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00)

그 말은 전생과 달리 이 배로 승선하게 된 이유가 있다는 뜻.

전생과 다른 방향으로 사건이 움직이게 된 계기 있을 것이다.

“나를 알고 있습니까?”

내가 물어보았다.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는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정면을 응시해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를 살피는 모습에서 그의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초조하겠지.‘

이자는 전생에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사실을 몰라도 자신이 생사의 기로에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진중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이 선박의 삼등항해사가 맞습니까?”

나의 신분을 계속 확인하려고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전생과 달리 이 배를 탑승한 이유. 그것은 내가 이 배의 항해사이기 때문이 분명했다.

“맞습니다. 제가 삼등항해사 장보고입니다. 저를 아십니까?”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가 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친구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친구? 무슨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배에 타게 되면 아마 삼등항해사가 찾아올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당신이라면 찾아온 힘들게 찾아온 손님을 내치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

손님?

밀항자가 이 선박을 찾아온 손님이라고?

내가 힘들게 찾아온 손님을 내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이곳으로 보낸 이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밀항자가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알아차린 표장.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말한 대로입니다. 제 이름은 압둘 무바라크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예상은 했지만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말항자의 정체를 숨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를 본국인 카타르로 송환할 수도 없는 일.

만약, 전생처럼 10년 후에 3왕자가 왕권을 잡는다면 해신해운에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전생과 달리 이 압둘 무바라크를 우리 선박으로 보낸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는 나와도 인연이 있는 인물.

나는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배를 탄 이유가 있습니까?”

"원래는 다른 배에 승선할 계획이었습니다. 밀항하기로 한 날 갑자기 계획이 변경되었다고 하더니 이 배로 들어가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이자를 나에게 보낸 인물의 정체.

예정에도 없던 미팅에 참석해서 나를 시험한 인물.

나를 테스트하고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었던 사내.

바로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가 분명했다.

나는 압둘 무바라크에게 물었다.

“음, 그럼 이배에 승선하라고 말한 사람은 AP사의 사장 나민 아세르가 분명하군요.”

“맞습니다.”

압둘 무바라크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길 이배의 삼항사가 눈치가 빠르고 용감한 사람이니 이 배를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

용감한 인물? 맞긴 맞는데.

‘이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라고!’

“그리고, 힘들게 찾아온 손님을 내칠 그런 야박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

이 양반들이!

‘손님을 내치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아니 이제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자를 카타르로 돌려보내면 카타르 3왕자와도 원수가 되는 일. 게다가 AP사의 나민 아세르까지!

아무리 똘기가 충만한 나라도 그런 과감한 선택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나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이자의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돕고 안전한 곳에 하선시키는 것.

마음을 정한 나는 압둘 무바라크에게 물었다.

“목적지는 따로 정해둔 곳이 있습니까?”

“이 배는 유럽으로 향한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 유럽으로?”

“음, 영국으로 나를 데려다 주시오. 나민 아세르에게 연락하면 그곳에서 준비를 해줄 겁니다.”

“영국이라면……. 펠릭스토우(Felixstowe) 항구가 좋겠군요.”

나는 압둘 무바라크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비너스호가 영국에서 기항할 항구는 펠릭스토우에 위치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남동부 서포크주에 위치한 해변도시로 영국 전역에서 가장 큰 컨테이너 항구로 약 48%에 달하는 영국의 컨테이너 화물을 취급하는 항구도시.

그리고 내가 교대 근무를 마치고 하선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정체를 안 들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최대한 조심히 행동해 주십시오. 저도 따로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압둘 무바라크가 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며칠 뒤.

선박 "M.V. 비너스호"는 수에즈 운하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사이 밀항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선원들이 갖은 유도신문을 실시했지만 밀항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선장과 항해사들이 선교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있었다.

항해사들을 바라보는 이희영 선장이 미간을 살짝 구겨져 있었다.

“이항사, 밀항자는 아직도 대답을 하지 않고 있나?”

“네, 영어로 물어도 대답이 없고, 두바이 지사에서 번역해온 질문지를 보여줘도 뭐 도통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으음. 소지품에는 뭐 다른 힌트가 없던가?”

“네, 애초에 승선하면서 별다른 소지품을 휴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희영 선장의 수심이 깊어졌다.

그도 밀항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딱히 내어놓지 못한 상태라 답답한 기색이 역력했다.

양화종 일항사가 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장님, 곧 수에즈운하에 도착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배를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좀 고민해 보시죠.”

“그렇긴 한데. 문제는 너무 장기간 배에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단 유럽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바이에서 하선시키는 방법이 제일 좋은 방법이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곳에서 승선한 것이 분명하니까요.”

이희영 선장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항사, 그럼 일단 선실에 계속 갇혀 있으라고 할 순 없으니 갑판부원들과 같이 생활하도록 하고, 운동할 겸 청소나 잡일도 좀 시키고 하게.”

“알겠습니다. 선장님.”

“일단 갑판부원들 보고 좀 친하게 지내라고 하고.”

“네?”

“친하게 지내다 보면 마음도 터놓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한통 쓰고 싶고 그러지 않겠나. 경계심이 풀어졌을 때 물어보면 혹시 대답을 할지도 모르지.”

“아!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알겠습니다.”

양화종 일항사가 이희영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오래전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선배 항해사에게 들은 밀항자에 대한 이야기인데, 선박에 승선한 밀항자가 정체를 밝히지 않아 1년도 넘게 배에서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정체가 밝혀진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밀항자가 배에서 오래 생활하다보니 갑판부원들과 친해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밀항자도 가족들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쯤 선원들이 밀항자에게 사진을 찍어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자 밀항자가 냉큼 집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결국 밀항자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는 슬픈(?) 결론.

그때는 웃어넘긴 이야기였는데 막상 밀항자가 배에 나타난 현실을 마주하니 이 문제는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비너스호도 수에즈운하가 가까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배를 두바이로 돌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승선한 항구로 의심되는 두바이 항에 이 밀항자를 인계하려면 우선 유럽을 거쳐 돌아오는 길에 두바이를 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이 밀항자를 그렇게 오래 배에 승선할 계획은 없었지만 말이다.

펠릭스토우에서 그를 무사히 내려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곳은 내가 이번항차를 마지막으로 교대를 위해 하선하는 곳이기도 했다.

* * *

- 이집트 수에즈운하

수에즈 운하는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곳으로 지중해, 홍해 그리고 인도양을 연결하는 해운 교통의 요지이다.

해운회사 입장에서는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에즈 운하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수에즈 운하 근처에는 이곳을 통과하기 위한 선박들로 붐비고 있었다.

내가 수에즈운하를 바라보고 있자 이희영 선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삼항사.”

“네, 선장님.”

“수에즈 운하의 별명이 뭔지 알고 있나?”

“별명이요?”

“그래.”

“잘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해신해운의 천재항해사, 뭐? 만렙선원인 삼항사가 모르는 것도 있나보네?”

“…….”

“다행이군. 내가 아직 가르쳐 줄게 남아있으니 말이야.”

나는 이희영 선장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곳을 말보로 운하(Marlboro canal)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네.”

“말보로 운하요?”

나는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그 이유를 알겠나?”

“글쎄요. 저는 잘…….”

“이곳의 일부 도선사들 때문이라네.”

“아!”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수에즈 운하의 도선사들의 악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지켜보던 이희영 일항사가 생긋 웃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처음 삼항사로 수에즈 운하에 갔을 때였지. 수에즈 운하 소속 도선사가 선박에 탑승했더군. 우리나라 도선사들과는 달리 매우 젊어 보였지.”

“오래된 이야기네요. 허허허.”

“그래, 지금도 별로 다르진 않네. 수에즈 운하에 처음 방문했다고 하니 운하를 사진으로 남겨두라고 하더군.”

“굳이 뭐 사진까지요?”

뭐, 하긴 처음 이곳을 통과할 때는 제법 감회가 있는 곳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컨테이너선을 타는 선원들은 이곳을 앞으로 자주 다닐 텐데.

이희영 선장이 이어 말했다.

“그렇긴 한데, 나도 사진을 찍었다네. 뭐 남겨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사진을 찍고 나니 운하는 군사지역이니 벌금을 내야 한다고 협박하는 거야?”

“네? 허허허.”

“그래 어리바리한 삼항사가 승선해 있으니 나를 타깃으로 삼았던 모양이야. 내가 당한거지. 사실 그걸 빌미로 뇌물을 달라는 말이었지. 결국 그에게 말보로 한 보루를 건넬 주고 일을 무마했다네."

“그래서 말보루 운하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군요.”

씁쓸하네.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항구에 접안하거나 좁은 해역을 지날 때 그 지역의 조류, 바람 등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도선사가 선박에 승선해서 선박을 조종하게 된다.

수에즈 운하도 좁다 보니 선박의 운항이 까다로운 지역으로 이집트 당국에서는 강제도선 구역으로 지정하였다.

반드시 도선사가 탑승한 상태에서 선박을 운항해야 하는 구역이므로 이런 강제도선 구역에서는 아무리 선박의 최고 결정권자인 선장이라고 하여도 도선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일부 개발도상국의 도선사들이 선박에 올라와서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 수에즈운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들은 수에즈운하의 도선사들이 선박의 안전한 운항은 뒷전이고 뇌물을 최대한 많이 뜯어가려는 행태를 보인다며 울분을 토하는 이들도 많았다.

나도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선박에만 올라오면 이것저것 뜯어가려고 애쓰던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에즈 운하가 말보로 운하라고?

우리는 그를 ‘미스터 퐁퐁’이라고 불렀다.

미스터 퐁퐁(Mr. Pong-Pong)

미스터 퐁퐁(Mr. Pong-Pong).

수에즈운하에 있는 악명 높은 도선사의 별명.

전생에서 만난 그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였다.

하지만 산전수전을 겪은 도선사인 것처럼 배에 올라 갑질을 하는 미스터 퐁퐁 앞에서 나는 언제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미스터 퐁퐁이 제일 좋아하는 먹잇감은 대한민국 선적(선박의 국적)의 선박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배에 승선할 할 때는 절대 혼자서 올라오는 법이 없었다.

적어도 2명, 많으면 5명의 짐꾼을 대동했다.

도선사가 선박을 도선하는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하냐고?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짐꾼이었다.

미스터 퐁퐁이 도선하는 선박에 올라와 선원들에게 뜯은 뇌물을 챙겨갈 짐꾼.

매우 황당한 일이었지만 선박의 항해사들이 도선사의 노골적인 뇌물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만약 이들의 요청을 거부했다가는 사소한 문제를 트집 잡아 운항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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