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200)

- 선박 "M.V. 비너스“호 브릿지

갑판부원들이 밀항자를 데리고 비너스호의 선교로 올라왔다.

“선장님, 밀항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갑판장이 선교로 들어서며 선장을 바라보며 인사했다. 그 뒤로 밀항자와 그를 데리고 올라오는 갑판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일등항해사 양화종이 선교에 들어서는 밀항자를 보며 갑판장에게 손짓했다.

“갑판장님, 일단 저기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하시죠.”

나를 비롯한 선교의 사람들이 밀항자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밀항자는 중동 출신의 남성으로 보였다.

체격이 다부지고 진중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음, 밀항할 사람으로는 보이질 않는데.”

이희영 선장이 선교로 들어온 밀항자를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밀항자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나도 동감.’

내가 느끼는 점도 이희영 선장의 의견과 같았다.

뭐랄까, 있어 보이는 느낌?

일반적인 밀항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양화종 일등항해사가 갑판장에게 물었다.

“갑판장님, 그래 뭐 밀항자에 대해서 좀 확인된 게 있습니까?”

“일항사님, 안 그래도 좀 물어봤는데 일체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것도요?”

“네. 대답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밀항자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가요?”

“글쎄요. 그걸 모르겠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으니 뭐 확인할 방법이 없네요.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정말 답답하네요.”

해신해운의 선박에 승선하는 선원들은 한국어가 아니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외국인 선원들이 해신해운의 선박에서 근무를 한다 해도 아랍어가 가능한 사람은 없었다.

일항사가 갑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밀항자에게 다가갔다.

밀항자에게 영어로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선박의 일등항해사입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

밀항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일등항해사를 바라보았다.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

“…….”

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일등항해사의 물음에 그저 고개만 가로 저을 뿐이었다.

“국적은 무엇입니까?”

“…….”

“밀항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

“원하는 따로 목적지가 있습니까?”

“…….”

밀항자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일등항해사가 질문을 중단했다. 이희영 선장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선장님, 뭐, 아무래도 이 사람은 영어를 못하는 모양인데요?”

“음……. 그래 보이는군. 이걸 어쩐다.”

영어를 못하는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사실 밀항자가 보이는 반응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안다고 해도 지금 일등항해사가 묻는 질문에 대답할 밀항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밀항자들은 배에 몰래 승선하는데 성공한 이상 목적지까지 계속 배에 승선해 있는 것이 그들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밀항자가 발생하면 선원들은 밀항자의 국적을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밀항자의 국적을 확인해서 해당 국가로 밀항자를 인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밀항자 처리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에 몰래 승선한 밀항자들은 절대로 국적과 승선한 항구를 말하지 않는다.

밀항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만약, 지금 두바이 항구를 벗어나기 전이거나 출항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면 아랍에미리트의 코스트가드에게 연락해서 밀항자의 신병은 인계하는 방법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이 밀항자가 최소한 두바이에서 승선했다는 점을 확인되는 경우에야 취할 수 있는 방법일 뿐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미 제법 항해를 한 상황이라 두바이항구로 배를 다시 회항할 수도 없는 노릇.

이희영 선장의 입장에서는 다시 두바이 항구로 항로를 변경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장님, 어쩌면 좋을까요?”

일등항해사가 고민하고 있는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이희영 선장이 갑판장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갑판장, 일단 밀항자에게 남는 선실을 하나 내어주게. 그 물과 음식도 좀 챙겨주고.”

“네,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리고 항해사들은 브릿지에 잠시 대기하게. 같이 의논을 좀 해보지.”

“알겠습니다.”

선장의 말에 나를 포함한 항해사들이 크게 대답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 브릿지

이희영 선장이 선교에 남은 항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골치가 아프군. 밀항자가 발생하다니.”

“선장님, 어차피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니까 이집트 당국에 인계하면 되질 않습니까?”

이등항해사 김호영이 선장에게 의견을 말했다.

“음, 이집트 당국에 물어볼 수는 있겠지. 하지만 이집트 당국에서 밀항자를 받아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되네.”

“그렇습니까?”

“이집트 국적의 밀항자가 아니기 때문이야. 다른 나라에서 온 밀항자를 쉽사리 받아 주는 나라는 없다네.”

이희영 선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대답했다.

이집트 당국 입장에서도 이집트 국적의 사람도 아닌 다른 나라의 국적의 밀항자를 수용할 이유가 없었다.

이희영선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삼항사는 뭐 좋은 아이디어가 없나?”

선장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뭐야 이거?

나를 바라보는 이 눈빛 뭐야?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어리바리한 삼등항해사를 바라보는 그런 눈빛이 아니었다.

다들 한껏 기대하는 표정.

‘뭐지 이 부담스러운 상황은?’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기대가 싫지만은 않았다.

“선장님, 일단 국적을 확인하는 것이 제일 급선무 아니겠습니까? 국적이 확인도 안 되는데 다른 나라에서 밀항자를 받아줄 가능성도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일둥항해사 양화종이 참견했다.

“그런데, 영어를 못하니까 문제지. 국적을 알아낼 방법이 없잖아.”

내가 일등항해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러면 어떨까요? 일단, 본사를 통해서 두바이에 있는 지사에 연락하는 거죠.”

“음?”

“그리고 아랍어로 질문지를 번역해달라고 해서 밀항자에게 수기로 답변을 작성하라고 하는 거죠.”

"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

일등항해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마 지사를 통해 회신을 얻을 수 있는 시점이면 우리는 수에즈 운하에 거의 도착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나는 이 밀항자를 위해 시간을 벌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 이유는 내 머릿속의 전생의 기억이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장님, 궁금한게 하나 있습니다.”

“그래, 삼항사. 뭔가?”

“요즘은 밀항자가 많이 없지만 옛날에는 심심찮게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예전에는 항구의 보안이 지금처럼 엄격하지는 않았거든. 세상이 흉흉해지고 테러니 뭐니 하는 사건들이 많아지니 보안이 엄격해졌지. 특히 미국같이 까다로운 국가들은 보안증서를 갖추지 않으면 입항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지.”

“그렇군요. 우리가 미국항로가 아닌 것이 다행이네요.”

“그건 그렇지.”

“그럼 예전에는 보통 밀항자가 있으면 어떻게 했습니까?”

“음?”

이희영 선장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선배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야. 도저히 국적을 알 수 없으니 2년 가까이 배에 계속 태우고 다니면서 부원으로 일을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그렇군요.”

“그건 왜 물어보나?”

“만약 방법이 없으면 우리도 그렇게라도 해야 되질 않겠습니까?”

“음, 글쎄. 뭐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봐야지.”

내 말에 이희영 선장이 살짝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 *

- 비너스호의 선실

며칠 후.

당직시간이 끝난 후 나는 선원들의 일과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려 밀항자가 있는 선실로 혼자 찾아갔다.

일과 시간 외에는 밀항자가 선박을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선실의 장금장치를 잠가둔 상태였다.

철컥. 끼이이익.

내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자 밀항자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래지 마세요. 나는 도와주러 온 사람입니다.”

“…….”

그가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이 영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뭐, 좋습니다. 아직 저를 완전히 믿기는 힘드시겠죠.”

나는 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압둘(Abdul)이 아닙니까?

“……!”

그는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나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조용히 그에게 건넸다.

서류를 받아든 그의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본사 법무팀 현재형 차장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비너스호의 선박 이메일로 기상정보와 함께 회신 받은 자료였다.

바로 그것은 중동 현지의 기사 번역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압둘 무바라크.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경제전문가. 카타르 3왕자의 최측근으로 경제 관련 정책보좌역. 최근 벌어진 권력 싸움에서 축출되어 몇 주 전에 모습을 감춘 인물. 그게 당신의 정체 아닙니까?”

“……!”

압둘 무바라크.

그와 나는 전생에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이였다.

하지만 나는 전생의 기억 속에서 밀항자와 관련된 사건의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중동과 해운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큰 사건이었기 때문.

압둘 무바라크는 왕정 국가인 카타르 3왕자의 최측근 인물이었다.

카타르 후계자 자리 두고 왕자들 사이에 외부에는 드러나지 않는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건은 3왕자가 국외 순방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생한다. 3왕자의 세력이 경쟁자들에 의해 축출된 것이다.

압둘 무바라크는 사건 발생 직전에 가까스로 카타르를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압둘 무바라크는 국외의 조력자들의 도움을 얻어 겨우 카타르를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두바이로 들어간다.

두바이로 겨우 몸을 피했지만 적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압둘 무바라크에 대한 송환요구가 빗발친 것이다.

지속적인 송환 요구에 두바이의 조력자들도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들은 아무도 모르게 압둘 무바라크를 밀항시키기로 결심했다.

문제는 밀항한 선박에서 압둘 무바라크의 정체가 결국 탄로가 나고 만 것이다.

외교문제를 걱정한 선박의 승무원들은 밀항자를 본국인 카타르로 송환하게 된다.

본국으로 소환된 그는 갖은 누명 끝에 고초를 겪고 생을 달리하게 되었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현생과 달리 전생에 압둘 무바라크가 승선한 선박은 해신해운 선박은 아니었다.

그가 승선한 선박은 우리나라에서 LNG 선단을 가장 많이 운영하는 BK해운의 선박이었다.

우리나라 해운업계가 발칵 뒤집힌 사건은 이 밀항 사건이 벌어진 후 약 10여년의 시간이 지난 이후에 발생한다.

훗날 예상을 깨고 카타르의 왕권을 차지하게 카타르 3왕자가 이 과거의 일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는 BK해운과 카타르 회사 사이에 체결된 LNG선 용선 계약을 전부 해지해버렸고, BK해운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전생과 다르게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밀항자 압둘 무바라크의 신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10년 뒤 미래에 해신해운이 BK해운과 같은 불이익을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해신해운의 탱크사업부도 카타르와 가스공사 사이에 체결된 NLG 운송계약에 많은 LNG선을 투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결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원래대로 사건이 흘러갔다면 이자는 우리 비너스호가 아닌 다른 선박에 밀항했어야 한다.

하지만 미래가 변했다. 어떤 계기가 미래가 바꾸는데 영향을 미친것이 분명했다.

이자의 미래도 전생과는 다르게 흘러가야 한다. 그것이 현생에서 이자와 나의 인연이 이어진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람이 이 배에 탑승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밀항자가 결심한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이 선박의 삼등항해사입니까?”

수에즈운하(SUEZ CANAL)

- 선박 "M.V. 비너스“호 선실

음, 이 밀항자가 나를 알고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