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200)

그리고 지금 보니 미스터 퐁퐁이 여간 잔머리를 굴린 게 아니었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제법 꾀를 부린 후 하선했던 것.

비너스호가 정선하고 있는 위치가 아주 절묘했다.

완전히 운하의 교통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교통을 교묘하게 방해하는 위치.

‘괜히 도선사가 아니네?’

수에즈 운하의 지리 지형을 꿰뚫고 있는 도선사다운 실력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일에 그렇게 열심히?’

왜 최선을 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다른 선박들이 우리를 추월해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무리하면 비너스호를 피해서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 운하 내에서 그렇게 무리하게 운항할 선박은 없었다.

아마도 비너스호 뒤에서 거리를 두고 기다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비너스호가 수에즈 운하의 교통을 방해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

잘못하다가는 다른 선박들로부터 원망과 컴플레인을 들을지도 모르는 상황.

이희영 선장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계획이 있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려 주고는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작정 계속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

“선장님,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죠. 아직 준비가 덜 됐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그 말에 사람들의 불안감이 더욱 커져 갔다.

그때였다.

선교로 뛰어 들어오는 사내.

“써(Sir)!"

조셉이었다. 그는 나를 부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준비가 끝났다는 뜻.

'왔구나.‘

그럼 필요한 배우들은 다 모인 거네?

호구 탈출 미션을 시작해 볼까?

내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 *

쌍안경을 들고 비너스호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는 사내가 있었다.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는 다름 아닌 미스터 퐁퐁.

그는 도선선에 내린 후 비너스호의 모습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아 올라간 상태였다.

쌍안경을 들어 비너스호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것들이 감히 나를 엿 먹이다니!”

분이 풀리지 않은 미스터 퐁퐁은 연신 입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도선사가 된 이후 이런 모욕은 처음 당하는 경험.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나를 이렇게 대한 것은 이놈들이 처음이다.’

마치 처음 모욕을 당한 드라마 속 재벌가의 장남처럼 그도 몰려오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평소 호구로 생각하던 해신해운 선박의 항해사들에게 이런 취급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난 상태.

‘이놈들 어디 한번 배만 움직여봐라. 가만히 두지 않겠다.’

미스터 퐁퐁은 선배 도선사로부터 전수받은 자신의 비기를 선보일 생각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선박을 교육시킬 때 쓰라고 자신에게 선배 도선사가 알려준 방법.

그는 비너스호가 도선사가 승선하지 않은 채로 움직이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에즈 운하는 도선사가 반드시 탑승한 상태에서만 운항할 수 있는 구간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선을 하고 있던 자신이 하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너스호에는 승선한 도선사가 없었다.

흥분한 미스터 퐁퐁 옆으로 짐꾼이 다가왔다.

“그래, 연락했나?”

“네, 코스트 가드(해경)에게 말해뒀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바로 출동 준비를 하겠다고 합니다. 근처에 도착하면 연락을 주겠답니다. 준비하고 있을 테니 연락하면 바로 달려오겠다네요.”

“그래, 흐흐흐. 해신해운 놈들 그때도 큰소리칠 수 있는지 한번 보자.”

미스터 퐁퐁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도선사님! 저, 저기! 움직입니다.”

깜짝 놀란 짐꾼이 손을 들어 올려 비너스호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너스호가 살짝 방향을 틀어 가장자리로 배의 위치를 옮기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카, 카메라!”

“네?”

“빨리! 저거 빨리 촬영해둬!”

“네? 네!”

짐꾼이 큰 소리로 대답하더니 허겁지겁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비너스호가 움직이는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딱 걸렸다. 이놈들!”

그는 옆에 있는 짐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경에게 연락해라!”

“바로 오라고 할까요?”

“그래, 현행범을 잡았다고. 크크크.”

완벽한 증거를 확보한 미스터 퐁퐁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스타보드(우현) 5도!”

이희영 선장이 긴장한 표정으로 외치자 조타수 조셉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같이 흘렀다.

조타수 조셉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이자 비너스호는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면서 운하의 우측으로 살짝 이동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정선해 있던 비너스호가 운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움직인 거리도 채 몇십 미터에 불과했다.

움직인 거리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교통 신호를 위반하는 사람들을 단속하기 위해 사각지대에 숨어서 단속하던 경찰차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처럼 갑자기 수에즈 운하에 큰 경적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이잉잉!”

그들은 마치 우리가 움직일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빠르게 나타난 것이다.

“위이이잉잉!”

선미 쪽에서 큰 경적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선교 밖으로 나가 선미 쪽을 확인하고 있던 이항사가 들어오면 외쳤다.

“선장님, 해경입니다!”

“음!”

선미 쪽으로 경적음 소리를 내며 작은 배 한 척이 빠르게 비너스호를 따라붙기 시작했다.

“정선하라! 비너스호는 그 자리에 당장 정선하라!”

비너스호 선교 내의 무전 교신기에서도 정선하라는 교신이 울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표정의 이등 항해사가 이희영 선장을 보며 물었다.

“선장님, 어떻게 할까요?”

“별다른 방법이 있나? 정선해야지.”

이희영 선장이 조셉을 보며 외쳤다.

“스탑 엔진!”

“스탑 엔진, 써(Sir)!”

조셉이 선장의 말을 크게 복창했다.

비너스호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로 갑판장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뛰어 들어왔다.

“선장님, 본선으로 해경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래. 선교로 바로 모시도록.”

“네, 선장님.”

선교에 있는 선원들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서리기 시작했다.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비너스호의 선교로 유독 과장스러운 제스처를 취하면서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고! 해신해운의 베테랑 선원들께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선교로 들어선 이는 미스터 퐁퐁이었다.

미스터 퐁퐁이 해경선을 타고 나타난 것이다.

얼마나 급했던 것인지 그는 해경들보다 한발 앞서 선교로 들이닥쳤다.

“도선사님?”

이희영 선장이 미스터 퐁퐁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장님! 경력도 많으신 분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네? 무슨 소립니까?”

이희영 선장이 미스터 퐁퐁의 말을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 제법 연기 좋고!“

나는 이희영 선장의 표정 연기를 바라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이희영 선장은 미스터 퐁퐁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고 있는데 연기가 제법 일품이었던 것.

“흠, 선장님 수에즈 운하는 강제 도선 구역이 아닙니까?”

“아, 네. 그건 그렇지요.”

“도선사인 제가 이 배에서 하선했는데 배를 움직이면 안 되지요.”

“…….”

이희영 선장이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자 미스터 퐁퐁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듯 피치를 올려 갔다.

“이집트의 실정법을 위반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외국 선박이라도 예외는 없지요.”

“…….”

“선장님. 도대체 이거 어쩌려고 이러셨습니까!”

“…….”

“저, 애송이 같은 삼항사 말을 들으시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닙니까!”

미스터 퐁퐁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점령군이 된 거만한 표정으로 선교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흥!”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비릿한 코웃음을 흘렸다.

‘이 새끼가!’

내가 나서야겠다.

“도선사님! 증거가 있습니까?”

참지 못한 내가 소리치며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삼항사! 뭐요?”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가 도선사 없이 배를 움직였다는 증거 말입니다.”

“증거? 이거 오냐오냐하니까 이 사람이! 크크크. 증거? 증거?”

미스터 퐁퐁이 미친놈처럼 실소를 흘려댔다.

“아, 그래 이 배의 삼등 항해사가 계셨지요.”

그는 나에게로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증거를 좋아하는 삼등 항해사님!”

그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방금 촬영한 디지털카메라가 들려있었다.

“여기 다 있습니다!”

미스터 퐁퐁이 카메라를 옆에 있는 해경에게 건넸다.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이게 뭡니까?”

“방금 촬영한 영상과 사진입니다. 비너스호가 이동한 사실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경이 카메라를 건네받아 액정 화면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음! 도선사님 말이 맞군요! 배를 움직인 장면이 잘 촬영되어 있습니다. 증거가 명백하군요! 하하하.”

동영상을 확인한 해경이 말했다. 그가 일등 항해사에게 영상을 보여주자 일등 항해사도 고개를 천천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랄하네. 미리 시나리오를 다 짜고 같이 올라온 놈들이 어색하게 뭐 하는 짓이냐 저게.’

나는 한통속인 두 놈이 열연을 펼치는 것을 바라보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미 우리를 털어먹기로 결심한 도선사와 한통속인 해경을 바라보니 참으로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뇌물을 받아 처먹을 생각에 눈이 벌게져 있는 모습.

이번에는 퐁퐁이나 담배 같은 것들로는 부족할지 몰랐다.

해경까지 출동한 이상 실제로 미국 달러라도 쥐여줘야 이놈들이 만족할 것이 분명했다.

승리감에 도취된 미스터 퐁퐁이 큰 소리로 말했다.

“뭐, 더 할 말 있습니까?”

“…….”

“증거를 보여 달라고 하질 않았습니까? 삼항사님!”

미스터 퐁퐁이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투우 경기를 하는 소처럼 이마로 내 이마를 밀어버릴 기세.

‘이 새끼가 진짜 선 넘네!’

참아야 한다.

이놈이 이런다고 내가 밀쳐내기라도 하면 폭행당했다고 하면서 바닥에 드러누워 꾀병을 부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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