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200)

두바이항.

선박 “M.V. 비너스”호가 중동에서 가장 큰 항구인 두바이항구의 정박지로 들어섰다.

두바이항은 중동에서 가장 큰 항구로 중동의 인근의 각 지역으로 가는 환적 화물들을 환적하는 항구로 이용되는 허브항구중 하나였다.

유럽을 향하고 있는 비너스호는 인도를 거쳐 두바이를 기항하는 항로에 배선되어 있었다.

비너스호가 두바이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빠르게 선장의 허가를 받고 하선했다.

두바이에 위치한 AP(Arab Petroleum)사의 본사에서 예정되어 있는 협상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AP(Arab Petroleum) 본사 건물 앞에서 해신해운 법무팀 담당자를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항구를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택시 안에서 창밖에서 두바이의 풍광을 바라보며 나는 상념에 잠시 빠져들었다.

전생에도 두바이는 몇 차례 방문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생에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건설사에서 시공한 부르즈 할리파가 세계 최고층 건물로 두바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는데, 현생에서는 아쉽게도 아직 이 건물은 완공되기 전이었다.

현재 두바이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 건물은 아무래도 개관 당시부터 세계의 유일한 7성급 호텔이라고 불리던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달리 지금은 두바이가 가장 활발하게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시기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달리는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곳곳에서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도시 전체에 활기가 넘쳐흐르는 것만 같은 기분.

‘역시 오일머니가 최고군.’

황량한 사막에 불과했던 이 도시가 점차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새삼 오일머니의 대단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협상에 최선을 다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국제 글로벌 정유사들과의 계약은 해신해운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거래였다.

아무리 10대 글로벌 선사고 꼽히는 대형해운회사라고 하더라도 AP와 같은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정유회사들과의 계약에서는 ‘을’의 지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는 없다.‘

AP사로 향하는 나는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며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사이 택시는 AP사의 본사에 빠르게 다가서고 있었다.

이곳은 전생에도 방문할 기회가 없었는데 삼등항해사의 신분으로 이곳을 오게 될 것이라고는 나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지난 몇 주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전생에서 보다 현생이 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탄 택시가 AP 사의 본사 정문에 도착했다.

나는 창밖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법무팀 직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택시에서 내리자 금세 나를 발견하고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장보고 삼항사님?”

“네, 맞습니다. 제가 장보고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법무팀의 현재형 차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비너스호의 삼등항해사입니다.”

현재형 차장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사내는 명함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음! 해신해운 법무팀에서 근무하는 사내변호사인가 보구나.’

그의 명함에는 ‘법무팀 차장/변호사’라는 기재와 함께 영어로 ‘Inhouse Counsel'이라는 표시가 기재가 있었다. 사내 변호사라는 표현이었다.

그는 반무테 안경을 쓴 샤프한 눈매를 가진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였다.

살짝 미소 짓는 얼굴은 제법 성격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음? 처음 보는 사람이네.’

현재형 차장은 전생에 본사 근무 할 당시에도 인연이 딱히 없던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본사에 근무할 당시 법무팀과도 협업이 있었기 때문에 법무팀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그들은 아직 나를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둘 중 몇 명은 지금도 본사 법무팀에서 근무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심 그들이 오는 것을 기대했었는데.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전생에 일항사로 근무하던 중 육상근무 발령이 났다.

부산 지사 근무를 거쳐 본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본사 근무 당시 인연을 맺고 친하게 지낸 법무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전생에는 본 기억이 없는데. 곧 퇴사를 하는 건가?’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살짝 궁금증이 밀려와왔다.

어디 물어볼 사람도 없고 답답하네.

아! 혹시?

나는 과거에 법무팀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갑자기 미리속에 떠올랐다.

법무팀의 에이스라고 불리던 사내변호사에 대한 이야기.

워크홀릭에 경영진이 신임하는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뒤늦게 발견한 위암으로 수술시기를 놓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법무팀 직원이 술자리에서 건강관리를 잘하라며 들려준 이야기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이 사람이 그 사람인가?’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현재형 차장도 나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나저나 삼항사님, 굳이 이곳 협상장소까지 같이 오겠다고 한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이유요?”

“네, 본선 근무도 바쁠 텐데 말이죠.”

“아, 마침 체선이 있어서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사실 저는 도형준 상무님이 따로 메일을 보내서 깜짝 놀랐습니다.”

“허허허. 죄송합니다. 꼭 참석하고 싶어서 도형준 상무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삼항사님도 아시겠지만 도형준 상무님은 컨테이너사업부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실세 임원 중 한명이지요. 상무님 부탁이니 제가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뭐 싸우러 가는 길에 지원군이 있으면 좋기도 하구요. 하하하.”

현재형 차장이 빙긋 웃어보였다.

그는 여전히 이유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이! 누가 이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주변에는 비너스호 사람들이 당연히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움찔거렸다.

비너스호의 사람들은 내가 먼저 부탁해서 이 자리에 온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법무팀에서 먼저 나에게 이번 협상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당연하질 않은가?

본사 법무팀에서 일개 삼등항해사에 불과한 나에게 항해와 무관한 협상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한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이희영 선장이 내 말에 속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며칠 전 나는 당직 근무를 하면서 법무팀으로 메일을 먼저 발송했다.

그 메일의 내용은 싱가폴에서 발생한 저질 벙커 급유 사건과 관련해서 AP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구할 수 있는지를 법무팀의 의견을 질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만약 법무팀에서 이 협상에 관심이 없으면 비너스호가 두바이 항구에 기항하는 날 나 혼자서 단독으로 AP 본사로 쳐들어갈 예정이라는 귀여운 협박(?)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원활한 협상을 위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항구에서 인연을 맺은 도형준 상무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웃긴 일이야.’

내가 인맥질이라니.

사실 전생에서 내가 제일 경멸한 것이 인맥질인데.

사내 정치니 뭐니 포장하지만 인맥질과 친목질이 만연한 회사는 효율적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도 사실 전생에는 회사 내부에서 능력으로 승부하지 않고 인맥질 하는 놈들을 제일 싫어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생이라도 60여년 인생을 살면서 제법 성공한 사업가로 살아온 지금은 인식이랄까 아니면 비즈니스에 대한 가치관이 살짝 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인맥은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현재형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왜 굳이 이곳까지?”

현재형 차장이 웃으며 물었다.

나는 주변을 한차례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췄다.

이곳에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없겠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차장님, 아무래도 AP사 같이 큰 회사에서 저질의 선박유를 선박회사에 공급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도 이에 대해서 클레임을 제기해야 하질 않겠습니까?”

“음! 그렇긴 한데, 비너스호는 이미 문제된 선박유를 전량 교체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는 부족하지요. 그동안 AP가 싱가폴에서 해신해운 선박에 공급한 양이 얼만데요.”

“오!”

현재형 차장이 크게 웃으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아무래도 삼등항해사가 이런 저런 고민을 한다는 점을 놀랍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현재형 차장이 이어서 말했다.

“삼항사님이 그 말을 하니까 저도 말씀드리는 건데 말이죠.”

“네.”

“사실 저도 이 사건을 보고 받고 그 부분을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요?”

“AP사에서 공급한 선박의 리스트는 당연히 제가 챙겨왔습니다. 그런데 해당 선박들에 공급된 선박유의 품질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는 아무래도 부족해서요.”

나는 그 말에 활짝 웃어보였다.

“차장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네?”

“제가 준비한 게 있거든요.”

비너스호 사람들이 내 미소를 보면 안심할 텐데.

현재형 차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 AP 본사 회의실

‘이것들이!’

약속한 미팅 시간이 30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AP 회사의 담당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했을 것이니 본격적인 협상에 앞서 심리전을 펼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음, 이 사람들이 좀 늦네요.”

현재형 변호사도 살짝 짜증이 난 표정.

하지만 그도 이런 협상에 임하는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스르륵.

회의실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두바이 전통복인 흰색 ‘칸도라’를 차려 입은 사내들이 회의실로 들었다.

이들은 약속시간에 늦은 것 따위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가장 앞에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사내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더니 손을 건넸다.

‘뭐야, 손이 왜 이렇게 커?’

악수를 하기 위해 마주 잡은 그의 손이 매우 크고 단단했다.

그가 악수하는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나는 그의 기세에 눌려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중동인 특유의 깊고 검은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나민 아세르라고 합니다.”

“헉……!”

그의 말을 들은 현재형 차장이 눈을 크게 부릅뜨며 헛바람을 삼켰다.

현재형 차장은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후 나에게 손을 들어올려 나직이 귓속말을 건넸다.

“이분은 AP의 사장단 중 한명입니다.”

“……!”

뭐? 사장이 직접 내려 왔다고?

물론 AP사는 세계 5대 정유회사 중 한 곳이기 때문에 대규모 경영진이 포진하고 있었다.

사장단 중 한명이니 이 사람 위로도 회장이 있고 사업부문별로 다른 사장들이 여럿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장이 직접 이런 실무진들의이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형이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귓속말을 이어갔다.

“나민 아세르는 두바이 왕족의 측근 세력입니다. 삼항사님 언동을 조심히 하십시오.”

“……네? 언동을 조심하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

“다 들었습니다. 본선에서의 이야기를 다 전해 들었습니다!”

“…….”

뭐? 이 사람이 나를 도대체 뭐로 보는 건지…….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거지?

그때 나민 아세르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 해신해운 분들이 멀리서 이곳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 말에 지금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던 현재형 차장도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 협상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실무진 회의를 예상하고 이에 맞춘 협상 전략을 준비한 현재형에 AP사의 사장인 나민 아세르가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제법 경력이 풍부한 변호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휴.”

현재형 차장은 짧게 심호흡을 하더니 가방에서 준비한 서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서류들을 나민 아세르의 테이블 쪽으로 건넸다.

“이번에 싱가폴에서 해신해운에 공급한 선박유에 대한 자료입니다.”

“음, 그런데요?”

나민 아세를 서류를 대충 보는둥 마는둥 뒤적이더니 대답했다.

“서류 뒤쪽을 살펴보시면 선박유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다는 검사결과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 그 이야기는 저도 전해 들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던 선박유는 다시 공급했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건 맞습니다.”

“공급한 선박유 뿐만 아니라 선박에 잔존하고 있던 선박유까지 모두 교체해주었다고 들었습니다.”

“…….”

‘생긴 건 완전 상남자에 쾌남아인데 안에는 능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네. 이 사람.’

모르는 척 의뭉 떨더니 다 알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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