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00)

“허허허. 이 새끼 이거 진짜 정신 나간 놈이네.”

“왜요?”

“아무튼 선장님도 나오셨으니까 당장 선교로 올라와. 지금 난리 났어.”

이등항해사 김호영의 표정은 제법 심각해 보였다.

평소 웃음을 잃지 않는 그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선장이 선교로 올라오고 선박이 뒤집힌 이유를.

스탑 엔진(Stop engine!)

나도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제대로 챙겨 입었다.

조금만 있으면 어차피 당직 시간이었기 때문.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내 등 뒤로 이항사가 다가왔다.

“야!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

“뭐가요?”

“삼항사님이 당직하면서 몰래 항로를 죄다 바꿔놨잖아. 왜 그랬냐고요. 네?”

“아, 몰라요. 어차피 선장님도 물어보실 테니까 가서 한 번에 들어요.”

“이 새끼가 형님한테! 그나저나 선장님이랑 일항사 완전 열 받았던데? 어쩌려고 그래?”

“……뭐, 어떻게든 되겠죠.”

“일단 빨리 준비해서 올라와 난 먼저 가있을게.”

역시 들켰네.

사실 바보가 아닌 이상 들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난 교대 시간에 전자 해도와 종이 해도를 몰래 수정했다.

일등항해사와 이등항해사가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히 내가 한 짓을 알아차릴 것이라고는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제법 시간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발각되지 않은 동안 배가 멀리 돌아갔으니 그만큼 시간을 벌었다.

그다지 손해 보는 짓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 눈앞에 아른 거리는 이 정체불명의 창.

보너스 퀘스트 달성이후로 생성된 이 창은 작은 모양으로 접혀져 있었다.

내가 손을 들어 창을 눌렀다. 창이 펼쳐지며 나에 대한 정보가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

<상태창>

이름 : 장보고

나이 : 23세

클래스 : 항해사

세부클랙스 : 삼등항해사

레벨 : Lv.1

스킬 : [항해술 Lv.1], [태권도 Lv.3], [고무고무킥 Lv.3], [인명구조 Lv.1.]

명성 : + 2

Rmark: 능력치가 현저히 낮습니다. 퀘스트를 성실히 수행하세요.

+

뭐? 내 능력치가 현저히 낮다고?

이상하네. 조셉을 구해서 명성 +5의 보상을 받았는데 명성이 왜 “+2”인거지?

‘아, 원래는 “-3”이었다는 뜻이구나!’

“…….”

* *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이항사와 함께 선교에 들어섰다.

내가 나타나자 선교의 기온이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싸늘한 시선들이 내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우선 나를 바라보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선장 이희영.

승선 기간만 20년이 넘는 베테랑 선장으로, 차분한 성품의 소유자. 합리적이고 꼼꼼한 스타일로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후배 선원들을 평가할 때면 지나치게 냉정하고 인색하다는 말도 있었다.

그의 눈에서도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직 사관인 삼등항해사가, 그것도 초임으로 이 배에 승선한 내가 선장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예정된 항로를 이탈해 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장의 뒤에서 나를 잡아먹을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사내. 일등항해사 양화종의 얼굴이 보였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던 이희영 선장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 삼등항해사 왔나?”

“네, 선장님.”

“일단 좀 앉지.”

선교의 한쪽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선장과 항해사들이 전원 자리했다.

선장이 나를 쳐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삼항사. 도대체 왜 그랬나?”

“…….”

“무슨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사실은 근무 중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음?”

“당직 근무를 하는 중에 교신기로 근처를 지나가는 다른 선박들이 하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향하는 항로에 심한 황천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뭐? 지나가는 선박들이라면 어떤 선박들 말인가?”

“제법 큰 원양어선들이었습니다.”

“원양어선?”

“네,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원양어선의 조업은 날씨에 민감하기 때문에 원양어선의 선원들이 날씨를 잘 본다고 하더라고요.”

“씨발! 그게 무슨 헛소리야!”

나의 대답을 듣고 있던 일등항해사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원양어선 선원들만 선원이고, 그럼 우리는 뭐냐? 병신이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어!”

헛소리라고? 맞다. 물론 헛소리였다.

내가 갑자기 급조해낸 헛소리고, 개소리였다.

귀신같이 헛소리를 알아차린 것을 보니 이 곰치 새끼의 일항사 짬밥을 무시할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긴 한데 내가 들어도 허술한 이야기였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설정이 허접했다.

하지만 전생에서 경험해본 일이라고, 곧 쓰나미가 밀려 올 거라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퀘스트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정신병자 취급을 당할 것은 분명했다.

‘역시 안 통하네.’

“너 이 새끼, 곧 정시성 평가 기간인데 이렇게 사고 치면 우리 좆되는 거 몰라?”

소리를 지르는 일등항해사의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컨테이너 선사들이 얼마나 예정된 스케줄대로 정확하게 항구에 기항하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정시성 평가였다.

스케줄대로 선박이 항구들을 기항하면서 정확한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는지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매년 관련 기관에서 정기선인 컨테이너선을 운항하는 해운회사의 서비스 품질을 평가하고 있었다.

해신해운은 늘 최상위권을 랭크했고, 그 말은 좋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것은 해신해운 선원들의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했다.

올해의 정시성 평가를 곧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본사에서도 선박들의 운항 스케줄에 제법 민감해진 시기였다.

‘누가 들으면 회사에 제대로 충성하는 놈인 줄 알겠네.’

나는 벌게진 일등항해사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실 일등항해사가 이렇게 난리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번 항차를 마치면 일등항해사는 선장 진급 대상자에 오를 수 있었다.

이번 항차에 무슨 사고가 생기면 혹시라도 자신의 승진이 누락되는 것은 아닐지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저 난리를 치고 있는 것이다.

전생에서 일등항해사는 곧 발생할 사고 이후 초동 대처에 미흡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리고 꽤나 냉정하게 부하직원을 평가한 이희영 선장의 의견 때문에 실제로 내년 선장 진급에서는 누락된다.

2년 후에야 선장으로 진급하게 되는데, 이 새끼는 나중에 회사가 어려울 때 제일 먼저 회사를 떠난 선장 중 하나였다.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

‘이번에 별일 없이 지나가면 내년에 선장 진급할 수도 있을 텐데 말이지. 그러면 다 내 덕분에 사는 줄 알아야 되는데.’

곰치 일항사가 빨리 선장으로 진급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심을 앞세워 일을 망칠 순 없었다.

이희영 선장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운항팀이나 본사로부터 일기예보에 관한 별다른 지시가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그래…….”

“선장님, 저 미친놈이 하는 말을 믿는 건 아니시죠?”

일항사의 말에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항사 말이 맞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부정확한 정보에 근거해서 배를 계속 운항할 수는 없는 일이지. 일항사, 다시 원래 계획했던 대로 항로를 변경하게.”

“네, 선장님.”

일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한 번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선교 가운데 조타키를 잡고 있는 조타수를 향해 걸음을 옮겨갔다.

조타키를 잡고 있는 조타수는 필리핀 선원 조셉. 내가 목숨을 살려준 바로 그 조타수였다.

그는 내 덕분에 목숨을 구한 것을 알고, 지난 교대 시간에 찾아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조셉은 내가 궁지에 몰려있자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도 어쩐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일등항해사가 조셉에게 다가가면서 지시를 내리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일항사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일항사님!”

제자리에 멈춰 선 일항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왜, 인마!”

“교대시간입니다.”

“뭐?”

“이제 제 당직 시간입니다.”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지금부터 선교의 당직 사관은 접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교대하고 지금부터 제가 운항 지시를 하겠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일등항해사가 크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노려보는 일등항해사를 무시하면서 그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조셉에게 다가갔다.

“내가 지금부터 당직 사관이다. 지금부터 내가 운항 지시를 한다.”

조셉은 어찌할지 몰라 눈만 크게 뜬 채로 키만 움켜지고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셉을 바라보며 명령했다.

“조타수, 내 지시 외에는 따르지 말도록.”

“이, 이 미친 새끼가!”

잔뜩 흥분한 일등항해사가 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나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았다.

“야 이 새끼야! 너 진짜 돌았냐?”

이항사가 황급히 일어나서 우리에게 달려왔다.

“에이, 일항사님 참으세요. 삼항사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야 보고야! 장보고! 빨리 사과드려!”

이항사가 나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항사가 내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선교 전체에 더 크게 울리도록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셉!”

"예? 예 썰(Sir)!“

놀란 표정으로 조셉이 대답했다.

“스탑 엔진!”

“……! 왓(What)?”

조셉도 놀라서 소리쳤다.

“당장 배 멈추라고! 스탑 엔진!”

조타수 조셉은 나의 지시를 받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열심히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조셉, 저 새끼 말 들으면 내가 가만 안 둔다!”

일항사가 조셉을 바라보며 크게 소리쳤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나의 멱살을 움켜쥔 상태였다.

“조셉! 스탑 엔진(Stop engine)!”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소리쳤다.

“…….”

조셉은 여전히 머뭇거렸다.

“I'm the officer on duty!(내가 당직 사관이다). 스탑 엔진!"

나는 조셉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넌 오늘 죽었다.’

그는 나의 수신호를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조셉이 나를 한차례 바라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스, 스탑 엔진, 써(Stop engine. Sir!)."

조셉은 내 지시를 따라 크게 복창하더니 기관 조정 핸들을 조작해 기관을 정지시킬 수 있는 위치로 옮겼다.

웅웅거리던 엔진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 새끼들아!”

일항사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쥐고 있던 내 멱살을 놓더니 조셉을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조셉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셉! 시동키 뽑아!”

나는 조셉을 향해 빠르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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