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에게 정식으로 임명된 보직에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부원이었지만 외국인 선원들은 은연중에 찰리를 리더로 생각하며 그의 말을 잘 따르고 있었다.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위계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전생에 삼항사로 근무한 나는 그런 미묘한 질서를 눈치 채지 못했다.
‘당시에는 내 코가 석자라 주변을 살필 여유가 없었지.’
하지만 만렙 항해사가 된 지금은 달랐다.
선내에서 흐르는 사람들 사이의 미묘한 기류도 나는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 선장님이나 일항사도 이미 알고 있겠지.’
외국인 선원들 사이에 수직적인 위계질서가 있다면 이들을 관리하기 쉬운 이점도 있었다.
선장이나 일항사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나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비공식적인 위계질서를 묵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단순한 위계질서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이 사건의 숨은 본질은 따로 있었다.
‘어차피 갑판부 문제를 다음 항구에서 처리할 생각이니 찰리 문제도 같이 살펴봐야겠네.’
다음 항구에서 제법 거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찰리의 다부진 체격이 떠올랐다.
‘만약 찰리가 달려들면 나는 오른쪽으로 피한 다음 바로 옆구리에다가 돌려차기를!’
생각에 빠진 나를 바라보던 조셉이 소리쳤다.
“써(Sir)! 다 묶었어요.”
조셉이 구명정과 요트를 힘들게 결속시켰다. 끈을 당겨보니 제법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조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 수고했어.”
“네!”
“그럼, 요트 위로 올라가야지!”
“네?”
“올라가서 선저를 두들겨 봐. 안에 생존자가 있으면 소리에 반응을 하겠지.”
“......”
조셉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았다.
“뭐해?”
“제가요?”
“그래”
“저 보고 올라가라고요?”
“그럼 누가하냐?”
“삼항사님이 해야죠.”
“내가?”
“네, 오피서(officer)잖아요!”
“......”
“솔선수범!”
엄지손가락 까지 척! 하고 들어 올린 조셉이었다.
“방금 전에는 나보고 개... 뭐라고 하지 않았냐?”
“제가 언제요? 써!”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한국말을 하지 않고 참았을까?
입이 터진 조셉은 한마디를 지지 않으려고 했다.
조셉과 나는 한참을 눈싸움을 벌였지만 조셉은 시선을 회피하지 않았다.
조셉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나를 가리켰다.
“오피서(Officer)! 그리고 나는 부원.”
“......”
“나 시다바리, 유 오야붕.”
“알았다! 알았다고!”
조셉의 말에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휴! 이럴줄 알았으면 갑판장이나 부갑판장을 데리고 오는 건데.’
괜히 조셉을 데려왔다는 후회가 드는 순간이었다.
나의 든든한 오른팔이었다가 한순간에 배신자로 전락한 조셉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셉, 단단히 묶었지?”
“네.”
“혹시 모르니 계속 꽉 잡고 있어!”
“알았다고요!”
“조셉......”
“네?”
“도망가면 안 된다.”
“......”
“믿는다.”
“......”
나는 조셉을 돌아보며 외쳤다. 조셉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얍! 천마군림보!”
나는 함성을 지르며 요트의 전복된 선저 위로 뛰어 올랐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올라섰지만 하마터면 미끄러져 바다로 떨어질 뻔 했다.
‘썅! 미끄러질 뻔 했네!’
선저위로 뛰어 오른 후 재빨리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물에 젖은 낙엽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다행히도 제법 큰 규모의 요트.
수면 위로 솟은 선저에도 올라탈 공간이 있었다.
선저에 귀를 댄 채로 엎드려서 네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구석구석을 살피며 기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탕!”
손에 쥔 쇠막대기를 이용해 선저 바닥을 두들겼다.
안에서 반응이 있는지 귀를 기울인 채로.
“탕!”
한참을 이어가던 중 이질적인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쿵!쿵!!”
“음?! 이건?”
“탕!”
다시 한 번 바닥을 쇠막대기로 내리쳤다.
쿵쿵!
내가 바닥을 세게 치면 안에서 두 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먹으로 선저를 두들기는 소리가 크게 들리진 않았지만 신호음이 분명했다.
“있다! 아직 살아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써, 조심! 뒤에 파도!”
“으아악! 빨리 말했어야지!”
조셉의 경고를 듣고 급하게 바닥으로 다시 엎드렸지만 이미 한차례 큰 파도가 나를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
“...... 니미! 짜증나게 하네. 진짜!”
조셉의 찰진 욕설 소리가 바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나에게 연결된 로프를 빠르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 구명정 1호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나는 물기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조셉과 구조를 위한 마라톤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치열한 격론이 벌어지고 있으니 마라톤 회의라는 말보다 핑퐁 회의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번 구조에는 별다른 계획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수중으로 들어가 아마도 생존자가 갇혀 있는 문을 열고 사람을 구조해 온다’는 심플한 계획이 전부.
하지만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조셉 네가 가라!”
“노블리스 오블리제!”
우리 둘 중에 누가 선박 안으로 들어가서 생존자를 구조할 지를 두고 치열한 논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물론 우리는 서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치열하게 다투는 중이었다.
“조셉, 내가 좀 전에 선저에 올라갔잖아. 이번에는 네가 나설 차례야.”
“써(Sir), 저는 수영 못해요.”
“......”
“수영은 못해도 상관없어. 잠수를 하면 되니까.”
“써(Sir), 저는 잠수도 못해요.”
“......”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그럼?’
선원이 수영을 못한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그의 수영실력을 확인한 적이 없기 때문에 막무가내로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항해사들은 해양대학교 재학 중 정규 수업 과정에 수영과목이 있기 때문에 모두 수영을 할 줄 안다는 것도 조셉은 잘 알고 있었다.
“어휴...... 부원이 아니라 상전을 모시고 왔네.”
“저는 조타수지 잠수부가 아니라고요.”
“아 예, 아주 변호사 다됐네요. 아주 말이 술술 나오네.”
나는 조셉을 한참 노려본 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셉 이 새끼는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새끼를 내가 살리려고 그렇게 애썼다니.’
생각해보니 조셉을 찾아서 천식용 흡입기를 준 것은 갑판장이었다.
내가 딱히 애쓴 게 없긴 하네.
‘하지만 천식을 죽을 뻔한 놈을 살려준 건 내가 아닌가?’
생각해보니 천식 환자보고 잠수해서 구해오라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했다.
배에서 가장 빠르게 뛰어다니는 놈이 천식환자라는 사실도 도무지 믿기 어려웠지만 그것도 엄연한 현실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내가 해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셉, 그러면 내가 들어갔다 올 테니 위에서 잘 지켜보고 있어.”
“네.”
“여차하면 나를 구해줘야 되니까. 알겠지?”
“예에.”
“대충 대답하지 말고 아까처럼 딴 데보고 있지 말고! 그러다가 바다에 빠졌잖아!”
“삼항사님 구해준 사람이 누군데요?”
조셉은 엄지손가락을 자신의 가슴을 향해 척 하고 뻗었다.
하, 새끼. 대답하나는 잘하네.
“허허허.”
나는 바다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수영도 못하는 천식환자를 믿고 나혼자 이 거친 바다 속으로 들어가야 지금의 상황이 다소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갔다 와서 보자.’
나는 조셉을 한차례 노려 본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다행이 바닷물이 차갑지 않았다. 다행이네.
나는 조셉을 바라보며 수신호로 OK 사인을 만들어보였다.
전생에서 해양대학을 다닐 때 스쿠버다이빙을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공기통도 없고 다른 장비도 없지만 귀동냥으로 배운 프리다이버들의 호흡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제대로 하지는 못해도 흉내는 낼 줄 알았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조셉을 노려보았다.
'내가 왕년에 부산 영도의 펠프스였다! 이놈아!“
펠프스는 수영선수니 잠수랑은 상관없나?
아무튼 나를 바라보는 조셉의 얼굴도 진지하게 변해있었다.
조셉과 시선을 마주친 후 나도 천천히 잠수를 시작했다.
수면 아래로 내려가며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I will be back!”
해난구조(4): 항해사가 나설 순간
- 선박 M.V. 비너스호의 구명정 1호
조셉이 물 위에서 내려준 하강줄을 잡고 빠르게 잠수를 시작했다.
잠수를 쉽게 하기 위해 바지 주머니 양쪽에는 작은 납덩이를 하나씩 넣어둔 상황.
수면 밖은 파도가 심하게 일었지만 의외로 수중으로 들어서자 바다 속은 이상할 만큼 고요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바다는 들어가 봐야 안다. 수면의 상황과 수중의 상황은 천차만별이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틀린말 아닌가?’
현실은 이렇게 한 길 물속도 알기 어렵다.
수면 밖의 파도가 아무리 심해도 수중은 또 다른 공간이었다.
다행이 물 속에서 시야도 제법 좋았다. 못해도 5미터 이상의 가시거리가 나오고 있었다.
‘그래도 제법 운이 따라 주는 구나.’
그리고 또 하나 다행인 점은 전복된 요트의 구조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숨을 참아가며 몇 번의 잠수를 거듭한 끝에 수중에서 선실로 들어서는 출입문을 찾을 수 있었다.
생존자는 이 선실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문제는 선박이 전복되면서 발생한 충격 때문인지 출입문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 상태라는 것,
생존자도 출입문을 열지 못해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로 선실에 계속 갇혀 있는 상황으로 추측되는 상황.
나는 출입문 틈 억지로 열어 선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