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선장님! 우리라고 바다에서 이런 일 안 당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뱃놈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항해사들을 바라보는 선장 이희영의 입가에는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선장은 고개를 돌렸다.
선교 한쪽 구석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기관장과 기관사들을 바라보았다. 선장과 눈이 마주치자 기관장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도 기관장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결심을 마쳤다. 그리고 주변을 보고 크게 외쳤다.
“좋다! 지금부터 우리는 조난 선박들을 구조한다!”
“와아아!”
선교의 사람들이 선장의 말에 다 같이 소리쳤다.
선장은 주변 선원들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일항사, 지금부터 비상체계로 선박을 운영하게.”
“네! 선장님.”
“당직이 아닌 부원들을 즉시 휴식을 취하고, 항해사들은 당직 부원들과 함께 구조 장비들을 즉시 점검하도록.”
“네!”
“삼항사! 예상되는 쓰나미 지속 시간이 얼마라고 했지?”
“예전에 교육 받기로는 이정도 규모의 경우 약 10시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래, 항해사들은 일항사의 지시에 따라 5시간 안에 구조 장비를 모두 꼼꼼하게 점검하게. 구명정과 구명보트를 사용해야 될 수도 있으니 구명 물품도 확인하고.”
“네! 알겠습니다.”
“기관장님, 바다가 거칠 것 같습니다. 기관부도 필요한 점검을 챙겨봐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기관장이 선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관장이 기관사들과 부원들을 불러 모아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선장이 선교를 둘러보며 말을 이어갔다.
“다른 선박을 구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선박의 안전이다.”
“네!”
“어떤 경우에도 본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구조활동에 임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에 구조를 위한 운항을 시작하겠다.”
“네!”
선장의 말이 끝나자 갑판장이 부원들을 불러 모아 지시하기 시작했다.
베테랑 부원들이 사람들을 꾸리더니 빠르게 선교를 빠져나갔다. 준비할 일이 많았다.
숙달된 이 배의 선원들을 선장이 세세하게 지시하지 않아도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이미 꿰뚫고 있었다.
선교를 가득채운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선교에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고 있었다.
아직 내 당직 시간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이곳 브릿지(선교)였다.
갑판을 내려다보니 갑판 위로 부원들이 빠르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장비를 챙기고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구조 장비와 도구들을 창고에서 꺼내 분주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뱃놈들은 뱃놈들이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꼭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뱃놈간의 의리 때문이었지만 선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내 옆으로 나의 오른팔, 나의 충신, 나의 믿을맨인 조타수 조셉이 다가왔다.
“삼항사님 짱! 써(Sir)"
조셉은 나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이번에도 치켜세웠다.
‘얘는 이 말밖에 할 줄 모르나?’
환하게 웃는 조셉을 바라보며 우리나라 말을 좀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의아한 점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눈치가 참 빠르단 말이야.’
어쩐지 나를 바라보는 조셉의 눈빛이 존경심 어린 눈빛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오늘 따라 유난히 반짝이고 있었다.
* * *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몇 시간이 흐른 후.
선박의 선교에는 선장을 비롯한 항해사들이 모두 출동해 있었다. 당직이 아니지만 근무를 자처한 상태.
선교에서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감회도 새로웠다.
전생과 달리 선박이 안전을 확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 선박은 내가 초임 항해사로 승선한 선박으로 전생에 승선했던 선박 중에도 가장 애착을 가지던 선박이기도 했다.
다시 과거로 회귀해서 이 선박을 타고 있는 기분이 새삼 묘하게 느껴졌다.
“M.V. 비너스호”가 선명(배의 이름)인 이 배는 해신해운에서 운항 중인 컨테이너선박 중 하나이다.
선명에 붙은 M.V.는 Motor Vessel의 약자로 선박의 이름을 붙일 때는 보통 여자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였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는 선박도 많았다.
M.V. 비너스호는 아시아와 유럽 사이를 운항하는 항로에 투입된 컨테이너선으로 4,800TEU급 크기의 대형 선박이었다.
일반적으로 컨테이너선박의 크기를 구분할 때 선박에 적재할 수 있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의 개수로 선박의 크기를 분류하고 있었다.
M.V. 비너스호와 같이 4,800TEU 라는 말은 대략 4,800개의 20피트 컨테이너를 적재할 수 있는 선박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이 들어서면서 해운회사간에 규모 경쟁이 매우 극심하게 벌어진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어진 해운 호황기로 인해 각국의 해운회사들이 몸집 불리기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선사들의 경쟁도 심화되자 선박회사들은 컨테이너선의 사이즈를 본격적으로 대형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해운회사들간의 치킨게임은 결국 해운업계를 파국으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곧 몇 년 지나지 않아 글로벌 선박회사들은 10,000TEU급 이상의 대형 컨테이너선을 주요 항로에 투입하게 된다.
그야 말로 세계 해운 시장의 대 격동기가 도래하게 된다.
비너스호와 같은 4,800TEU급 선박들은 90년도에 건조된 선박들로 이제 대형컨테이너선이라고 불리기에는 애매한 사이즈였지만 여전히 주요 항로에서 제 몫을 다하고 있는 든든한 선박들이다.
역전의 용사들이나 다름 없는 선박이랄까.
비너스호와 비슷한 시기에 건조된 시리즈선박들은 모두 해신해운의 여러 주요 항로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었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비너스호의 선교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내 옆으로 이희영 선장이 다가왔다.
“삼항사,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있나?”
“아! 선장님, 이번 항차가 참 다이나믹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다 누구 덕분인가? 허허허.”
선장의 말에 내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래도 다행이지? 딸내미 대학 학비는 계속 벌 수 있겠지?”
“네, 졸업하고 시집 보낼 때까지 계속 일하셔야죠.”
“나보고 늙어 죽을 때까지 배를 계속 타라는 소리군.”
선장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살짝 웃어보였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되실 겁니다. 아니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께요.
이희영 선장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이희영 선장은 대화를 마치고 선교 앞으로 걸어나갔다.
쌍안경을 들고 선교에서 함께 전방을 견시(선박 등에서 자세히 살피며 보는 것을 말함)하며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동안 혹시 모를 해난사고를 대비해 구조 준비를 마친 상태로 빠르게 항해를 시작했다.
다행이 파도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빠르게 운항할 수 있었다.
다행인 점은 컨테이너선박이 다른 선박보다 빠르다는 것이었다.
컨테이너화물을 운송하는 컨테이너선은 다른 벌크선이나 유조선 선박에 비해 제법 속력이 빠르게 나오는 편이었다.
철광석이나 곡물 같은 살화물을 나르는 선박을 벌크선이라고 하는데, 이런 벌크선박이나 유조선과 같은 탱크선의 속력은 평균 15~16노트 정도였다.
이에 반해 컨테이너선박이나 자동차운반선은 평균 24 ~ 26노트 정도의 빠른 속력을 자랑하는데 시속 44 ~ 48 킬로미터 정도 되는 빠른 속력이었다.
평소에는 기항 스케줄에 맞춰 속력을 조절했지만 우리는 바다의 상황에 맞춰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력으로 항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희영 선장을 포함한 선교의 인원들은 전방을 주의 깊게 견시하며 레이더를 통해 특별히 감지되는 것들이 없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쓰나미가 발생한 지역으로 항해를 계속하는 것이 우려스러웠지만 다행히 항해를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 레이더를 확인하던 당직사관인 이등항해사가 큰소리로 외쳤다.
“선, 선장님 멀어서 정확하게 식별은 안 되지만 전방에 뭐가 보입니다.”
이항사의 외침에 선교의 사람들이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쌍안경을 들어 올렸다. 모두 전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해난구조(2): 단 한명의 생존자라도
- 선박 M.V. 비너스호의 선교
보고를 받은 이희영 선장이 이등항해사 김호영을 바라보았다.
“이항사, 선박의 움직임은 관찰 되고 있나?”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좌초되거나 전복된 상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박 주변에 보이는 구명보트나 구명정도 없어?”
“네, 없습니다.”
일등항해사 양화종이 선교 밖으로 나가 쌍안경을 들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살펴보던 일등항해사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선장님! 요트 같습니다. 요트치고는 크기가 제법 큰 게 고급 요트 같습니다. 선저가 수면 위로 올라와 있습니다. 이미 전복된 상황으로 보입니다.”
“주변에 생존자는?”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전복됐다는 건 배가 뒤집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배 안의 사람들이 위험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요트?’
나는 요트라는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쩌면 내가 찾는 인물이 타고 있을지도 몰랐다.
선교 밖으로 나가 쌍안경을 고쳐들었다. 요트 주변으로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질 않았다.
파도가 칠 때마다 들썩이는 모양으로 보아서는 고급 요트가 분명해 보였다.
저런 고급 요트가 흔하진 않을 것이니 제법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전방을 바라보던 이희영 선장이 나직이 말했다.
“삼항사 선원들을 준비시키게 요트가 전복된 상황인 것 같군.”
“네! 선장님.”
비너스호가 요트를 향해 빠르게 나아가고 있었다.
요트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선교안에서 이등항해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선장님! 다른 구조신호입니다!”
“구조신호?”
“네, 거리가 멀어 육안으로 확실한 구분은 안 되지만 요트 뒤로 화물선이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 관찰됩니다.”
“VHF(무선교신기의 일종)는?”
“확인해 보겠습니다.”
“일항사 복원성(오뚜기처럼 배가 기울어질 때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오려는 성질)은 어찌되고 있나?”
“선체가 상당히 기울어져있는 것 같습니다. 선박이 복원성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전방을 주시하던 이등항해사가 이어서 외쳤다.
“갑판에 그림자들이 보입니다. 화물선에서 사람들이 모두 갑판으로 올라와 있습니다. 배가 완전히 기울어지기 전에 모두 뛰어내리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구명정은 관찰되나?”
“확인이 안 됩니다.”
일등항해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선장에게 다가왔다.
“선장님, 속력을 올려서 빨리 화물선의 사람들을 구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선장도 일등항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과 일등항해사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요트보다 화물선을 구조하는 것이 급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화물선을 구하기 위해 요트를 그냥 지나칠 계획으로 보였다.
그 순간.
< 띠링! >
+
<히든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지금 위험에 처한 VIP가 있습니다. VIP를 구출하세요!”
세부 퀘스트 : 구조
클리어 조건 : 위험에 처한 VIP의 구조
제한시간 : VIP 생존시까지
보상 : 명성 + 25, ???(달성시 공개).
실패시 : ???
+
역시 내 예상대로다.
지금 요트 안에는 있는 사람은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선장님, 안됩니다.”
“뭐? 삼항사 또 무슨 소린가?”
내 말에 선장이 고개를 돌렸다.
“가까이 있는 요트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이희영 선장과 일등항해사 양화종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제법 날카로운 판단력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나는 삼등항해사에 불과했다.
그것도 초임으로 이 선박에 승선한 애송이 중의 애송이.
그런 내가 선장의 결정에 이의를 계속 제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용납될 수 없는 짓이었다.
이희영 선장이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불쾌할 수 밖에.
하지만 내가 살린 건데?
‘비너스호가 누더기가 될 신세였는데, 이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그걸 내가 살린 거라고요! 예?’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모르겠지.
나는 이들의 반응이 제법 야속하게 느껴졌다.
난동을 부리긴 했만 지난 몇 시간 동안 내가 보여준 눈부신 업적을 이들은 그새 까마득히 잊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내덕에 살아남았는데? 벌써?’
그저 나를 초임 삼등항해사 애송이로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급을 다투는 순간이니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사실 나도 본의 아니게 계속 선장의 말에 딴죽을 건 모양새가 이어지게 된 것은 살짝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전생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나는 지금 꼭 구해야 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생에서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이 요트 안에는 인도네시아의 유명 정치인의 딸이나 유명 연예인이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전생에 우리 선박은 큰 피해를 입고 인근에 있는 인도네시아 항구로 긴급피난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