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속 없는 웃음을 흘려댔다. 이희영 선장도 눈빛을 빛냈다.
그는 내가 다른 속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보였지만 구태여 그것을 확인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선장은 나에 대한 신뢰가 제법 있는 모양.
“그래, 그럼 선박유를 검사하는 랩(lab)으로는 이항사를 보내야 겠군! 둘이 함께 하선하게.”
“아, 네! 감사합니다. 선장님.”
“그래, 일 잘보고 무사히 승선하도록.”
“네!”
“삼항사.”
“네?”
“사고치지 말고.”
“네, 제가 뭐 어디 사고 치는 놈입니까? 허허허.”
어색한 내 웃음소리만 선교를 가득 채웠다. 또 나만 웃네. 젠장.
선장의 눈빛이 미묘했다. 나는 내 속마음이 들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 싱가폴 겔랑의 어느 거리 모처
“야! 뭐냐고!”
“조용! 조용히!”
이등항해사 김호영은 계속 내 뒤에서 투덜거리고 있었다.
‘아무튼 눈치 없는 인간!’
나는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김호영은 내 지적에 목소리를 낮추더니 말을 이어갔다.
“보고야, 이게 무슨 미친 짓이냐?”
“중요한 일이라고 했잖아요.”
“오랜만에 밖에 나왔는데 시간이 남으면 바깥공기도 마시고 술도 한잔하고! 놀다가 들어가야지. 여기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냐고!”
“형, 조용히 좀 해봐! 들키면 안 된다니까!”
“우리가 뭐 탐정이냐? 그리고 부갑판장을 왜 미행하는 건데?”
“조용!”
심각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이항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뒷골목에 몸을 숨긴 채로 앞선 사람들의 뒤를 조심히 쫓고 있었다.
우리가 추적해온 인물은 다름 아닌 부갑판장과 찰리였다.
부갑판장과 찰리는 내가 하선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배를 내려서 상륙했다.
이를 예상하고 있던 나는 항구에서 미리 택시에 탑승한 상태로 잠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쫓아 이곳 겔랑의 어느 구석까지 미행하는데 성공했다.
부갑판장은 골목 끝 허름하지만 제법 큰 창고 건물로 들어갔다.
창고 건물은 외관이 허름하고 부서진 곳이 많았다. 지금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폐건물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항사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형, 저 뒤로 좀 돌아가서 창문 좀 찾아보세요.”
“뭐? 삼항사 따위가 어디 이항사님한테!”
“아, 형! 빨리 가라고! 지금 급하다니까!”
“이 새끼가! 네가 가면 되잖아.”
“난 여기서 망을 봐야지.”
“에휴……. 내 입만 아프지. 일단, 너는 배에 들어가서 두고 보자.”
이등항해사 김호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씩씩거렸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거구의 몸을 잘 숨긴 채로 제법 날렵하게 움직였다.
그는 큰 키를 활용해서 창문을 확인하더니 나에게로 돌아왔다.
“안에 몇 명 없는데?”
“그래요?”
“응, 모르는 사람이 3명 있고, 찰리하고 부갑판장이 들어갔고. 그게 다야.”
“3명? 겨우?”
"그렇다니까.“
“사람들은 뭐하고 있어요?”“찰리는 무릎 꿇고 있고 부갑판장은 그 뒤에서 서있던데. 뭐…… 상사한테 혼나는 그런 분위기랄까?”
3명이 전부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찰리는 전생에 그 무시무시한 범죄조직인 삼합회의 마약을 운반하다가 검거된다.
그렇다면 이곳도 삼합회와 관련이 있을 장소일 가능성이 높았다.
삼합회 조직원이 많이 있을까봐 걱정했는데 3명이 전부라는 말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지부나 이런 곳인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곳에 조직원이 3명밖에 없다면 밖에서 시간을 끌게 아니고 빨리 들어가서 협상을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형, 들어가 보시죠.”
“으음…….”
이항사는 어딘지 내키지 않는 표정.
“형, 저 혼자 저기 들어가라는 건 아니죠?”
“뭐 끌려간 것도 아니고 제 발로 들어갔는데 우리가 굳이…….”
“무릎 꿇고 있다면서요.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우리가 가서 구해오죠.”
“…….”
“씨맨쉽!”
“……”
“한국에서 온 영웅! 인도네시아를 구한 선원!”
“……. 알았다. 알았어! 대신 위험해지면 바로 도망치는 거다.”
“네, 당연하죠!”
이항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걱정스런 눈빛이 역력했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못해 나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나는 창고 안에 사람이 몇 명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자신감이 제법 생긴 상태였다.
‘3명 정도면 뭐, 충분하지.’
끼이이익!
호기롭게 철문을 열어 젖혔다.
저벅 저벅.
내가 창고의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섰다. 거구의 이등항해사 김호영이 나를 따라서 문 뒤로 나타났다.
찰리는 창고 안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검은 정장의 사내 3명이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들어 문으로 들어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면상 보소.’
생래적 범죄자 관상을 하고 있는 이들은 매우 화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뭐라 뭐라 크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사, 삼항사님?”
부갑판장이 놀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갑판장, 뭡니까? 여기서 뭐합니까?”
내가 다가서며 말했다.
“뭐하는 놈들이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나를 보며 소리쳤다.
자신만만한 표정이었지만 솔직한 심정을 말하면 나는 사실 조금, 아주 조금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런 짓은 나도 처음이라고!’
이들에게 내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허세를 잔뜩 부리고 있는 상황.
용기를 얻기 위해 나는 예전에 읽은 무협지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치 그 소설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나는 크게 외쳤다.
“나는 선박 비너스호의 삼등항해사다.”
“…….”
“해신해운의 천재항해사, 선박재벌의 만렙선원, 영도의 고등학생들의 살아있는 전설, 고무고무킥의 달인, 태권도 3단에 취미로 종합격투기를 배운 남자, 인도네시아를 구한 영웅, 인도네시아 장관의 사위가 될 사내, 인도네시아 국민요정의 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 그리고 너희들을 때려눕히고 찰리를 구할 무투파 선원. 그게 바로 나다.”
+
<보너스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위기에 처한 찰리를 구출하세요.”
세부 퀘스트 : 찰리 구출
클리어 조건 : 찰리의 무사 귀환
제한시간 : 싱가폴 출항 전까지
보상 : 명성 + 5, 찰리의 충섬심, 글로벌 인맥 획득
실패시 : ???
+
그냥 미친놈이군
- 싱가폴 겔랑 모처 폐허로 보이는 창고
“그냥 미친놈이군.”
내 자기 소개를 들은 검은 정장의 사내가 나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실로 간단한 평가였지만 사실 나에 대한 정확한 평가이기도 했다.
나도 내가 하고 있는 짓이 미친짓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으니까.
길고 긴 내 자기소개를 한단어로 요약한 검은 정장의 사내는 이들 중 우두머리로 보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뒤에 서 있는 수하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미친놈이 나타났구나. 빨리 처리해라!”
“예!”
우두머리 뒤에 서있던 사내 둘이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빠르게 우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나와 이등항해사 김호영을 힐끔 쳐다보더니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 중 비교적 체구가 작은 사내가 나에게로 달려오고, 나머지 한명이 이항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오호! 체급별로 붙어보자고?’
의외로 정정당당한 놈들.
각자 체급에 맞춰서 상대를 정한 것으로 보였다.
내 상대는 체격은 작아도 빠르고 날랜 스타일.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사내가 빠르게 내 턱을 노리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주먹은 어느새 내 얼굴을 바로 앞까지 다가왔지만 마치 나는 이 상황이 스로우 모션 처럼 천천히 느껴졌다.
전생에도 나는 제법 신체능력은 제법 뛰어난 편이었지만 현생에서는 이상할 만큼 몸이 가벼웠다.
동체시력도 좋아진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주먹과의 거리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저 머리를 왼쪽으로 살짝 숙이는 방법으로 그의 주먹을 손쉽게 피해냈다.
휙!
그의 주먹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새끼 당황했냐?’
내가 생각보다 쉽게 자신의 공격을 피해내자 상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선원이 범죄 조직원의 주먹을 이렇게 쉽게 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쩔래?
내 특기는 손이 아니고 발인데?
그 찰나의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몸을 왼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발차기를 하기 위해 축이 되는 왼발을 살짝 비틀었다.
그리고 내 오른발이 전광석화와 같이 빠르게 올라왔다.
순식간에 날아든 내 오른발이 자신의 머리를 향하자 검은 정장의 사내는 황급히 팔을 들어 올렸다.
안면으로 들어오는 발차기를 막기 위해 두 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린 것이다.
‘한 숨 푹 자라!’
앞차기를 하는 것처럼 시작된 내 발차기는 어깨 높이를 지나면서 부터 기묘한 각도로 움직이더니 마치 채찍처럼 휘어졌다.
그리고 안면을 막고 있는 그의 팔을 피해 뒤통수를 정확하게 후려갈겼다.
퍽!
쿵!
강력한 내 필살기 고무고무킥에 뒤통수를 허용한 검은 정장의 사내는 단 한방의 킥에 속절없이 쓰러져 내렸다.
뒤통수를 가격당한 사내는 그대로 정신을 혼절한 듯 그의 몸은 일직선 상태에서 90도로 바닥으로 그대로 낙하했다.
사각에서 내 브라질리언킥이 날아들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겠지.
‘바로 이거지.’
급식시절 부산 영도 일대를 피바다로 수놓았던 공포의 발차기이자 나의 필살기였다.
탁탁탁!
나는 간만에 발휘된 필사기에 만족한 표정으로 발을 들어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이런 싸움은 나한테 식후 체조도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허세를 떨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어서 창고 건물 전체를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쿵!
“컥!”
단발성을 내지른 검은 정장의 사내는 개거품을 물고 혼절한 상태도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이등항해사는 소싯적 유도 선수의 꿈을 가졌던 사내답게 자신을 향해 달려든 검은 정장의 사내를 그대로 들어 올려 한판 엎어치기 승리를 거두었다.
창고 바닥에는 검은 정장의 사내 둘이 시체 마냥 죽은 듯이 정신을 잃고 드러누웠다.
콘크리트바닥에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아니면 뇌진탕이라도 입은 것인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
‘범죄조직원이라서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별거 없네? 괜히 겁을 먹었구나.’
이놈들이 삼합회 놈들이 맞나?
악명이 자자한 범죄 조직인 삼합회의 조직원이라고 보기에는 살짝 허접해 보였다.
예상 밖 손쉬운 승리.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섰다. 무릎을 꿇고 있는 찰리 앞에는 이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한가락 하는 놈이겠지. 그래도 우두머리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그는 긴장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뭐하는 놈들이냐?”
“나는 비너스호의 삼등항해사다.”
“…….”
“해신해운의 천재항해…….”
“헛소리는 집어치워!”
‘이 새끼가 그래도 자기소개는 마칠 수 있게 해 줘야지!’
검은 정장의 사내는 버럭 소리를 질러 내 자기소개를 끊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