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하는 톤도 상당히 부드러워진 상태.
아니면 내 비장의 한수가 통한 것일까?
사실 싱가폴에서 추진 중인 선박유 중계 터미널 사업은 AP의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슈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정유사들이 모두 노리고 있는 초장기 대형프로젝트.
세계 굴지의 석유재벌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전생에서도 AP사는 막대한 오일머니를 앞세워 입찰을 따내는데 성공한다.
우선협상자 지위를 AP가 차지하자 당시에는 의외의 결과라는 말도 많았다. 최종 대상자로 AP 가 발표되자 해운업계에서도 예상외의 결과라며 다들 놀라워했다.
경쟁업체였던 미국과 영국의 정유사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기 때문.
실제로 점수 차이는 불과 1~2점에 불과했다는 소문도 파다했고, 누군가는 오일머니 때문이라며 이를 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만약 입찰을 준비 중인 지금 이 시점에 이런 AP사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AP사가 입찰을 매우 불리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AP사는 현재 자체적으로 실시한 내부 평가에서도 성공을 낙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상황.
이들도 이런 상황에서 사업의 큰 리스크를 가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들이 미래에 우선협상자로 선정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미래의 일이자 전생에서 일어난 일. 꼭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AP 입장에서도 사운을 걸고 준비하는 프로젝트 중 하나였기 때문에 나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나민 아세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계의 원자재가 벌크선에 실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공장으로 향하고 완성품들은 다시 컨테이너선에 실려 세계로 뿌려지고 있습니다. 싱가폴은 그 중심에 있는 해운의 요충지이지요.
“음!”
“싱가폴에서 추진하는 선박유 중계터미널은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업의 독점권을 AP가 놓칠 리는 없지 않습니까?”
“…….”
나민 아세르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나의 전신을 샅샅이 훑는 기분.
“하하하하하!”
나민 아세르가 갑자기 큰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갑자기?’
“소문이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네에 대해서는 오히려 평가가 박했던 것 같군.”
“네?”
무슨 소리야? 내 평가라니?“
“사실 나는 오늘 이 회의에 참석할 생각이 아니었다네.”
“그럼 왜?”
“오늘 회의 참석자 중에 요즘 제법 사고를 치고 다니는 해신해운의 삼등항해사가 있다고 하더군. 흥미가 생겨 자네 뒷조사를 좀 했다네.”
“제 뒷조사요?”
“요즘 제법 굵직한 사건들을 일으켜서인지 자네를 아는 사람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진 않더군.”
“그럴 리가……?”
“자네를 만나게 되면 한번 유심히 살펴봐달라고 하더군.”
“네? 누가요?”
나는 도대체 무슨 소린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네의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야. 하하하.”
무슨 헛소리야?
내 장인이라니?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자 나민 아세르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하하하. 이거 참 큰일이군. 자네는 농담을 한 것인데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한 모양이야.”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자네가 얼마 전에 만난 인도네시아의 장관 말일세. 딸을 달라고 했다면서?”
“……?”
“나와는 옥스퍼드에서 같이 공부한 사이라네.”
“……!”
뭐? 이게 이렇게 이어지나?
그럼 이때까지 이양반이 그냥 나를 떠보려고 이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거야?
나민 아세르는 크게 웃더니 자신의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은 서류 한 장을 뒤집어 나에게 내밀었다.
그가 내게 내민 서류의 상단에는 “MOU”라는 글자가 크게 기재되어 있었다.
“음? 이건?”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우리나라 말로는 양해각서.
일반적으로 계약서 정도의 구속력은 없는 내용으로 작성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내용에 따라서는 계약서와 다름없는 효력을 가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 영감탱이! 정말 여우같은 영감이다!’
이 여우같은 영감은 우리와 협상을 하기도 전에 이미 이 양해각서를 준비해 왔으면서 나를 테스트하기 위해 떠본 것이다.
물론 내가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했다면 이런 제안을 할리도 없었겠지만.
'그런데 도대체 왜?‘
그가 나를 떠보기 위해 직접 이 자리에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는데 이유는 짐작이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준비한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뭐야 이거?’
그가 제시하는 내용은 더할 나위 없이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사건에 대한 NDA(비밀유지계약서)작성을 조건으로 양해각서 작성일 기준 국제 거래소의 최저가로 향후 8년간 해신해운에 선박유를 공급하겠다는 조건이라니!
해운회사에서 발생하는 비용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선박유 구매 비용이다.
‘대박이다!’
이 비용을 줄일 수만 있다면 해신해운의 영업구조에 큰 이익이 될 것은 분명했다.
특히 앞으로 고유가가 예상되는 상황이 아닌가.
‘이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이라니?’
물론 싱가폴에서 벌어진 사건이 세간에 밝혀지게 되면 해운업계에 미칠 파장이 결코 적지 않았다.
그 피해액을 정확히 추산할 순 없지만 AP사에게 적지 않을 타격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해신해운의 입장은 다르다.
AP사가 피해를 입는다고 하여 해신해운에 이익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는 협상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이 협상의 목표였다.
‘그저 우리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의 제안만 얻어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런 파격적인 조건이 있을 줄이야.
아무리 내 미래의 장인(?)후보의 친구가 AP의 사장이라도 이런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빼고 말이야.’
나민 아세르가 제안한 내용 중 내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었다.
사실 그 덕분에 나는 당당한 협상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마치 전혀 놀라운 제안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좋습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은 8년이 아니라 5년간으로 하겠습니다.”
“음? 5년?”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나민 아세르.
고유가가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으로 예측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
“8년은 너무 과합니다. AP사에서 이런 좋은 제안을 해주시니 5년으로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이번 협상의 목표는 해신해운과 AP사 쌍방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협상 결과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의 이익이 더 중요합니다.”
“……!”
나민 아세르가 입을 떡 벌리더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자네가 나를 여러 번 놀라게 하는 군!”
그가 사람 좋은 웃음소리를 호탕하게 터트렸다.
이렇게 상대방인 나를 좋게 봐주니 상대를 속인 것 같아 살짝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좋게 포장했지만 내가 5년으로 계약기간을 줄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이후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발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그동안 장기간 상승세가 지속되었던 국제 유가가 곤두박질치는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현재 AP사에서 제시하는 현재가보다도 낮은 가격으로 선박유를 조달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양해각서가 효력을 8년간 유지하면 오히려 미래에 해신해운에 손해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뜻.
나민 아세르도 내 말에 흡족한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질문을 했다.
“그나저나 자네는 중동에 와본 경험이 있나?”
“항구 밖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전생에는 몇 차례 출장을 다닌 경험이 있지만 현생에서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 자네는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손님을 대접하는지 본적이 없겠군.”
“네? 네, 그렇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뜬금없는 소리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상황.
그는 내 표정을 바라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곳 사람들은 손님 대접을 중시한다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손님이 오면 내가 먹을 음식을 내어서라도 환대하는 풍습이 있지.”
“아! 저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내가 전생에 출장차 이곳에 왔을 때도 나는 그런 경험이 있었다.
거리에서 길을 잃어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신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 신사는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우선 나에게 자리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나에게 차와 먹을 것을 대접했다. 그리고 그는 나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눈 후에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근데 이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내가 손님이니 대접을 해주겠다는 건가?
나민 아세르가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부족은 말일세. 손님이 찾아오면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네.”
“좋은 풍습이군요.”
“그런가? 그럼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보지. 만약 사람들에게 쫓기는 자가 자네의 집으로 찾아온다면 자네는 어쩔 생각인가?”
“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네.”
뜬금없는 테스트가 이어졌다.
“음, 글쎄요. 경찰에 신고해야 되지 않을까요?”“하하하. 자네는 참 야박하군. 우리 부족이야기를 잘 들어보게. 유목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말이야.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쫓겨 부족으로 도망쳐 오더라도 우리는 손님을 대접했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도움이 필요한 상황일 지도 모르지 않는가?”
“음…….”
“혹시라도 자네가 그런 상황에 놓인 다면 내가 한말을 한번 기억해 주게나. 이것도 인연이 아닌가.”
나는 나민 아세르가 뜬금없는 소리를 이어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을 마친 나민 아세르가 내 표정을 한번 살피더니 테이블 위의 버튼을 눌렀다.
회의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재형 변호사와 AP사의 간부들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현재형 변호사에게 합의안을 전달했다.
현재형 변호사는 내가 전달한 합의안을 보더니 까무러치듯이 놀라고 말았다.
‘나도 놀랬어요. 흐흐흐.’
목표로 했던 결과보다도 훨씬 좋은 합의가 성사되었기 때문.
AP사의 간부들과 현재형 변호사 사이에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양해각서에 들어간 세부적인 문구를 정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네, 기간은 우리측 요구대로 수정하는 것으로 하구요 이 문구는 다시 수정하는것이 좋겠습니다. 네 그리고 이 조항은…….”
지금은 현재형 변호사가 활약할 시간이자 무대였다.
얼마 후 양측의 대표는 합의에 도달했다.
악수를 하고 떠나려는 나에게 나민 아세르가 내 손을 강하게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미스터 장, 오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네. 사장님. 좋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 손님 대접을 제대로 못해 아쉽습니다. 다음에 미리 연락을 주고 찾아오면 내가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나에게는 그의 말이 의례적인 인사말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는 나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은 것일까?
그가 다시 한 번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손님이 찾아오는 인연을 귀하게 여긴답니다. 나도 오늘부터 미스터 장을 내 귀한 친구로 생각하겠소.”
“네?”
“……!”
나도 놀랐지만 더 놀란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있는 AP사의 간부와 현재형 차장이었다.
“미스터 장도 인연을 가벼이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나는 그의 이리송한 말에 별달리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시선을 바라볼 뿐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나보다 더 놀라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놀란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AP사의 간부들의 눈이 잔뜩 커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바라보며 크게 놀란 표정.
나민 아세르가 친구로 대하겠다니?
오랫동안 사장을 수행한 AP사의 간부들도 처음 들어보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처음 보는 나민 아세르의 모습이었다.
+
<메인 퀘스트(#04)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활약으로 해신해운은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협상 결과를 얻었습니다.”
보상 :
- 당신의 명성이 상승합니다.(명성 + 20)
- 이희영 선장이 당신을 신뢰합니다.
- 글로벌 인맥이 형성되었습니다.
- 당신에 대한 해신해운 본사의 평가가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습니다.
- 기술 [협상 Lv.1]을 획득했습니다.
- 히든 퀘스트 발동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