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00)

“음…….”

교과서적인 답변.

하지만 뭐랄까. 살짝 2프로 정도 진정성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그런 대답.

일등항해사가 나를 바라보며 이어 말했다.

“나도 초임 삼항사 시절은 그랬다. 나도 삼항사처럼 초임 삼항사로 승선했을 때 이희영 선장님과 함께 배를 탔었지.”

“오, 그래요?”

“그래, 당시에는 아직 선장으로 진급하시기 전이셨지. 일등항해사로 계실 때니까

전생에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일등항해사가 초임항해사 시절 선장님 밑에서 일을 배웠구나!

전생에는 알지 못한 이런 숨은 이야기를 들을때면 나는 마치 영화상영이 마친 후 숨어 있는 쿠키 영상을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장님과 일항사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었구나. 그런데 선장님이 일등항해사셨다고?’

내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럼, 일항사님은 초임 삼항사 시절에 선장님한테 받은 괴롭힘을 저한테 대물림 하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풉!”

이번에 마시던 위스키를 뿜어낸 사람은 선장 이희영이었다.

이희영 선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리가? 내가 일항사 때 삼항사들을 괴롭혔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표정의 선장이 일등항해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

일등항해사의 단호한 대답에 선장도 침묵했다.

저런 단호박 같은 새끼.

‘그나저나 때린 사람은 몰라도 맞은 사람은 기억한다더니 딱 맞는 말이구나.’

일등항해사가 말했다.

“그래도 삼항사 때는 배워야할게 많으니까. 서운해 하지 마. 지금 배우는 걸로 평생 먹고 사는 거니까.”

“네,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 주세요.”

이미 만렙 선원다운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나는 최대한 겸손하게 말했다.

일등항해사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든 표정이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이야기 하니 다른 이유도 솔직히 말하지.”

그래! 이제야 진짜 이유를 말할 생각인가 보네.

“나는 사실 삼항사가 승선한 첫날부터 마음에 안들었다.”

“네? 제가 첫날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잘생겼잖아.”

“네?””생긴 게 너무 잘생겼잖아! 짜증나게!”

“…….”

뭐야? 진짜? 그런 이유라고?

‘전생에서 승선한 기간 동안 나를 달달 볶은 이유가 고작 저런 것 때문이라고?’

나는 일등항해사를 바라보았다.

삼등항해사들 사이에서 악명 높은 곰치 일등항해사의 다소 안타까운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뭐...... 수긍이 되긴 하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일등항해사가 위스키를 한잔 들이마시더니 용기를 낸 듯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선장님, 저도 하나 여쭤봐도 됩니까?”

“음? 그, 그래 일항사 뭔가?”

“제가 삼항사 시절에 선장님도 그렇게 엄격하셨잖아요. 제가 삼항사 괴롭힌 거랑 솔직히 같은 이유 아닙니까?”

“음, 솔직히 말해도 되나?”

“네.”

“그건…… 아닌데?”

일등항해사는 예상한 답변인 듯 위스키잔을 채우더니 원샷으로 술잔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래 그럴 땐 술을 마셔야지.

인생이 그렇게 쓰다. 현실은 더하고.

그나저나 알고 보니 별것도 아니었네.

“허허허.”

황당한 결말에 나도 모르게 또 다시 늙은 영감처럼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사람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선장실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선장님!”

누군가 선장실 문을 열고 갑자기 들이닥쳤다.

“조셉?”

“네, 선장님.”

“무슨 일인가? 하선했던 거 아니었어?”

“큰일 났어요!”

“조셉, 그래 무슨 일이야?”

“밖에서 선원들끼리 싸움 났어요!”

그리고 여지없이.

< 띠링! >

+

<보너스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위기에 처한 비너스호의 선원들을 구출하세요.”

세부 퀘스트 : 선원 구출

클리어 조건 : 위험에 처한 비너스호 선원들의 무사 귀환

제한시간 : 하선 휴가 종료시까지

보상 : 명성 + 5, 외국인 선원들의 충성심, 글로벌 인맥 획득, 씨맨쉽 능력치 상승

실패시 : ???

+

씨맨스클럽(Seaman's club)

- 비너스호 선장실

조셉이 다급하게 외쳤다.

“싸움났다니까요! 빨리 와보셔야 해요!”

“뭐? 싸움?”

“네, 클럽에서 술 마시던 중에 다른 선박의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어요!”

조셉의 말을 들은 일등항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선장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일등항해사가 빠르게 나서려고 하자 내가 재빨리 문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문 앞을 막아 일등항해사가 나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일항사님, 술도 많이 드셨는데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삼항사가?”

“네, 잘생긴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같이 가지.”

“아닙니다. 일항사님은 쉬세요. 이런 일은 저와 이항사가 가는 게 맞습니다.”

“뭐?”

“일항사님은 지능형 캐릭터 아닙니까?”

“무슨 소리야?”

“일항사님은 해신해운 항해사들이 인정하는 엘리트 선원 아닙니까.”

“삼항사, 도대체 무슨 헛소리야!”

일등항해사는 실제로 지능형 캐릭터가 맞다. 대학교 항해과도 수석으로 입학했고 졸업도 수석으로 한 성실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는 일이 잘 안 풀려 승진도 누락되고 다른 회사로 도망갔지만 왠지 이번 현생은 그의 미래도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몰려왔다.

물론 그것도 내 덕이겠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이등항해사를 바라보았다.

이등항해사는 학교 다닐 때도 성격 좋은 호인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등항해사와 나는 학교에서도 성적이 특별하지 않았고, 솔직히 승선생활에서도 엘리트 선원이라고 불리기에는 살짝 부족한 점이 있다.

물론 전생에서 그랬다는 말이다. 이번 생애는 다르겠지만.

나는 일등항해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몸 쓰는 일은 우리 무투파 선원들에게 맡겨 주시죠.”

“무투파?”

“네.”

나는 고개를 돌려 이등항해사를 바라보았다.

“호영이형, 우리가 대학에서 태권도부 출신으로 유도 및 각종 무술을 익힌 고단자라는 사실을 일항사님께 알려드렸던가요?”

내말에 김호영 이등항해사가 웃으며 내 뒤로 다가왔다.

“일항사님, 사실입니다.”

“허허허.”

그 말에 선장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등항해사에게 말했다.

“이항사, 그럼 이항사가 삼항사와 함께 다녀오게”

“네, 선장님, 걱정마십시오.”

“삼항사가 사고치지 않게 잘 살피고.”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고 싸움을 말리러 가는게 아닙니까? 뭐 별일 있겠습니까?”

‘그건 가봐야 아는 일이고!’

나는 흥미로운 이벤트에 신이나 표정으로 이등항해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도 예전 대학시절처럼 반짝 빛나고 있었다.

왕년에 부산 영도의 고무고무킥이라고 불린 내가 오랜만에 전의를 불태웠다.

* * *

- 씨맨스클럽

우리는 선내에서는 누구보다 빠른 사내 조셉을 필두로 빠르게 달려갔다.

쾅!

카리스마 있는 등장을 위해 나는 클럽의 문을 벌컥 열어 재꼈다. 위풍당당한 걸음도 잊지 않았다.

제법 건장한 체격의 나와 이등항해사가 시끄럽게 등장하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어, 저 사람들도 여기 있네.’

낯익은 얼굴도 몇 보였다. 우리 선박에서 구조된 선원들이 내 눈에 띤 것이다.

내가 등장한 것을 보고 해신해운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들은 클럽 중앙에서 약 20명 정도 되는 인원들과 대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보자. 우리는 10명 정도. 여기에 나랑, 이항사, 조셉을 포함하면 13명 정도인가.’

숫자는 열세군.

“보고야 쫄았냐?”

내가 살짝 긴장하는 표정을 짓자 이등항해사가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형, 무슨 소리예요. 잊었어요?”

“뭐를?”

“영도의 고무고무킥!”

나도 도둑질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도리어 크게 소리쳤다.

여차하면 나는 내 주특기인 브라질리언 킥을 선보일 참이었다. 사각에서 들어오는 킥이 고무처럼 늘어져 보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내가 해적왕이 될 사나이다. 이 새끼들아!’

나를 중앙으로, 외쪽에는 이등항해사 그리고 오른쪽에는 한때는 나의 든든한 충신이었던 조셉이 자리했다.

제법 한 덩치하는 이등항해사가 오늘 따라 든든해보였다.

이등항해사는 거구의 사내로 어릴 적 유도선수를 할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을 정도라고 하니 어지간한 곳에서도 꿀리지 않는 체격의 소유자였다.

성품이 온순해서 일등항해사한테 항상 당하고 살았지만 화가 나면 정말 무서운 사내이기도 했다.

나도 키는 제법 크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마른 체격이었기 때문에 이등항해사 같은 위압감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좀 부족했다.

“아, 삼항사가 왔구려.”

내가 등장한 것을 보고 갑판장이 다가왔다.

“갑판장님, 무슨 일입니까?”

“씨오라인(CO LINE) 선원들과 시비거리가 생겼네.”

“씨오라인이요?”

“그래.”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씨오라인(CO LINE)은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선박회사였다.

문제는 씨오라인은 우리회사와 공동운항협약 얼라이언스를 맺고 있는 회사라는 점이다.

얼라이언스라는 말은 일종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회사라는 뜻.

얼라이언스선사들끼리는 선박의 슬롯(Slot) 즉, 컨테이너를 실을 수 있는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항공사들도 취항하지 않는 노선이나 취항하는 편수가 적은 공항의 경우 항공사들 간에 얼라이언스를 맺고 비행기의 좌석(slot)을 공유하는 제유관계를 맺고 있는데 선박회사의 경우와 다르지 않은 구조였다.

아직까지는 씨오라인(CO LINE)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전이었지만 2008년 북경 베이징 올림픽 이후로는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되는 회사였다.

“그래 무슨 일입니까?”

“오늘 있었던 일로 선원들이 좀 자랑을 많이 했나봐. 물어보는 사람들이 좀 있었거든.”

“그런데요.”

“그러자 누가 그게 못마땅했는지 딴죽을 좀 걸었나 보더군.”

“그래요? 뭐라고 했기에?”

“그게......”

“왜요? 뭔데요?”

“삼항사가 배에서 그렇게 설쳤다니 해신해운도 갈 데까지 갔다는 둥 뭐 그런 소릴 했다는 거 같아.”

“허!”

뭐라고? 해신해운이 뭐 어쨌다고?

이것들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구나.

“그래서, 그 말들을 들은 외국인 선원이 우리 삼항사 욕하는 건 못 참는다면서 들고 일어섰나 보더라고.”

오! 진짜? 그런 의리 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외국인 선원이라면 역시......나의 오른팔?”

나는 조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은 아니고, 찰리라고 하더군.”

허, 역시 기대한 내가 병신이지.

조셉을 한번 노려본 후 다시 갑판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참 의외네.

찰리하고는 그다지 교류가 없었는데, 업무 외에는.

가만히 보니 해신해운 사람들 앞으로 가장 나서 있는 사람이 찰리이기는 했다.

“알았어요. 제가 한번 가볼게요.”

상황파악을 마친 나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클럽의 중앙으로 들어섰다.

“오, 그 소문이 자자한 삼항사님이 여기까지 직접 오셨나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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