영 선장이 선교에 들어섰다.
최근 들어 선장님이 내 당직시간에 자주 선교로 올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일항사가 나를 괴롭히는지 확인하려고 올라오시는 건가?’
이희영 선장은 인수인계를 지켜보며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는지 의견을 묻고 확인했다.
인수인계를 마친 김영 일등항해사는 오늘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선교를 떠나갔다.
김영 일등항해사가 떠난 후에는 즐거운 커피타임.
이희영선장과 나는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양종화 일등항해사가 떠난 이후 대화상대가 부족하신 건가?
‘요즘 부쩍 수다가 늘었단 말이야.’
이희영 선장이 이렇게 수다스러운 사람인 줄 몰랐다.
커피타임을 가진 후에는 서류업무.
다행히 이번 당직 시간 동안 주변에 배가 많이 없고 안전한 구역이었던 터라 나는 서류 업무를 틈틈이 하며 당직근무를 이어갔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되었다.
“어이, 우리의 히어로 장보고!”
이등항해사 김호영이 선교로 들어섰다.
나는 이등항해사에게 인수인계를 마치고 눈리포트(Noon Report)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눈리포트는 매일 12:00시를 기준으로 선박의 이동거리, 평균 속도, 사용한 연료의 양 등을 기록하는 정기적인 보고서.
김영 일등하해사가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몰라 평소보다 공을 들여 세세하게 작성을 마쳤다.
일을 마친 나는 이항사에게 다가가 물었다.
“형, 인수인계할 때 일항사님 별말 없어요?”
“별말?”
“뭐 서류에 틀린 걸 지적하다거나 그런 거요.”
“없겠냐! 진짜 별거 아닌 것도 이래라 저래라 시비 걸더라고.”
“그래요? 흐흐흐.”
“왜?”
“아니 그냥 그럴 거 같아서요.”
“이 새끼가! 형님 무시 하냐?”
김호영 이항사는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야, 너 저 일항사 별명이 뭔 줄 아냐?”
“뭔데요?”
“맥주병이래.”
“맥주병? 무슨 뜻?”
"음, 그건 두 가지 설이 있던데. 김영 일항사가 수영을 못해서라는 말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일항사가 알코올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신다고 해서 맥주병이라는 말도 있고. 뭐, 본인 말로는 맥주를 주량이 없다고 자랑 삼아 떠들고 다닌다던데?”
“뭐, 뱃사람이 수영을 못한다고요?”
내가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질렀다.
키를 잡고 조타를 이어가던 조타수 조셉이 내 말을 듣고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움찔 거렸다.
허!
여기 또 있네. 뱃사람인데 수영을 못하는 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