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200)

작업자들을 둘러보며 묻자 인상이 제법 험상궂은 사내가 뒷짐을 지고 바라보다 앞으로 나타났다.

나는 그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느 회사에서 오셨습니까?”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본선의 항해사가 어느 회사에서 기름을 넣는지도 물어보면 안 됩니까?”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험상궂은 사내는 삼등항해사에 불과한 나를 애써 무시하려는 듯 한 표정이었으나 내가 도발적으로 질문하자 오히려 당황한 표정이었다.

“저희는 AP(Arab Petroleum)사에서 왔습니다.”

“AP요? 그런데 왜 작업복이 다릅니까?”

“저희는 작업을 위탁받은 싱가폴 현지의 업체 소속입니다. 제품은 AP에서 제공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요?”

내가 눈을 흘기며 쳐다보자 작업자는 뭔가 켕기는 눈빛인 듯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최근에 싱가폴에서 급유하는 선박유를 사용하다가 배 엔진이 말펑션(Malfunction: 고장)나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험상궂은 사내는 내말에 모르는 척 반문했다.

“금시초문이신가?”

“네, 저희는 AP 제품만 공급하니까요. 세계적인 회사의 제품인데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그렇겠죠? 음, 문제되는 곳은 다른 업체들이겠지요? AP가 아니고?”

“그, 그렇겠지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작업자는 손을 격하게 내저으며 황급히 대답했다

간혹 급유 업체들이 저품질의 벙커를 납품하는 방법으로 폭리를 취하려고 하는 비양심적인 영업을 하는 놈들이 있었다.

그것은 해운선진국이라고 불리는 싱가폴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법은 다양했지만 선박에 공급되는 연료유의 샘플을 추출하는 것을 피해 벙커를 바꿔치기 하는 것이 대표적인 수법이었다.

품질이 낮은 벙커를 납품한다고 해서 바로 선박의 엔진이 고장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의 범죄 행각은 장기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선박회사에서도 이런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노력은 하고 있다.

벙커의 품질 분쟁을 대비해서 선박회사는 선박유 샘플을 장기간 보관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관 기간에는 한계가 있고, 선박의 엔진은 장기간 누적된 데미지로 인해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이미 엔진에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는 급유업체를 상대로 제대로 된 책임을 묻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들을 참교육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바로 현행범으로 적발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을지도 몰랐다.

나는 책임자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작업은 얼마나 진행됐습니까?

“이제 거의 다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샘플링은 했습니까?”

“네, 이제 마지막 샘플링만 하면 됩니다.”

“그럼 지금 주입하는 기름 중단하고 바로 샘플링 좀 추가로 더 하지요.”

“네?”

책임자라는 놈은 상당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딱 걸렸어.’

범인은 명탐정 놀이에 심취해 있는 나의 눈을 벗어날 수 없는 법.

“확인해볼 것이 있어서 그러니 추가로 샘플링 좀 하겠습니다.”

“어, 그, 그게. 조금만 더 급유하면 어차피 다 마무리 됩니다. 그때 어차피 샘플링을 해야 하니 지금 말고 그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나는 그런 개소리는 귀담아 듣지 않기로 했다.

뒤를 돌아 기관부원들에게 말했다.

“추가 샘플링 하나 합시다.”

“네? 지금요?”

“네, 본사에서 벙커 클레임을 대비해서 추가 샘플링을 임의로 시행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사실 본사에서 그런 지시를 한 사실이 없었지만 나는 그냥 나오는 대로 떠들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급유를 중단하고 지금 주입되는 선박유를 그대로 샘플링 하십시오.”

내가 눈앞에 있는 기관부원에게 지시를 내렸음에도 기관부원들은 우물쭈물할 뿐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삼항사님! 이러시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눈치를 보던 급유업체의 책임자가 앞으로 나서며 항의하기 시작했다.

‘켕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나는 그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좌우로 굴러갔다.

그때 사람들 사이로 기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항사, 무슨 일인가?”

“아, 기관장님!”

내가 김현호 기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급유하는 벙커들을 추가로 좀 샘플링 해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추가 샘플링을?”

“제가 삼항사라 그런지 사람들이 협조를 잘 안하네요. 하하하.”

“삼등항해사도 엄연히 사관인데 그래선 안 되지. 그런데 어차피 샘플링은 절차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닌가?”

“네, 이번에는 평소에 하는 방법 말고 방법을 바꿔서 샘플링을 해볼까 해서요.”

“음, 다른 방법?”

“매번 같은 방법으로 해서는 뭐 확인이 되겠습니까? 지금 급유를 중단시켜서 급유하고 있는 선박유를 그대로 우리가 직접 추출해서 샘플을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네, 샘플링을 하는 지점을 피해서 저질의 벙커를 선박으로 공급하는 방법은 사실 무궁무진 하지 않습니까?”

내말을 듣고 기관장은 순간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관장도 삼등항해사로 경험이 적은 내가 이런 사항까지 고려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싱가폴에서 해신해운이 오래 거래한 곳이네 굳이 그렇게 까지 해야겠는가?”

“AP랑 오래 한 것이지 이 업체랑 오래 거래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최근 벙커클레임이 많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기관장님, 만에 하나라도 선박유 품질의 문제로 선박에서 엔진에 고장이 발생하면 후에 이를 대처할 방법이 없질 않습니까?”

“음, 뭐…… 일부 부품을 교환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예상하기 힘드니.”

“네, 특히 싱가폴을 지나서 문제가 생기면 엔진 부품을 수급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기관장은 고개를 갸웃 하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해신해운과 오랜 거래 관계를 맺고 있는 중동의 정유회사인 에이피(Arab Petroleum)는 최근 싱가폴의 현지 협력업체를 변경했다.

문제는 전생의 기억에 따르면, 대금 압박에 시달린 현지 급유 업체가 면세유인 선박유를 빼돌려 시장에 유통하고 저질의 선박유를 선박에 공급하는 일이 가까운 미래에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품질이 좋지 않은 선박유라 하더라도 선박 엔진에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범죄행각은 들키지 않은 채로 상당기간 지속되는 것도 문제.

이후 관련자들이 싱가폴 당국에 의해 적발되는데, 그때는 이미 해신해운을 비롯한 많은 해운 회사들의 선박이 엔진은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후의 일이었다.

기관장은 이러한 사실을 알 길이 없었지만 최근 내가 벌인 일련의 소동 때문인지 나에 대한 신뢰가 제법 생긴 듯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기관부원들을 둘러보며 샘플링을 지시했다.

‘그래도 기관장님이 지시하니까 하긴 하는구나.’

내가 지시했을 때는 미적거리던 자들도 기관장이 직접 지시하자 이를 미룰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 어디 한번 이놈들을 제대로 낚아 볼까?’

나는 잠재적 범죄자들을 바라보며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범인은 이 배안에 있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 선박 “M.V. 비너스호”의 갑판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면서 무전기를 들었다.

브릿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당직사관을 호출했다.

“브릿지, 삼항사입니다.”

“삼항사, 이항사다.”

“네, 선박대리점 사람들 선교에 올라왔습니까?”

“그래, 같이 있다.”

“대리점에 연락해서 P&I(선주상호보험회사)를 코레스펀던트(correspondent, 보험사와 계약이 체결된 현지의 대리 업체)를 불러 달라고 하십시오.”

“음, P&I는 왜?”

“벙커 샘플 테스트를 할 수 있는 랩(연구소)을 찾아서 바로 샘플 테스트를 실시하려고요.”

“뭐? 무슨 일인데?”

“도둑이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어디에?”

“범인은 뭐, 항상 내부에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뭐? 아무튼 일단 알았어!”

나는 교신을 마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

나는 급유 작업자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눈빛은 셜록 홈즈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아니 김전일인가? 범인은 이 안에 있다.

* * *

- 선박 비너스호 연료유 샘플 보관 선실

일과를 마친 이후.

‘아,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되나......’

나는 연료유 샘플을 보관하는 선실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범인이 움직이려면 오늘 밤 밖에 시간이 없다.’

내일 아침이면 보험회사인 P&I Club(선주상호보험회사)의 대리인들이 와서 선박 벙커의 샘플을 수거해 가기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범인들이 연료유 샘플을 바꿔치기 하기 위해서는 지금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오늘도 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암중에서 묵묵히 해야 한다는 점.

마치 어둠에서 활동하는 히어로와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선박을 운항하다보면 각종 사건 사고에 휘말릴 수 밖에 없는데,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법으로 선박은 일종의 배상책임 보험에 가입할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러한 보험 중 가장 대표적인 보험이 선주상호보험이라고 불리는 P&I 보험이다.

P&I (Protect & Indemnity) 보험은 우리나라에서는 선주상호보험이라고 부르는데, 선박회사가 운항하는 선박이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경우 그 손해배상책임을 담보하는 내용의 보험이다.

우리나라에도 Korea P&I와 한국해운조합 같은 회사들이 있지만, 세계적으로 P&I 보험시장은 약 10여개가 넘는 대형 P&I Club들이 주도하는 시장이었다. 이러한 대형 P&I Club을 IG 클럽이라고 불렀다.

해신해운이 비너스호를 가입시킨 P&I 클럽도 IG 클럽에 속해 있는 대형 보험회사였기 때문에 싱가폴에서도 즉각적인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본사의 법무팀을 통해 보험사와 협의를 진행했는데, 본선에서 법무팀으로 직접 이런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본사 법무팀 사람들은 매우 의아해 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법무팀 입장에서도 비너스호의 선원들이 최근 여러 사건 사고에서 제법 큰 활약을 벌이고 있는 터라 베테랑 선장인 이희영 선장이 직접 요청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해운회사에서는 어느 경우에서든지 본선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선장의 판단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 고생을 알아주지 않는데 휴식을 취해야할 시간에 니민 이런 개고생이라니?

외로운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는 나는 순간 허무한 감정이 몰려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선실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대기하고 있다 보니 그런 잡생각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근의 소동으로 인해 제법 큰 성과를 보고 있는 터라 이제 와서 멈출 수는 없었다.

‘삼항사가 인도네시아의 유력한 정치인과도 인맥을 만들다니…….’

전생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다 대사관 영사, 본사의 핵심인재인 도형준 상무 그리고 외국 선사의 승무원들과도 교류를 쌓았다.

현실은 비좁은 선실에 처박혀 있는 신세였지만 지난 며칠간 이룬 성과에 나는 새삼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구석에 쭈그리고 있으니 복잡한 심정이 몰려온 것이다.

범인을 현장에서 검거하기 위해 비좁은 구석에 몸을 구겨 넣은 상태이다 보니 팔과 다리가 저려왔다.

‘조금만 더 참아야지.’

근무시간을 마치고 이곳에 잠입하기에는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었기 때문에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 분명했다.

범인은 범죄 현장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법이 없질 않은가?

최소한 영화 속에는 항상 그랬다…….

그 순간 내 귀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고요한 선실 주변으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딸칵.

그리고 검은 그림자가 내가 숨어 있는 선실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역시 너였구나!’

나는 어둠속에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선실로 들어선 검은 그림자는 나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오늘 내가 난동으로 부려 채취한 바로 선박유 샘플로 다가서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가 연료유에 손을 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

나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Freeze(동작 그만)! 움직이면 쏜다!”

나는 미국 드라마속 한 장면을 오마주했다.

검은 그림자는 나의 외침에 깜짝 놀라 손을 번쩍 들었다.

딸칵!

소리에 검은 그림자가 놀라 어깨를 움찔 거렸다.

‘새끼, 쫄기는!’

딸칵 소리는 내가 들고 있던 랜턴 소리였다.

랜턴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환하게 선실을 밝혔다.

나는 미국 드라마에서 본 경찰들의 경고 장면을 흉내 내며 서서히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깜짝 놀란 기색.

그는 내가 외친대로 얼음이 되어 버렸다. 검은 그림자는 손을 들어 올려 빛을 가렸다.

내가 누군지 확인하고 싶어 했지만 빛 때문에 내 얼굴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표정.

하지만 반대로 나는 그의 정체를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은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의 이름을 외쳤다.

“찰리!”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바로 그 갑판부원 찰리였다.

나는 사실 선박 연료유 샘플링을 마친 후 급유회사의 직원 뒤를 몰래 밟았다.

그가 선내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자가 누군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 예상대로 그는 찰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에 배를 하선하는 것이 포착됐다.

누가 이 일의 최고 윗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찰리가 어떤 경위로든 이 일에 개입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나도 진작 예상했던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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