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200)

선원들은 매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큰돈을 뇌물로 요구 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직접적으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담스러운지 이들은 주로 선박에 있는 물품을 요구했던 것이다.

선박에 있는 음료수나 과자 같은 부식이나, 담배, 세재 같은 생활용품 등을 달라고 하니 이를 경찰에 신고하기도 애매한 노릇이었다.

물론 모든 도선사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역시 일부의 도선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

미스터 퐁퐁은 그런 악덕 도선사들의 정점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도선을 하러 승선하면 일에 집중하지 않고 틈만 나면 노골적으로 선원들에게 “퐁퐁”을 외쳤다.

‘퐁퐁’은 바로 그 식기세제인 ‘퐁퐁’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선원들은 그에게 ‘미스터 퐁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물론 퐁퐁만 받아간 것은 아니다.

겨우 퐁퐁만 받아가려고 짐꾼을 대동하고 선박으로 올라온 것이 아닐터.

처음에는 이들의 요구를 가볍게 생각했다고 한다.

한국 선원들이 인심 좋게 나눠주던 것이 이들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만들고 말았다는 말도 있었다.

점차 배에 요구하는 것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선원들이 이들의 요구를 받아 준 것은 아니었다.

미스터 퐁퐁의 요구를 거절하고 뇌물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용기 있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전생에 이항사로 승선했던 선박의 선장님이 바로 그 사람이다.

강단 있고 용기 있는 뱃사람의 표본!

주로 중국과 남미 사이의 철광석 벌크선을 탑승했기 때문에 수에즈 운하 도선사들의 횡포를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선장이 미스터 퐁퐁의 요구를 거절하자 화가 잔뜩 난 미스터 퐁퐁은 다른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수에즈 운하 한가운데서 도선을 거부하고 배를 정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미스터 퐁퐁은 수에즈 운하 한 가운데에 배를 세워버리고 홀연히 배를 떠나버렸다.

수에즈 운하는 강제도선구역이기 때문에 도선사가 없는 상태에서 운항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선사가 하선해버리자 금방 운하의 교통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당황한 선장이 본선의 안전을 위해서 임의로 도선사가 없는 상태로 선박을 살짝 운하의 가장자리로 운항했다.

물론 이것은 미스터 퐁퐁의 함정이었다.

이를 몰래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미스터 퐁퐁은 이를 촬영해 이집트 당국에 도선법 위반으로 선장을 신고했다.

그리고 우리 배는 출동한 해경의 조사를 마치고 벌금을 가납(임시로 미리 납부하는 것)한 후에야 운항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미스터 퐁퐁의 악명이 더욱 높아졌다.

그 이후로 수에즈 운하에서는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 갑판

갑판에는 갑판부원들이 보수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 뒤로 한 사내가 큰 빗자루를 들고 따라다니며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저런 일할 사람이 아닌데 고생하네.’

나는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왕정 국가의 후계를 다투는 왕자의 최측근으로 경제 관료였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빗자루를 들고 비너스호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물론 나만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는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그도 가만히 선실에 있는 것은 지겨웠던 모양이다.

압둘 무바라크는 여전히 영어를 못 알아듣는 척 행동 했지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갑판부원들과 함께 제법 잘 어울려 지내며 생활하고 있었다.

갑판부원들을 따라다니며 청소를 하거나 잡일을 돕고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해맑았다.

‘스트레스가 심했겠지. 오히려 지금이 마음이 편할지 모르겠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치열하게 벌어지는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인물이다.

결국 생명의 위협을 느껴 국외로 도망치고 그것도 모자라 이렇게 배를 타고 밀항하는 신분.

지난 몇 주간 그는 언제 목숨을 잃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 보였다.

‘저 양반 저렇게 맘 놓고 친하게 지내다가 전생에 선원들한테 정체를 들킨 거 아니야?’

나는 그가 전생에는 결국 선원들에게 정체가 탄로 났던 것을 떠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갑판장님, 잠시 밀항자 좀 데리고 가도 되겠습니까?”

“네 삼항사님, 뭐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아, 그런 건 아니고 배나 한 바퀴 돌아보면서 대화나 좀 시도 해볼까 해서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니 눈치가 빠르고 똑똑해 보이는 친굽니다. 영어도 알아듣는 것 같은데 말을 통 안하니 참 답답하네요.허허허.”

갑판장은 내가 시간이 날 때마다 한 번씩 밀항자와 산책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른바 굿캅, 배드캅(Good cop, bad cop)전략에 따라 굿캅 역할을 수행하기로 한 내가 그와 종종 산책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서 멀어지자 나는 조용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압둘 무바라크는 싱긋 웃어 보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다행이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네,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민 아세르에게는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영국에서의 일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자기가 최대한 준비를 해두겠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삼항사님.”

“하하하. 진심이신가요?”

“네?”

“진심으로 말씀하신 거라면 제가 한 가지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별 일은 아닙니다. 그저 사람만 좀 소개해주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을?”

“네, 정계에 계셨으니 인접 국가들에도 인맥이 좀 있으시지요? 혹시 이집트 관료 중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지금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민 아세르를 통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떠오르는 사람이 한명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는 눈빛을 빛내며 그에게 작은 소리로 귓속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 * *

- 수에즈 운하

수에즈 운하를 앞두고 멀리서 도선선이 다가오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다가오는 도선선을 바라보면서 미스터 퐁퐁을 떠올렸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스터 퐁퐁을 처음 만난 것이 이번 항차였기 때문이다.

‘꼭 그가 왔으면 좋겠는데.’

미스터 퐁퐁이 승선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특히, 지금은 전생과 달리 미스터 퐁퐁이 도선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시점.

아직 미스터 퐁퐁이 제대로 흑화(?)가 진행된 상태가 아니라는 뜻.

‘이번이 아니면 이놈을 갱생시킬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미스터 퐁퐁을 갱생하려는 건 내 순수한 복수심(?)의 발로는 아니었다.

나에게는 나름 숭고한 목적도 있다.

‘교육이 필요해.’

미스터 퐁퐁이 훗날 저지르게 되는 대형 사건을 예방하려면 이번 기회에 그를 참 교육할 필요가 있었다.

도선선이 배 근처로 다가왔다. 사다리와 계단을 이용해 승선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기다리던 사내.

내 기억대로 이번에 승선하는 도선사는 바로 그 미스터 퐁퐁이다.

나의 기억보다는 30년은 젊어 보이는 얼굴.

앳된 얼굴이지만 탐욕스러운 볼살이 여전히 그의 얼굴 양 옆에서 덜렁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뒤졌다. 너는.

나는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와 같은 표정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 선교

미스터 퐁퐁은 넉살 좋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눈 후 도선을 시작했다.

운하에 들어서는 순간까지는 조심해서 선박을 조타해야 되기 때문에 미스터 퐁퐁도 긴장하는 순간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비너스호는 수에즈 운하에 들어섰다. 이제 조심히 운항해서 운하를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시간.

슬슬 미스터 퐁퐁이 본색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다소 한가한 시간이 돌아와도 미스텅 퐁퐁이 선교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앳된 얼굴의 나를 발견하더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번 항차를 끝으로 배에서 내린다고 하시던데요?”

“네, 맞습니다. 영국에서 교대하고 내릴 계획입니다.”

“오! 좋으시겠습니다.”

“네, 허허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수에즈 운하 설명 좀 드리겠습니다.”

“네?”

미스터 퐁퐁이 내 손을 잡고 선교 밖으로 나를 잡아 끌었다.

‘이놈 봐라.’

“수에즈 운하를 처음에 만든 놈들은 영국과 프랑스 놈들이죠. 그래도 그때와는 많이 변했답니다. 확장공사도 여러번 하고…….”

미스터 퐁퐁은 선교 뒤편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친절한 표정으로 수에즈 운하의 곳곳을 가리키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 삼항사님. 이번이 마지막인데 이럴 때가 아닙니다.”

“네?”

“기념으로 사진 좀 찍어서 내리면 친구나 가족들에게 보여주면 좋지 않을까요?”

“음, 사진……?”

미스터 퐁퐁은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에게 독촉하기 시작했다.

“네, 자자! 카메라! 카메라! 저쪽으로 찍는 게 좋겠군요.”

내가 주저하자 그는 나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어디서 배운 것인지 한국말까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바지 주머니에 들어있는 업무용 디지털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미스터 퐁퐁이 알려주는 방향으로 배경 사진 몇 장과 셀카 몇 장을 찍기 시작했다.

내가 사진 찍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스터 퐁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시죠.”

미스터 퐁퐁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는 뒷짐을 지더니 앞장서서 선교로 앞장서서 들어섰다.

“삼항사!”

내가 미스터 퐁퐁의 뒤를 따라 선교에 들어서자 일등항해사 양화종이 나를 불렀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네, 일항사님.”

“도선사 말이 사실인가?”

“네? 뭐가요?”

“카메라로 군사시설을 촬영한게 사실이야?”

“군사시설요?”

“도선사 말로는 수에즈 운하는 군사시설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알려줬는데도 자네가 막무가네로 군사시설이 보이는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하는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린지.”

나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카메라는 뭔가?”

“…….”

양화종 일항사는 내 손에 들려 있는 디지털카메라를 가리켰다.

“도선사 말로는 자기가 찍지 말라고 했다는데?”

“…….”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미스터 퐁퐁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빠르게 내 손에 들려 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낚아챘다.

호구 탈출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내 카메라를 낚아챈 미스터 퐁퐁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풉!”

그는 나를 향해 썩은 미소를 한번 날리더니 카메라를 들고 양화종 일등항해사와 이희영 선장에게로 다가섰다.

이 자식이 초임 항해사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초임 때부터 교육(?)을 잘 시켜 호구를 잡으려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일등항해사 앞에서 자신감 있게 디지털 카메라의 전원을 키는 미스터 퐁퐁.

일항사 양화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그는 사진을 몇번이나 확인하더니 말했다.

“음? 수에즈 운하관련해서는 아무런 사진도 없는데요?”

일항사 양화종의 말에 사람들의 모두 시선을 미스터 퐁퐁에게로 옮겼다.

“뭐, 뭐야!”

당황한 표정의 미스터 퐁퐁.

카메라를 받아 들고 급하게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사진을 열심히 뒤져보았지만 원하는 사진을 찾지 못하는 듯 보였다.

“왓 더 xxxx(What the hxxx?)"

욕설까지?

‘새끼! 많이 당황했구나?’

미스터 퐁퐁은 머리를 처박고 카메라의 사진첩을 열심히 뒤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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