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200)

“도선사님,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뭐요?”

“도선사 없이 배를 움직인 증거 말입니다.”

“무슨 헛소립니까! 저렇게 촬영한 동영상이 있는데도 발뺌하는 겁니까!”

“저건 배가 움직였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

“도선사가 이 배에 없다는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도선하고 있던 내가 배에서 내렸는데 무슨 소립니까! 그럼 어디 다른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때였다.

드르륵!

선교 뒤편에 마련된 통신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는 몹시 화가 난 표정이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선교의 뒤편 통신실에서 걸어 나온 사내가 우리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이미 인사를 나눈 상태라 그의 정체를 알고 있었지만 미스터 퐁퐁과 그의 일행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손님의 등장이었다.

“어, 어······!”

모습을 드러낸 사내의 정체를 알아본 미스터 퐁퐁이 당황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미스터 퐁퐁의 얼굴이 삽식 간에 굳어져갔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미스터 퐁퐁은 도무지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상황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통신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미스터 퐁퐁과 그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처, 청장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미스터 퐁퐁이 용기를 짜내 물었다.

이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수에즈운하청(SCA)의 청장 오사마 라덴.

내 정보원(?)인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와 나민 아세르의 지인을 통해 추천 받은 인물로 나름 공명정대하게 일을 추진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도 수에즈운하청장의 청장 쯤 되는 거물이 직접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줄은 나도 몰랐다.

이 배의 밀항자 신분인 압둘 무바라크의 인맥이 새삼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사실 수에즈운하청장이 이곳에 직접 나선 이유가 있었다.

나민 아세르의 인맥이 동원된 탓도 있었지만 오사마 라덴이 수에즈운하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짐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수에즈운하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다짐한 것.

수에즈운하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말소하고 자신의 임기 내에 반드시 ‘말보로 운하’라고 불리는 수에즈운하의 오명을 벗고야 말겠다는 것. 그것이 그의 목표였다.

하지만 아무리 조직의 수장이 노력한다고 해도 현장 일선에서 벌어지는 부정부패를 모두 감시할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외국 선박들과의 사이에서 암암리에 벌어지는 일들을 수에즈운하청장이 사전에 차단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비리를 신고한다고 하여도 그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정보가 차단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그의 최측근을 통해 바로 정보를 전달했던것.

결국 수에즈운하청장이 직접 나서 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던 것이다.

수에즈운하청장이 미스터 퐁퐁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운하청장의 싸늘한 말에 미스터 퐁퐁이 땀을 삐질 흘리려 대답하기 시작했다.

“해, 해경이 출동한 것은 이 배가 도선사가 없이 강제도선구역인 수에즈운하 안에서 운항한다는 신고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해경과 같이 이 배에 승선한 것입니다.”

“음, 그래요?”

“네, 청장님. 수에즈운하에서 도선사 없이 배를 운항하는 것은 법을 위반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배에 왜 도선사가 없는 겁니까?”

”네?“

“이배에 배정된 도선사가 누구였습니까!”

수에즈운하청장이 미스터 퐁퐁에게 질문을 이어갔다.

“어떻게 수에즈 운하에 들어온 선박에 배정된 도선사가 없을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그, 그건......”

"아직 수에즈운하를 빠져나가지도 못했는데 도선이 종료되는 지점도 아닌데 도선사가 배에서 내렸단 말입니까!“

운하청장이 서릿발 같은 노호성을 터트렸다.

미스터 퐁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스스로 하선했다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미스터 퐁퐁은 억울하다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청장님, 제가 불가피하게 이배에서 잠시 하선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선박이 도선사 없이 운항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 아닙니까?”

‘하 이 새끼 봐라.’

미스터 퐁퐁이 물귀신 작전이라도 펼치려는 듯 포기하지 않고 우리 선박을 계속 걸고 넘어지고 있었다.

“흥! 이배에 도선사가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요?”

수에즈 운하청장이 대답하자 그의 뒤로 또 다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수에즈운하 도선사 협회의 회장이었다.

미스터 퐁퐁은 연이어 등장한 거물들의 모습에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렸다.

수에즈운하청장이 미스터 퐁퐁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도선사의 도선 아래 이 선박이 운항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

답변이 궁색해진 미스터 퐁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제, 자네가 왜 아무런 보고도 없이 이 배에서 하선했는지 말해보게.”

싸늘한 표정의 수에즈운하청장이 말했다.

“그, 그건......”

당황한 미스터 퐁퐁.

‘음, 새끼 진작에 잘하지.’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미스터 퐁퐁을 보니 약간 안타까운 기분도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제대로 미래를 위해서라도 제대로 정신교육이 필요한 놈이었다.

뭐, 어쩔 수 없네?

긴장한 미스터 퐁퐁이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내가 대신 나서주는 수밖에.

“청장님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자 선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음, 자네는?”

새파랗게 젊은 내가 나서자 수에즈운하청장이 물었다.

“저는 이 배의 삼등항해사입니다.”

“아, 자네가 그······.”

수에즈운하청장이 말을 아꼈지만 그가 내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선장과 일등항해사를 비롯한 선교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크! 취한다. 이 미친 인맥!’

연이은 미션 성공으로 글로벌 인맥을 쌓아온 결과가 이곳 수에즈운하에서 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 그럼 한번 말해보게.”

“네, 청장님.”

내가 고개를 돌려 조셉을 바라보자 조셉이 달려가서 준비해 두었던 주방용 세제를 들고 나왔다.

바로 ‘퐁퐁’ 이었다.

“청장님, 혹시 이게 뭔지 아십니까?”

나는 주방세제를 수에즈운항청장에게 건넸다.

“음? 이게 뭔가?”

그는 퐁퐁을 바라보며 물었다. 한글로 적혀 있었기 때문에 그도 정확히 용도를 파악하지 못한 것.

“그건 주방용 세재입니다. 그럼 이게 뭔지 아십니까?”

이번에 내가 그에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말보로 담배 1보루.

담배를 바라보는 수에즈운하청장은 화가 난 듯 얼굴을 잔뜩 구겼다.

수에즈운하청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삼항사님, 우리 수에즈운하를 모욕하는 겁니까?”

그는 내가 그에게 말보로 담배를 건넨 것을 말보로 운하라고 불리는 수에즈운하를 조롱한 행동으로 생각한 것이다.

“청장님,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

“조셉 전부 가지고 나와!”

조셉은 평소 수에즈운하를 지나다닐 때 도선사들에게 건네주었던 물품 꾸러미를 잔뜩 들고 나왔다.

식기세제부터, 담배, 양주, 휴지, 라면 등 부식 등 갖가지 물품들이 큰 비닐백에 담겨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수에즈운하청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수에즈운하를 지나갈 때 이런 것들을 요구하는 도선사들이 있습니다.”

“으으음.”

“만약, 선박의 항해사들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온갖 트집을 잡아 선박의 운항을 방해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

나는 고개를 돌려 수에즈운하청장 옆에서 창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선사협회장을 바라보았다.

"저기 도선사 옆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내가 미스터 퐁퐁 옆에 있는 짐꾼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선박에서 받은 물품들을 나르기 위해서 도선사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짐꾼들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수에즈운하청장이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천천히 좌우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인지하고 있던 일이었다.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소문을 들어 대강 눈치를 채고 있긴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현실을 마주하니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로 부정부패를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에즈운하청장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오늘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오늘 이 선박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으으음!”

수에즈운항청장이 참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미스터 퐁퐁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미스터 퐁퐁을 향하자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나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청장님! 협회장님! 저 사람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뭐가 거짓말이라는 건가?”

수에즈운하청장의 싸늘한 표정에 미스터 퐁퐁도 살짝 당황한 기색.

하지만 이정도로 물러서면 미스터 퐁퐁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었다.

“제가 뇌물을 요구하다니요? 말도안되는 소립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

참, 한결 같네.

이런 도둑놈들이 하는 변명은 이상할 만큼 비슷했다.

‘물적 증거를 대보라고 하겠지.’

미스터 퐁퐁이 소리쳤다.

“증거를 대보라고 하십시오. 아무런 증거도 없질 않습니까? 저자는 계속 저를 모함하려고 한 자입니다! 저런 외국인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네. 참신함이라고는 없는 새끼.

선교 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조셉!”

내가 외치자 조셉이 달려와 나에게 카메라를 건넸다.

“……!”

미스터 퐁퐁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청장님, 물론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

나는 카메라 전원을 켜서 수에즈운하청장에게 영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동영상 속에는 ‘퐁퐁’을 노골적으로 요구했던 도선사의 모습과 목소리가 촬영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내가 미스터 퐁퐁의 함정에 넘어가 촬영이 금지된 수에즈운하를 촬영했더라면 그는 그 사진을 트집잡아 나를 협박했을 것이 분명했다.

‘계획이 성공했다면 아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진 않았겠지.“

선교에 돌아와 미스터 퐁퐁이 행패를 부릴 것을 예상한 나는 조셉에게 숨어서 동영상을 촬영해둘 것을 지시했던 것이다.

영상을 확인하는 수에즈운하청장과 도선사협회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음, 큰일이군요. 협회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수에즈운하청장의 질책에도 도선사협회장은 별다른 변명을 하지 못했다.

수에즈운항청장이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이런 동영상 까지 촬영되어 있으니 이 일을 내부적으로 덮고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선사 옆에 있는 해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체포하십시오!”

수에즈운하청장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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