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신감 어린 눈빛으로 활짝 웃었다.
어느새 부턴가 이들도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항상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믿기 시작한 눈치였다.
* * *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비너스호로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삼항사님, 선박급유업체의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요?”
“삼항사님을 좀 뵙고 싶다고 하네요.”
“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선박으로 선박급유업체의 담당자들이 올라왔다.
“삼항사님, 선박급유업체에서 나왔습니다.”
“아, 네.”
눈치를 보며 인사를 하는 그들은 종전의 자신감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였다.
심하게 눈치를 보는 모습.
나는 고개를 돌려 그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내를 찾아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안광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급유 업체의 사람들을 감시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삼합회 사람들이구나.’
얼굴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소 샘플 테스트 결과를 저희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이렇게 바로 찾아왔습니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질문하자 선박급유업체의 담당자들이 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전량 회수해서 다시 급유를 해드려야지요.”
“전량이요?”
“네. 급유한 전량을 회수해서 다시 새로 급유해드리겠습니다.”
“음······.”
“푸, 품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검사한 샘플의 품질보증서도 미리 준비해왔습니다.”
선박급유업체의 담당자가 황급히 준비한 서류를 나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서류를 받아서 대충 훑어본 후 말했다.
“이 사람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네, 네?”
이들은 내가 갑자기 싸늘하게 말하자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당신들이 납품한 저질의 벙커가 때문에 기존에 있던 벙커들의 품질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납품한 벙커만 회수해서 다시 급유하겠다고요?”
“아! 그, 그건.”
“탱크에 있는 벙커 전부 디벙커링(Debunkering)해서 다시 그대로 채워 넣으세요!”
내가 큰 소리로 호통을 치자 이들은 잔뜩 움츠려 들었다.
“그건 너무 비용이······.”
“흥! 그건 그쪽 업체 사정 아닙니까? 다행이 운항을 하지 않은 상태라 그 정도로 봐주는 겁니다."
내말에 급유업체의 담당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감시자로 따라온 삼합회의 조직원을 바라보았다.
삼합회의 조직원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알았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났다.
이들이 자리를 떠나자 삼합회의 조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삼항사님, 안녕하십니까. 삼합회에서 왔습니다.”
“네, 저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습니다. 하하하.”
내가 웃으며 대답하자 그도 나를 바라보며 화답했다.
‘우, 웃는 거 맞겠지?’
그는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직업병인가?
살벌해 보이는 인상과 분위기는 미소로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들고 있던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이건 저희 큰형님께서 전달해 드리라고 한 서류입니다.”
“네? 무슨 서류인가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삼항사님께 드리면 아마 도움이 되는 자료라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어젯밤 삼합회의 숙적인 흑룡회와의 대결에 내가 한 손 거들었기 때문일까?
전투에 함께 참여한 전우를 대하는 느낌과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호의적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삼합회가 건네준 봉투를 열어 자료를 살피기 시작했다.
‘음? 이것 봐라?’
서류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해신해운은 돈이 없는 게 아니다. 도둑이 많은 곳이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징계위원회.
이희영 선장은 나의 요구에 따라 징계위원회를 개최하기로 결심하였다.
선원법상 선장은 선원들을 징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이 경우 징계위원회의 의결을 거친 후에 징계하도록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선박에서 선장이 선원들을 자체적으로 징계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희영 선장도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였지만 향후 형사 및 노동법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는 사안이라 필요한 절차를 미리 거쳐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징계대상자는 찰리와 부갑판장 박문경.
선원법상 이들에게도 해명할 수 있는 진술기회를 부여하도록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선교에서 열리는 징계위원회에 출석한 상태였다.
우선 찰리에 대한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찰리, 그래 어떻게 된 일인지 한번 말해보게.”
5명의 징계위원으로 출석한 선원들 가운데 앉은 이희영 선장이 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
찰리는 고개를 푹 숙인채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저, 저 답답한 놈!’
나는 찰리를 바라보며 혀를 짧게 찼다.
삼항사에 불과했기 때문에 나는 징계위원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희영 선장에 의해 특별히 참관이 허락되었다.
나는 찰리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찰리! 있는 사실대로 말해. 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거야.”
“삼항사! 조용히 하게!”
이희영 선장이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찰리를 고개를 들어 나를 한번 바라보더니 짤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그래, 어떻게 된 일인가?”
“처음에는 돈이 필요했습니다. 동생의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 월급으로는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선박유를 빼돌린 건가?”
“아닙니다. 저는 선박유를 빼돌린 적은 없습니다.”
“그럼?”
“외국인 선원들 사이에 소문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선박유를 빼돌리는 사람이 있다고요.”
찰리는 잠시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제는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인기척이 느껴져 따라갔더니 선박에서 보관하고 있는 선박유 샘플을 바꿔치기 하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그게 누구였나?”
“그건······.”
참리를 잠시 주저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는 찰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부갑판장님이었습니다.”
“으음!”
선장을 비롯한 징계위원회의 위원들이 신음을 흘렸다.
찰리가 대답을 이어갔다.
“저에게 돈을 나눠주면서 모른 척 하라고 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그럼 그 이후로 부갑판장과 함께 이일에 가담하게 된 건가?”
“아닙니다. 그 이후로도 저는 이일에 개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항차때 부갑판장 소개로 싱가폴에서 사채를 빌린 일이 있는데 이자가 너무 높아 갚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부갑판장이 이번에 찾아와 샘플을 바꿔오면 빚을 갚을 수 있는 돈을 주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알았다. 이만 나가보게. 결과는 의논한 후에 알려주겠다.”
찰리의 진술이 끝난 후 부갑판장이 선교로 들어와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선장님! 너무 억울합니다.”
“부갑판장, 천천히 말해 보시게.”
“네, 이건 누명입니다. 저는 벙커를 빼돌린 적이 없습니다!”
“그래?”
“네, 그건 선박급유업체들이 한 짓입니다. 저와는 무관합니다.”
“음······. 찰리는 이미 다르게 이야기를 했는데 말이지.”
“그, 그건 아무런 증거도 없질 않습니까! 저는 찰리가 돈이 필요하다고 해서 소개해준 것이 전부입니다!”
‘저 뻔뻔한 새끼.’
마지막 순간까지 잔머리를 굴리는 모습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자백하고 반성하면 좀 봐주려고 했거만.
저런 인간은 도저히 갱생의 여지가 없는 놈이었다.
전생에서는 몰랐다. 이런 사람인지.
하지만 지금은 60년 인생을 살아본 경험이 있었다.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정확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장님, 제가 어제 현장에 있었습니다. 보고 들은 사실을 좀 말해도 되겠습니까?”
“그래, 삼항사 한번 말해보시게.”
“어제 이항사와 함께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싱가폴 현지 급유업체의 배후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게 누군가?”
“싱가폴에서 제법 큰 범죄조직이라고 합니다. 흑룡회라는 조직이 급유업체의 배후에서 이일을 꾸몄던 것입니다.”
“흑룡회?”
“네, 흑룡회라는 간부라는 놈에게 제가 분명히 들었습니다. 부갑판장이 흑룡회와 거래관계에 있고 부갑판장이 선박유를 빼돌리고 샘플을 바꿔치기 하는 일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갑판장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선장님! 삼항사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음?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들었다고 하질 않나?”
“삼항사는 근거도 없이 저를 모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증거를 대보라고 하십시오. 삼항사의 진술 말고는 아무런 물적 증거도 없질 않습니까? 이건 평소 찰리와 친하게 지내는 삼항사가 저를 모함하기 위해서 지어낸 거짓말입니다!"
“······!”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저를 모함하는 삼항사도 징계위원회에 회부해 주십시오!”
‘하! 이 새끼가 진짜!’
나는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다니 참으로 거짓말이 능숙한 놈이었다.
그리고 감히 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해달라고?
이희영 선장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삼항사, 그 말을 입증할 증거가 있는가?
증거가 있나?
- 선박 M.V. 비너스호 징계위원회
마음에 안 드는데.
증거를 가져오라고 외치는 부갑판장은 제법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놈 봐라?’
뭐? 나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해달라고?
비장의 한수라도 선보였다는 듯 의기양양한 모습.
물적 증거를 제시해보라고?
꼭 뒤가 구린 놈들이 이런 식이다.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보다는 증거를 가져오라는 변명을 즐겨하는 놈들.
진짜 재판이라면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말도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자리는 그런 공식적인 재판 절차는 아니었다.
‘그래도 제법 잔머리를 굴렸어.’
전말이 들어난 이 와중에도 이놈이 이렇게 발뺌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나름 좋은 생각일지도?
그 이유는 부갑판장과 모종의 거래 관계를 이어가던 흑룡회가 지난밤에 괴멸되었기 때문이다.
부갑판장은 자신의 범죄 파트너이자 공범인 흑룡회가 사라졌으니 과거의 범죄를 숨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것은 헛된 꿈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부갑판장의 잔머리에 감탄해 하는 나를 깨운 것은 선장이었다.
“삼항사.”
“네, 선장님.”
“그래, 방금한 그 말을 입증할 증거가 있나?”
“…….”
선교 내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내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히죽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부갑판장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새끼, 좋은 꿈을 꾸고 있구나.’
나는 자리에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부갑판장을 노려보며 말했다.
“네 선장님, 물론 가지고 있습니다.”
“……!”
부갑판장의 얼굴은 순식간이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오, 그래 그럼 한번 제출해 보게.”
나는 이희영 선장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준비하고 있던 서류 봉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 자료는 오늘 오전 삼합회의 조직원이 나에게 전달한 바로 그 자료였다.
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자료는 흑룡회 사무실에서 삼합회가 입수한 비밀 장부였다.
그 장부에는 그동안 흑룡회가 빼돌린 선박들의 벙커 빼곡히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자료 중 해신해운 선박들의 자료만 추려서 이희영 선장에게 제출했다.
나머지 자료는 우리 회사와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고 따로 활용할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