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00)

내가 들어서자 내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시비를 거는 사내가 있었다.

씨오라인은 중국회사인데 그 사내는 한국말을 사용하네?

어라, 그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많이 익은 사내였다.

‘정지형?’

이자는 전생에서 알던 사내였다. 지금은 훨씬 젊은 모습이지만.

전생에서 사사건건 우리 해신해운을 방해했던 씨오라인의 영업담당 팀장이자, 아주 얍삽한 영업방법을 구사해 우리 고객을 많이 빼내간 자였기 때문에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이때는 이 사람이 선원으로 승선하고 있었을 때구나!’

전생에서는 육상 근무를 하던 중에 알게 되었을 뿐 이때는 아직 인연이 없었다.

정지형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며 물었다.

“해대? 나도 해대 출신인데, 그런데 몇 기?”

이 사람은 해양대학교 출신으로 나보다 선배였다.

물론 같이 학교 생활을 한 적이 없어 나를 알지 못했지만 삼등항해사인 내가 당연히 자신의 후배일 것이라고 짐작한 것이다.

해양대학교는 군대도 아닌데 선후배간의 똥군기를 잡으려는 못난 놈들이 있었다.

이자도 처음 만난 상대인 나를 두고 기수부심을 부려 나를 밑으로 깔아뭉개려는 속셈이 빤하게 보이는 개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해신해운의 삼항사 장보고입니다.”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그러니까 몇 기냐고?”

“저는 삼항사 자격으로 왔으니 그것까지 아실 필요는 없겠군요.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하, 이 새끼 진짜 건방지네.”

정지형은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지지 않고 시선을 마주 보았다.

“하, 싸가지 없는 새끼. 뭐 됐고. 치료비나 내놔.”

“치료비요?”

“그래, 너네 선원이 우리 선원을 폭행해서 지금 제대로 걷지 못하니까 손해배상을 해야지.”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조셉을 쳐다보았다.

“써(Sir) 거짓말이에요. 찰리가 싸우기 싫다고 배로 돌아가겠다고 비켜달라고 한 것뿐인데 혼자 넘어지더니 돈을 내놓으라고! 사기꾼들!”

하. 이 새끼들이 어디서 쌍팔년도에도 통하지 않을 수법을.

사실 나는 정지형이 이런 비겁한 짓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저놈은 그냥 저런 놈이었다.

전생에서 악연이더라도 갱생이 되는 놈들이 있고 안 되는 놈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저놈은 전자에 속한 놈이 분명했다.

“뭐 됐고요. 별일 아닌 것 같으니 저희는 가겠습니다.”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선박으로 돌아갑시다.”

내가 선원들과 함께 움직이려고 하자 정지형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길을 막았다.

“어이, 그건 안 되지. 오늘 쫌 설쳤다고 하더니 눈에 보이는 게 없네?”

“뭐라고요?”

“해신해운에서는 삼항사들을 이렇게 교육시키나?”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무슨 소리긴 뭐가 무슨 소리야. 삼항사가 이렇게 주제를 모르고 나서는걸 보니 해운명가라던 해신해운도 갈 데까지 갔나보네. 쯧쯧”

‘하, 이 새끼가 진짜 선 넘네.’

“오늘 해신해운이 제법 사람들 구했다고 떠들더니 그것도 다 운빨 아니야?”

이런 쌍놈의 새끼. 이 정도까지 왔으면 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새끼는 주먹도 아깝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이었지만 우선 말로 기를 확 꺾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 말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군요. 운 빨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립니까?”

“흥! 실력도 개뿔 없는 삼항사 따위가 사람들을 그렇게 구했다니. 그게 운 빨이지!”

“그래요? 그럼 그런 운빨 밖에 없는 놈한테 구조된 사람들은 뭡니까?”

“뭐긴 뭐야 허접한 놈들이지. 크크크.”

정지형이 실소를 흘리지 그 뒤에는 따라서 웃는 정신 나간 놈들도 몇 있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조셉,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영어로 통역해.”

“네? 예, 써!”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은 해신해운에 구조된 선원들이 ‘허접한 선원’이었다 그런 말이죠?”

내가 큰소리로 외치자 조셉이 덩달아 영어로 말을 옮기며 크게 소리쳤다.

그는 내가 하지도 않은 삿대질을 정치형에게 하며 실감나게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제, 제법인데?’

조셉의 연기는 제법 실감났다.

정치형은 조셉과 내가 클럽 전체가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오늘 쓰나미에 피해를 입은 선박의 선원들은 다 실력이 없는 그런 쓰레기라는 말이잖아요.”

“뭐? 쓰레기? 뭐 그렇게 까지......”

“아니, 좀 전에 그랬잖아요. 실력도 개뿔 없는 삼항사가 왜 설치고 무슨 사람을 구하냐고요!”

“......”

“그러니까 실력도 없는 그런 쓰레기들이니 제가 그런 쓰레기들을 구하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라는 그런 말이잖아요!”

“쓰레기?......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

“드르륵!”

그때 클럽 내부에서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가 들렸다.

“쾅!”

곁에서 맥주를 조용히 마시던 금발의 사내가 들고 있던 술잔을 탁자에 그대로 내리 꽂았다.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그는 말 그대로 탁자에 ‘술잔을 꽂아버렸다’.

그가 꽂아버린 술잔은 특이하게도 뿔로 된 ‘뿔잔’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금발 선원의 팔뚝은 힘줄이 꿈틀 거리고 있었다.

그는 민소매를 입고 있었다.

한쪽 팔뚝에는 'Denmark(덴마크)‘. 그리고 반대쪽에는 ’VIKING(바이킹)’ 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바다의 어벤져스

- 씨맨스클럽(Seaman's club)

금발의 사내가 탁자위로 꽂아버린 뿔잔의 모양은 마치 바이킹들의 투구에 달린 그런 거대한 뿔과 같은 모양이었다.

뭐야? 무슨 뿔잔을 들고 다녀?

그는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맨스크(Mansk) 선박에 승선하는 일항사요. 오늘 해신해운선박이 사람들을 많이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특히 씨맨쉽 이야기에 나도 같은 선원으로 오랜만에 크게 감동했소.”

씨맨쉽은 일항사가 한 말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도 그냥 내가 한말로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맨스크는 덴마크 선사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단을 운용하고 있는 세계 일위의 대형 선박회사였다.

‘허허허, 바이킹의 후예가 나타났네.’

키가 190cm 도 넘어 보이는 거구, 바이킹 투구를 뿔잔으로 쓰는 사내이자 바이킹 후예들 세명이 내 뒤를 지키고 섰다.

나에게는 새삼 든든한 원군이 생긴 것이다.

“하하하!”

갑자기 클럽안에 호탕한 웃음소리가 울러퍼졌다.

“이런! 우리가 기회를 봐서 나서려고 했는데 선수를 놓쳤군.”

갑자기 큰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탄탄한 체격의 금발 사내 3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우리는 에이치엘라인(HL LINE)의 항해사들이오.”

그들은 나에게 다가오더니 갑자기 나를 덥썩 끌어안았다.

뭐, 뭐야?

“하하하. 오늘 해신해운 선박에 구조된 ‘허접한’ 놈들이 바로 우리요.”

아! 이들은 오늘 우리 선박에 구조된 이들이구나.

이 미친놈들은 술에 환장했나?

구조된 날에 병원을 안가고 여기서 술을 처마시고 있네?

아! 제대로 맥주에 미친놈들이 분명했다.

그렇다. 에이치엘라인은 독일의 대표적인 국적선사로 이들은 독일인이었다.

‘허허허, 이것 참 게르만 전사들도 다국적 연합군에 합류해버렸네.’

게르만 전사들이 바이킹 후예들 옆으로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정면을 응시했다.

정지형의 얼굴이 딱닥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도 있소.”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갈색 머리의 푸른 눈을 가진 사내 3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그들은 키는 바이킹의 후예들 보다 작았지만 날렵한 체구에 탄탄한 몸매의 사내들이었다.

뭐야 이건 또.

“우리는 오늘부터 허접한 선원으로 소문난 놈들이오. 그래도 뱃사람이라 싸움은 쫌 하니 주먹 맛도 허접한지 한번 보여드리고 싶소.”

‘아! 이 사람들도 우리 배에 돈 한 푼 안내고 탑승했던 승객들인가 보네.’

“우리는 씨엠엠(CMM) 소속의 항해사들이오. 삼항사가 사람들을 구하러 가자고 선장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소. 정말 고맙소. 우리는 구명정으로 대피한 상태였는데 덕분에 안전하게 항구로 올 수 있었소.”

아! 이들은 프랑스 선사의 선원들이구나.

‘이런? 바이킹의 후예, 게르만 전사도 모자라 이제 갈리아족의 후예들도 합류해버렸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정지형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들이 없어도 부산 영도의 고무고무킥으로 불리던 내가 나서면 정지형은 정도는 간단하게 정리될 일이었다.

저쪽이 다수라고 해도 이항사와 나 그리고 제법 힘좀 쓰게 생긴 찰 리가 있으면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굳이 이곳에서 이런 놈들과 드잡이 질을 할 이유도 없었다.

평화를 지키는 방법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고, 강한 국방력이 있으면 전쟁도 억제되는 법.

정지형은 작금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구렸다.

정신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우리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놈들은 로마군대도 제대로 정복하지 못한 그런 놈들이라고!

나는 내 뒤를 지키고 있는 용맹한 사내들의 선조를 떠올렸다.

“어쩌실 겁니까? 주사위를 던질겁니까?‘

“......”

신나게 입을 털어대던 정지형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흠흠......”

새끼가 나오지도 않는 헛기침을 하네?

정지형도 나의 뒤에서 위대한 선조의 후예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을 상대할 자신은 없었던 모양이다.

“뭐,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있겠소?”

정지형은 슬그머니 돌아서더니 꽁무니를 빼기로 결심했다.

이 새끼는 자기들 숫자가 많을 때는 자신감이 넘치더니

뱃놈이 이리 배포가 작아서야!

그리고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허락을 받아야지.

나는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정지형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경직된 표정이 역력했다.

“선배님 가시게요?”

“어, 그래 후배님. 가야지. 밤도 늦었고. 내일 출항도 일찍해야 돼서.”

“선배님, 가시더라도 학교 후배들을 이향만리에서 만났는데 갈 때 가더라도 술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요?”

“어? 그, 그래. 그렇지.”

“친구들도 같이 마셔도 되죠?”

“그, 그래 물론이지.”

나는 주변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정지형의 손을 잡고 번쩍 들어올렸다.

“여기 계신 선배님께서 오늘 저와 제 친구들이 무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술 한 잔씩 돌린답니다!”

“와아아!”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탁자를 쿵쿵 두드리기 시작했다.

“제 친구 분들께도 한잔씩 대접한다고 하시니 저를 친구로 생각하시는 분들은 모두 잔을 높이 들어주십시오!”

“와아아!”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잔을 높이 들었다.

“뱃사람들은 다 친구 아닙니까!”

통역을 이어가던 조셉이 손뼉을 치며 씨맨쉽을 외치자 사람들이 다들 탁자를 두들기며 따라서 외쳤다.

“씨맨쉽! 씨맨쉽!”

“주인장! 골든벨을 갖다 주시요! 오늘 여기 이분이 골든벨을 울리신답니다.”

“와아아!”

클럽 주인도 싸움이 날까봐 전전긍긍하다 좋은 소식이 들리자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벨이 들려있었다.

나는 골든벨을 울릴 수 있는 영광을 정지형에게 벨을 양보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그였기 때문이다.

정지형이 손에 벨을 받아 들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그런 불쌍한 표정 지어도 소용없지. 인생은 타이밍이다.’

체념한 표정.

“딸랑딸랑!”

힘 없는 벨소리가 클럽에 울려 퍼졌다. 정지형이 마지못해 벨을 들고 울린 티가 났다.

그의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맥주에 미친놈, 바이킹의 후예, 와인에 미친놈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주문을 해대기 시작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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