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200)

“누, 누구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경이 대답했다.

“누구라니요! 당연히 저놈 아닙니까! 뇌물을 요구한 증거가 명백하지 않습니까?”

“…….”

“체포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거래관계라도 있는 겁니까!”

수에즈운하청장의 일갈에 정신을 차린 해경이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리고 미스터 퐁퐁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스터 퐁퐁의 양 팔을 구속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변명이라도 있는가?”

“…….”

수에즈운하청장의 말에 미스터 퐁퐁은 고개를 떨구었다.

“경찰서로 데려가십시오. 저도 바로 뒤따라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수에즈운하청장의 손짓에 해경이 미스터 퐁퐁을 체포한 채로 선교 밖으로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미스터 퐁퐁은 별다른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해경이 선교를 떠나자 수에즈운하청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큰 폐를 끼쳤습니다.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청장님 덕분에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이희영 선장이 대답했다.

그 말에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은 수에즈운하청장이 대답했다.

“수에즈운하청의 입장에서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보상조치가 있으시면 알려주십시오.”

보상?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수에즈운하의 VIP가 되었다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수에즈운하청장의 보상을 제안하다니?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분명했다. 이상한 점은 부정부패를 신고했다고 이런 호의를 베푼다는 점.

그나저나 안타깝네.

보상이라는 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희영 선장은 나와는 결이 다른 천생 뱃사람.

너무 점잖은 사람이라서 원하는 것을 선뜻 말할 성격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사건 마무리만 잘해주십시오.”

이희영 선장이 점잖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계속 사양하는 표시를 했다.

선장님!

저 사람은 수에즈운하청의 청장이라고요!

해운교통의 요지를 관장하는 사람이 바라는 걸 이야기하라고 하는 건데!

‘아이고 우리 선장님!’

도무지 협상이 안 되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대화에 개입하기로 결심했다.

‘음?’

내가 마음을 먹자 작은 메시지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 협상[Lv.1]을 사용합니다. +

갑자기 자신감이 배가 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청장님?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내 말에 수에즈운하청장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 삼등항해사님. 하하하. 그래 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수에즈운하에서 주요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혜택이 있지 않습니까?”

“……!”

내 말에 수에즈운하청장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허허허, 참 자네를 만나면 조심하라고 하더니.”

“네? 누가 그런 소리를? 저를 조심하다니요?”

“흥! 잘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가?”

“네?”

“능구렁이 열 마리가 뱃속에 들어있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억울하네.

하지만 그 말을 누가 한 건지는 알 것 같았다.

AP사의 사장이자 나의 든든한 인맥.

나민 아세르!

‘일단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줬으니 한번 봐줘야지.’

수에즈운하청장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자네 말은 해신해운에도 수에즈운하를 이용할 때 받을 수 있는 우대조건을 달라는 뜻인가?”

“네, 그렇습니다.”

“허허허. 그건 내가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네. 하지만 내가 이사진 회의에 상정해보겠네.”

“뭐, 해신해운 정도면 VIP 대우를 해줘도 되는 거 아닙니까?”

“자네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배가 일 년에 몇 척이나 되는지 아는가?”

“글쎄요……”

“곧 연간 2만 척 통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네.”

“많긴 많네요…….”

“해신해운이 큰 회사이긴 하지만 아시아와 미주 노선을 주력으로 하는 회사가 아닌가.”

“…….”

해신해운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조사를 하고 나타난 모양이네.

청장의 말대로 해신해운은 미주노선에서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인 것이 사실.

수에즈운하의 주요 고객사들인 유럽의 해운회사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물량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청장님이 힘써주시면 안될 일이 있겠습니까?”

“하하하. 알겠네. 자네도 최선을 다해주게.”

“네? 제가요?”

“그래, 자네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나.”

수에즈운하 청장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뭐야 혹시?

“음, 혹시 청장님 외국에서 공부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내 말에 수에즈운하청장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어떻게 알았나?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네.”

“…….”

역시 이 사람도?

‘이것들이 장난치나. 다 그 밥에 그 나물이었군!’

내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짓자 선교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청장과 나누는 대화의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둘러대기 시작했다.

“뭐, 악센트가 느껴졌습니다. 영국식 영어 악센트가 느껴져서 알아봤습니다. 하하하.”

역시 이번에도 나의 어색한 웃음만 선교에 울려 퍼졌다.

수에즈운하청장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크고 강한 손을 마주잡았다.

내 손을 강하게 쥐며 내 눈동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

나를 향한 강한 신뢰를 느낄 수 있었다.

< 띠링! >

+

<메인 퀘스트(#05)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은 수에즈운하의 글로벌 호구 신세를 탈출했습니다!”

보상 :

- 당신의 명성이 상승합니다.(명성 + 20)

- 이희영 선장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 글로벌 인맥(이집트)이 형성되었습니다.

- 당신에 대한 해신해운 본사의 평가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습니다.

- 기술 [고소고발 Lv.1]을 획득했습니다.

- 기술 [협상 Lv.2]의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해신해운이 수에즈운하의 우대권을 획득했습니다.

+

* * *

- 지중해 어딘가

비너스호는 수에즈운하를 무사히 통과해 지중해로 들어섰다.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지중해로 나오는 컨테이너선들은 이집트항구인 포트세이드를 들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해신해운이 운항하는 비너스호의 노선은 지중해의 포트를 기항하지 않고 바로 유럽의 허브 항을 향해서 운항하는 노선.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스페인의 알헤시라스 항구이다.

‘알헤시라스…….”

나는 알헤시라스 항구를 바라보며 전생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알헤시라스는 해시해운 직원들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었기 때문.

알헤시라스(Algeciras).

스페인 남부 히브랄타르(지브롤터)만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

이곳은 유럽에서 가장 환적 화물이 많은 항구도수 중 한 곳이다.

알헤시라스 항구는 해신해운 사람들에게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했다.

해신해운이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전략적으로 유럽의 거점 허브항구로 육성하는 곳이었기 때문.

하지만 해신해운 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한 사업의 성과를 끝내 보지 못하고 사업을 접고야 만다.

해신해운이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며 심혈을 기울이는 사업이었지만 가까운 미래에 다가오는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결국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신해운은 결국 알헤시라스 항구를 운영하는 터미널회사의 지분을 경쟁회사에 염가에 매각할 수밖에 없는 신세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소식이 본사로 전해서 회사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해신해운의 자회사인 알헤시라스 현지 법인에서 일어난 대규모 횡령, 배임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횡령의 중심에는 해신해운 본사에서 파견한 주재원이 있었다.

해신해운 임직원이 알헤시라스 현지 법인의 자금 횡령 사건에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정말 도둑놈들이 한둘이 아니구나. 큰일이다 큰일.’

곳곳에 숨어서 해신해운의 돈을 해쳐먹은 도둑들을 떠올려 보았다.

많기도 참 많았다.

선박유를 빼돌리는 선원들, 자회사의 자금을 횡령하는 주재원들까지.

‘아! 수에즈운하의 도선사들 같이 회사 외부에서 우리 돈을 뜯어가는 놈들도 있었지.’

오히려 이런 와중에 글로벌 선사로 크게 성장해온 해신해운의 저력(?)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알헤시라스항구가 다가올수록 착잡한 기분이 커져갔다.

알헤시라스 현지 법인에서 자금을 횡령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전생에서 횡령범의 정체가 밝혀지자 나는 까무러칠 듯 놀랠 수밖에 없었다.

그 횡령범의 정체는 나도 잘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내가 초임 항해사로 승선한 선박의 일등항해사.

이번에 기항하는 알헤시라스 항구에서 양화종 일등항해사와 교대가 예정되어 있는 인물,

그 일등항해사가 바로 그 미래의 횡령범이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갑판.

알헤시라스로 향하는 바다를 둘러보며 나는 갑판으로 나갔다.

갑판에서 한창 청소중인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

카타르 3왕자의 최측근이자 우수한 경제관료, 세계 굴지의 정유회사인 AP사 CEO의 죽마고우인 사내.

‘그런 대단한 사람이 우리 배 갑판을 청소를 하고 있다니?’

압둘 무바라크가 갑판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나에게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이 사람의 정체는 나만 알고 있는 것이지만.

살다보니 참 별일이 다 있다.

하지만 그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밀항자 신분인 압둘 무바라크는 정체가 탄로 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지내면서 갑판부원들과 무리 없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갑판부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천천히 압둘 무바라크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내가 근처로 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청소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갑판의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넸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에게 작은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나민 아세르를 통해서 연락했던 분의 도움이 컸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그분도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고 하시더군요.”

“하하하.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까?”

“오랜만에 친구 분을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뭐 제 신세가 이렇다 보니…….”

압둘 무바라크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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