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쓰나미로 큰 피해가 발생한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장 이슈가 된 사건이 있었다. 유명 정치인의 딸이자 유명한 연예인이 요트 전복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연일 언론에 보도가 되고 있었다.
당시 차기 대통령감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도네시아의 유력한 정치인이라고 들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산업통산자원부 장관에 해당하는 거물이었다.
그런 정치인의 딸, 그것도 인기 연예인이 선박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에도 매일 같이 뉴스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기 때문에다 나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그 사고가 이슈가 된 이유는 제법 오래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트의 선원들은 구명보트를 전개한 후에 선실에 남아있던 승객을 구조하지 않은 채로 도망쳤다.
이후에 수사가 진행되고 밝혀진 사실이지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복될 당시 선실에 발생한 에어포켓으로 인해 상당기간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구조대가 조금만 일찍 출동했더라면 아마 구조에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연안에서 출발한 구조대가 쓰나미로 이어지는 파도를 뚫고 이곳 까지는 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조난된 선박을 발견하기 까지도 제법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되었고, 해안 근처에서도 사고가 많았기 때문에 이 곳 까지 구조대를 파견할 여력도 없었다.
문제는 나만 아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쥐뿔도 아는 게 없는 우리 일등항해사!
선원들의 표본이자 씨맨쉽의 화신이 성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삼항사! 지금 한시가 급해. 화물선의 선원들이 곧 바다로 뛰어들 모양새니 지체할 시간이 없어!”
“일항사님,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 저놈!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전으로 돌아가 버렸네.’
안타깝지만 내가 아는 바를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일등항해사는 나를 반쯤 미친놈으로 보고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제대로 미친놈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고집을 피우는 거야?”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트를 먼저 구하고 가야됩니다.”
“요트에는 특별한 움직임 없잖아. 사람들이 이미 대피했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저 화물선에는 20명도 넘는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고!”
“그 말도 맞습니다.”
“그럼 이유가 뭐야? 화물선의 사람들을 먼저 구하는 게 맞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짧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중요한 멘트를 하기 전이라 사람들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요트를 먼저 구해야 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뭔데?”
“우선, 화물선에 사람들은 선원들입니다.”
“누가 그걸 모르나?”
“선원들은 다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비상 상황을 대비한 훈련을 받은 상태입니다. 우리가 다소 늦게 간다고 해도 선원들은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물선을 구할 시간적 여유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지요.”
“......”
“그런데 요트는 다르지요. 사람이 남아 있다면 승객들이 타고 있을 가능성이 큰데 선원들과 같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
“그리고 요트 주변에 구명보트나 다른 선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선원들은 이미 탈출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
일등항해사의 얼굴을 힐끔 살폈지만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도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래. 그 표정이야.’
나를 그저 그런 삼항사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텐데. 어찌됐든 나는 전생에 일항사까지 마친 몸.
이희영 선장을 제외하고는 일항사도 나보다 승선경험이 짧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내 의견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했다.
화물선과 같은 상선에 승선하는 선원들은 비상상황을 대비한 대피 훈련을 익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물선에는 선원들이 탈출하기 위한 구명정이나 고무보트 같은 장비들을 비상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되어 있다.
선원들이 이런 장비를 능숙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에도 구조대가 올 때까지 충분히 버틸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요트는 이미 전복된 상태이기 때문에 만약 생존자가 있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나의 의견은 지금 요트 안에 생존한 사람이 남아 있다는 전제하에서 타당한 말이었다.
사람도 없는데 요트에서 시간을 지체한다면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허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항사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삼항사, 네 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요트에는 구조가 필요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잖아. 생존한 사람이 없을 수도 있고......”
이희영 선장도 일항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항사의 말도 맞네. 지금 파도가 제법 거센 상황이지. 화물선의 선원들이 바다로 뛰어내린 후에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고, 이들이 멀리 표류하기라도 하면 이들을 전부 구조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지.”
나도 이희영 선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이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선장님, 그럼 인원을 둘로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네, 요트를 살펴보는 데는 사람이 많이 필요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요트로 가겠습니다. 구명정 하나만 내려 주십시오.”
“뭐? 너 미쳤어?”
내 말에 일항사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건 안돼. 본선과 떨어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야.”
“구명정을 내려 주시면 타고 나가 요트를 확인한 후에 구조할 수 있으면 하고 안되면 본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컨테이너선과 같은 대형 선박의 후미 양현(선박의 양쪽 측면)에는 비상 탈출을 대비한 구명정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구조정을 사용하면 본선과 따로 구조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으으음.”
이희영 선장이 내 말에 신음성을 얕게 흘렸다.
쓰나미는 잦아들었다고 여전히 파도가 치고, 무엇보다 앞으로 여진이 있을지도 몰랐다.
구명정만으로는 안전을 담보할 수 있을지 이희영 선장도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갈등하는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선장님, 일항사 말대로 요트에 사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나도 고민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아직 단 한명이라도 지금 생존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
“눈앞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시도해보지도 않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
“뒤 늦게라도 사람이 살아 있다면 크게 후회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자 선장도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일항사가 말했다.
“삼항사, 그 말도 맞다. 하지만 쓰나미가 발생한지 시간이 제법 지났잖아."
“네, 그렇지요.”
“요트 안에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전복 된 이상 이렇게 긴 시간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솔직히 없잖아. 우리도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가장 최선의 방법을 선택할 수 밖에 없잖아.”
일항사의 말에 나도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시간을 충분합니다.”
“뭐? 전복된 상황이라니까!”
“전복된 상태를 한번 보십시오. 수면에 떠 있는 높이와 각도 상 선수 쪽으로 에어포켓이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 에어포켓!”
내 말에 선장과 일등항해사가 입을 크게 벌리더니 쌍안경을 들어올렸다.
그들은 유심히 관찰하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손을 들어 요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목소리에 힘을 주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단 한명!”
“......”
“선장님, 전복된 요트에 단 한명이라도 생존한 사람이 남아있다면! 지금 우리말고는 구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
선장이 진지한 표정을 대답했다.
“삼항사,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는 불가하다.”
혼자서는 불가하다고?
그럼 둘이면 된다는 뜻이 아닌가.
선장은 양쪽을 동시에 구한다는 내 아이디어에 동의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선장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저도 혼자 가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한명만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누구?”
“조셉만 붙여주십시오.”
“......!”
선교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이를 깨는 소리가 있었다.
“니미......”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선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돌려 조셉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키를 잡은 채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작은 목소리를 제어하는데 실패하고야 말았다.
“...... 시발......”
역시 내 예상이 맞네.
‘딱 걸렸다! 요놈.’
내 예상대로 조셉은 그 동안 우리나라 말을 잘 못 알아듣는 척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해난구조(3): I will be back
- 선박 M.V. 비너스호의 구명정 1호
“배 위에서 볼 때는 잔잔해 보였는데......”
나는 바다를 바라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명정에 타기 전까지는 쓰나미가 있었던 바다 치고는 파도가 제법 잔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비너스호에서 이 작은 구명정으로 옮겨 타고 나니 이런 격랑도 이런 격랑이 없었다.
조셉과 나는 진땀을 빼며 겨우 구명정을 전복된 요트로 접근시킬 수 있었다.
요트와 구명정을 결속시키기 위해 구명정 위로 올라간 조셉은 위태롭게 작업을 이어가는 다급한 순간에도 입을 놀리지 않았다.
“토할것 같네! 삼항사님 나빠요!”
“......”
“조셉 너 한국말 못한다더니 왜 이렇게 잘해?”
‘그동안 묵언 수행이라도 하고 있던 건가?’
묵언수행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조셉은 믿기 힘들 만큼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의 반 이상은 욕설이었다.
가장 외국어를 빠르게 배우는 방법이 욕을 배우는 것이라더니 조셉이 딱 그 경우였다.
아주 맛깔나게 욕설을 구사하는 모습은 흡사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를 보는 듯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게 삼항사‘님’자는 꼭 붙인다는 것이었다.
구명정을 타고 바다로 내려선 이후 조셉의 입은 한시도 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래퍼냐......’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쯤 되면 하극상 아닌가?
감히 삼등항해사님 앞에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나도 조셉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구명정에서 단둘이 있는 상황인데 눈치 없이 이곳에서 조셉을 상대로 위계질서를 세울 형편도 아니다.
하지만 조셉이 몇 개월 동안 한국어 실력을 숨긴 이유는 궁금하긴 했다.
이 선박은 파나마로 편의치적(제3국인 파나마 등에 행정, 금융 편의상 선적을 등록하는 제도)된 선박이긴 했지만 한국 국적의 회사인 해신해운이 실질적으로 소유한 선박이다.
따라서 이 배에 승선하는 외국인 선원이 한국말을 잘하면 해가 되는 경우보다는 이득이 많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굳이 이런 능력을 숨길 필요가 있을까?’
전생에서 조셉은 천식사고로 조기에 근무에서 배제됐기 때문에 나도 그와 갚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내가 조셉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조셉, 그런데 내가 생명을 구해준 일을 벌써 잊은 거야?”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나를 은인으로 모시겠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건 맞죠.”
“그런데 내가 이렇게 좀 도와달라고 했다고 이럴 수가 있나?”
“써(Sir)! 아무리 도움을 받았어도 그게 같이 죽자는 뜻은 아니었다고요.”
“죽긴 왜 죽어!"
"지금 죽기 일보 직전이죠! 우리가 있는 곳을 보세요!“
“어디긴 어디야! 구명정이지!”
엄밀히 말하면 구명정 안은 아니고 구명정 위.
조셉과 나는 구명조끼를 입은 채로 작은 구명정 위에서 매우 위태롭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안전하다고 말하기에는 좀 부끄러운 상황이긴 했다.
파도가 출렁이며 구명정의 덮쳐올 때마다 우리는 바다로 떠내려가지 않게 온 힘을 다해 난간을 부여잡고 있는 위험한 상황.
조셉이 내 말에 전혀 수긍을 하지 않는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쉬지 않고 중얼 거리고 손질을 이어갔다.
다행이네.
‘새끼, 그래도 이제는 필리핀 말로 욕 하네.’
더 이상 우리나라 말로 중얼거리지는 않았다. 영어도 아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알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정황상 내 욕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차라리 이게 낫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내가 온화한 표정으로 조셉에게 말을 건넸다.
“조셉,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네?”
“한국말을 이렇게 잘하는데 왜 그 동안 숨긴 거야?”
“......”
“혹시 찰리 때문이야?”
“......!”
조셉은 크게 놀란 표정. 눈을 똥그랗게 떴다.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그 표정이 정답을 말해주고 있었다.
찰리.
그는 필리핀 국적의 부원으로 제법 탄탄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체격이 다부지고 운동을 즐겨하는 타입의 사내.
승선경력이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찰리는 금새 이 선박에 승선한 외국인 선원들 사이에서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외국인 선원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리더가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