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200)

‘그래도 이건 모르겠지만.’

나는 책상 위에 내려놓은 서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가 이번 협상을 위해 준비한 서류였다.

그를 한방 먹일 생각에 살짝 흥분되기 시작했다.

‘나대지마 심장아.’

짜릿한 승부가 벌어지고 있었다. 협상을 앞둔 내 심장도 흥분한 것인지 살짝 두근거렸다.

협박입니까?

- AP 본사 회의실

나는 고개를 돌려 현재형 차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도 꽤나 당황한 표정.

현재형 차장은 본사 법무팀 직원이다 보니 사건 당시 싱가폴에서 벌어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문제도 있었다.

선박의 항해사들도 회사원이다. 아무래도 본선에서 본사로 보고 하는 정보들은 일부 누락이 있을 수밖에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상대해야할 비즈니스 미팅의 상대방을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큰 실책을 범한 상태.

협상의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도 상대방의 인원구성에 따라 ‘급’에 맞는 참석자를 포함할 수 있는 인원 구성을 전략적으로 할 필요가 있었다.

AP에서 우리의 뒤통수를 치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현재형 차장이야 사내변호사니 이 자리에 있어도 문제가 없는 인물이다.

문제는 나다.

‘그것도 초임 삼항사란 말이지.’

어쩌면 상대방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나는 일개 삼항사가 아니지만.

나는 해신해운의 천재항해사이자 만렙선원으로 불리는 사내. 나를 단순히 삼항사라고만 생각했다면 그건 저들의 실수가 될 것이다.

"흡흡!“

짧게 심호흡과 헛기침을 하자 회의실의 사람들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당시 선박에 타고 있던 삼등항해사입니다.”

“오? 당신이 그 삼등항해사입니까?”

뭐야 이 반응은? 내가 기대한 반응과는 달랐다.

AP사의 사장이 나를 알고 있다고?

그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를?

“싱가폴 현지에서 발생한 문제를 발견하고 일거에 해결한 능력 있는 항해사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아! 내 명성이 여기까지 울려 퍼졌구나!

‘능력 있는 항해사? 으흐흐흐.’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서 제법 활약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인도네시아를 구한 영웅이시라고. 이미 유명인사이시더군요?”

‘인도네시아를 구한 영웅? 으하하하!’

예상치 못한 칭찬에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흐흐흐.”

입 밖으로 웃음소리를 살짝 흘렸다.

나를 바라보는 현재형 차장의 얼굴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협상의 상대방이 하는 공치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들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나를 한심하게 보는 현재형 차장의 얼굴.

상대방이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이미 선점한 상황이니 현재형의 우려가 커져가고 있었던 것.

나도 현재형의 표정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이들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기에 앞서 단단히 준비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정신을 가다듬고 협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AP본사에서는 싱가폴에서 벙커를 공급하는 현지 업체가 싱가폴 현지의 범죄 조직과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내 질문에 나민 아세르는 살짝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예상한 질문이라는 표정.

“이번에 사건을 파악하면서 우리도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현지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도록 조치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곧 다른 현지 업체와 계약을 체결할 예정에 있습니다. 해신해운에서는 설마 우리 AP가 범죄조직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생각보다 빠르고 깔끔한 조치였다.

최근 사세를 확장하면서 빠르게 성장하는 회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AP사와 같은 거대 기업이 이런 범죄에 직접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AP사에 전적으로 전가하는 것도 무리인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문제는 AP사의 벙커를 납품한 현지 업체가 해신해운 뿐만 아니라 다른 해운회사의 선박에도 그동안 많은 벙커를 납품해왔다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말을 마치고 손에 쥐고 있던 선박 연료유 검사 결과지를 그에게 내밀었다.

부적합 판정을 받은 바로 그 검사 결과지였다.

나민 아세르는 내가 건네준 서류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음, 구두로 보고 받은 내용과 일치하는 서류 같군요.”

그는 서류를 덮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이 검사 결과는 해신해운 비너스호에 급유된 벙커에 한정된 검사 결과가 아닙니까? 말했다시피 해당 거래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 우리 AP의 입장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음? 무슨?”

“만약, 해신해운 말고 다른 해운회사들이 이 검사결과를 알게된다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요?”

“…….”

내 말을 듣고 나민 아세르는 얼굴에서 미소를 감추기 시작했다.

“삼항사! 지금 뭐하는 겁니까?”

현재형 차장도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조용히 귓속말을 건넸다. 그는 손을 탁자 밑으로 떨어뜨려 나의 허벅지를 강하게 꼬집었다.

내가 한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일종의 협박으로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기 때문.

나도 지금 이 순간이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넌 상태.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가기로 결심했다.

나민 아세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샘플 검사 결과서는 제가 직접 연구소에 가져온 것입니다. 이 자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지요. P&I 보험사에서도 이 정보를 공유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제가 거절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

“그리고 참고로 현재 비너스호가 가입되어 있는 P&I 보험사는 GB(Great Britain) P&I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GB P&I는 IG 클럽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지요.”

세계에서 가장 큰 선주상호보험사들의 모임을 IG 클럽이라고 한다.

IG 클럽들은 대부분 영국에 소재하고 있다.

해신해운의 비너스호가 가입된 P&I 클럽 역시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둔 클럽.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박들이 가입되어 있는 P&I 클럽에 이런 정보가 들어간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나의 협박이 제대로 통한 것일까?

나민 아세르의 눈에서 불같은 안광이 뿜어졌다.

“지금······ 나를 협박을 하는 겁니까?"

“······.”

"이런 수작이 나에게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하지만 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한 상태.

오히려 이 이질적인 상황이 나를 더 겁나게 만들고 있었다.

꿀꺽.

회의장은 정적만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의 호흡소리도 끊긴 상황.

현재형 차장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질 지경.

나도 다르지 않았다.

사실 속마음은 나도 현재형 차장만큼이나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AP사의 사장이라면 세계 재계와 중동 정계에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대답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테이블의 한쪽 구석으로 치워두었던 서류 뭉치를 나민 아세르의 테이블 앞으로 밀어냈다.

“이 서류는 뭡니까?”

“한번 보시면 무슨 내용인지 아실 겁니다.”

나민 아세르는 빠르게 서류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자료는 삼합회로부터 건네받은 비밀 장부에 포함되어 있던 자료로 싱가폴의 현지 업체가 불량 벙커를 납품한 선박들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문제는 해신해운 자료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의 선박에 대한 정보도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

부갑판장에 대한 징계위원회 당시 제출한 자료도 이 비밀 장부 중에서 해신해운의 선박들에 해당하는 자료만을 발췌해서 제출했던 것이다.

탕!

경직된 표정으로 나민 아세르는 서류를 덮으며 탁자를 가볍게 쳤다.

"음, 이 자료는 싱가폴의 현지 업체가 작성한 장부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럼, 이 장부에 기재된 내용이 정확하다면 이 많은 선박에 공급한 우리회사의 선박유의 품질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군요.”

나는 나민 아세르의 말에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민 아세르가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이 내용이 신뢰성이 있는 자료인지 의문이 있습니다. 우선 출처를 확인할 필요가 있겠군요.”

‘음?’

“이 자료를 어디서 받았습니까? 정보의 출처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어라?

이 자료는 현지 업체가 작성한 장부가 분명 했지만 삼합회가 빼돌린 자료였다.

그 출처 뿐만 아니라 자료의 진실성을 또한 내가 밝힐 수 있는 성질의 자료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세르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나민 아세르가 이어서 말했다.

“자료의 출처가 분명하지 않으면 이 자료를 증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진실성이 담보되는 자료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만약 해신해운에서 불법으로 입수한 자료이거나 허위로 작성된 것이라면 법원에서 이 자료를 믿겠습니까?”

“불법이라니요.”

“그럼, 혹시 싱가폴의 범죄조직으로부터 이 자료를 받은 것입니까? 해신해운이 범죄조직과 손을 잡은 것입니까?”

“…….”

회의장에 참석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현재형은 우려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것 처럼 보였다.

분위기를 반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나는 회의실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지 여부는 법정에서 가릴 일이 아닙니까? 그건 지금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협상이 아니라 소송을 제기할 때 걱정할 문제이지요.”

“음?”

“저는 지금 이 자료를 가지고 AP사에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우리에게 이 자료를 보여준 이유가 뭡니까?”

“이 자료들이 공개되면 AP사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명성과 앞으로 추진하려는 사업에도 피해가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소송이나 증거능력 같은 법률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죠.”

“음…….”

나민 아세르가 짧게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나는 회의장의 기세가 살짝 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는 직감.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예를 들면…….”

나는 긴장감을 주기 위해 호흡 가다듬었다. 이어서 말했다.

“싱가폴에서 추진 중인 선박유 중계 터미널 건설 프로젝트에 입찰하는 경우라던가…….”

“……!”

“……!”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민 아세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번 협상 과정에서 그가 냉정함을 상실한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나민 아세르가 갑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내가 미스터 장과 독대하겠다.”

“……!”

“사장님?”

AP사의 간부들이 나민 아세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간부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회의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나민 아세르가 아직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현재형 차장을 바라보았다.

현재형이 차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독대라면 나도 원하는 바였기 때문.

현재형 차장이 자리를 떠나자 나민 아세르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자네는 도대체 어떻게 알았나?"

"네?"

"우리 회사가 선박유 중계 터미널 입찰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았나?”

양해각서(MOU)

- AP 본사 회의실

나민 아세르가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이 느껴졌다.

‘단둘이 있어서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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