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00)

과거의 기억이지만 이상할 만큼 선명하게 머릿속에 이미지가 빠르게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나?”

마치 사진처럼 선명하고 정확하게 머릿속에 기억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 선박에 승선한 시기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이니, 대략 40년 전으로 돌아온 건가?’

꿈을 꾸는 건가.

‘이럴 땐 뺨을 때려봐야지.’

찰싹!

‘시발 졸라 아프네! 좀 살살 때릴걸.’

영화 속 뻔한 클리셰의 한 장면처럼 내 뺨이 무지하게 아려왔다.

역시 꿈은 아니다.

지금이 꿈이 아니라면 내 과거가 꿈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래. 꿈이라면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떠오를 수가 없지.’

지난 40년의 세월이 나의 머릿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천천히 생각하고 빨리 선교(브릿지)로 올라가야겠다.”

무시무시한 곰치 일항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갑기도 했지만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곰치가 선교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 * *

- M.V. 비너스호의 선교(브릿지)

선박에서 선원들 간의 생활은 마치 군대와 다를 바가 없다.

아니, 어쩌면 선박은 더한 곳일지도 몰랐다.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했기 때문이다.

험한 뱃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위계질서가 필요했다. 선박도 그래서 상명하복이 중시되는 곳이었다.

비록 민간회사의 상선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뱃사람들의 질서는 다르지 않았다.

선원들을 군대에 비교하자면 장교의 역할을 하는 사관들과 사병의 역할을 하는 부원으로 나눌 수 있었다.

장교 역할을 하는 사관들은 배의 운항을 담당하는 항해사들과 선박의 기관을 담당하는 기관사들로 나뉘고, 그들의 정점에는 선장이 있었다.

선장.

영어로는 캡틴(CAPTAIN).

그의 말은 선박 안에서 법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선장의 바로 오른팔로 선박의 실질적인 실세가 바로 일등항해사, 이른바 일항사였다.

그리고 문제는 이 선박의 일항사의 별명이 곰치라는 것이었다.

일등항해사 곰치 양화종.

그가 눈에 쌍심지를 켠 채로 선교에 들어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고, 삼항사님. 일어나셨어요?”

양화종은 나를 노려보며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 만이지만 나를 쥐어 잡던 양화종을 바라보자 나도 모르게 순간 고양이 앞의 쥐가 된 심정이었다.

나도 모르게 곰치 일항사를 보자 순간 움찔했다.

‘전생의 기억이 각인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몸이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이내 긴장이 빨리 풀려갔다. 지난 60년 인생의 관록이 나의 평정심을 찾게 했다.

양화종은 예상과 달리 내 표정이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 같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정면으로 다가와 손을 들어 내 가슴팍을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삼항사님, 어디 몸이 좀 불편하셨어요?”

“아닙니다.”

“아이고, 그럼 잠이 모자랐어요? 우리가 삼항사님을 너무 혹사시켰나보네요.”

“아닙니다.”

“그럼 어제 근무가 너무 피곤하셨어요? 좀 쉬게 해드려야 되는데, 내가 개념이 없어 그렇게 배려를 못해드렸네.”

“아닙니다.”

“음? 그럼 도대체 몸도 안 불편하고 잠도 안모자란데 왜 늦게 올라온 거지?”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는 사이, 양화종이 두 손뼉을 찰싹 치더니 스스로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몸도 안 불편하고, 잠도 안 오고 피곤하지도 않은데 굳이 이렇게 늦게 올라온 거구나.”

“…….”

“그냥 교대 근무해야 되는 나를 엿 먹이려고 그런 거구나. 그런 거죠? 삼항사님?”

“…….”

“응? 이제 대답도 안하기로 한 거야?”

양화종은 내가 대답도 하지 않자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런데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나를 바라보는 양화종의 얼굴이 귀엽게 보였다.

“허허허.”

나는 양화종을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은 이십대 초반이지만 나에게는 전생에서 겪은 60살의 인생 경험이 내재된 상태였다.

이제 갓 이십대 중후반인 양화종이 얼굴을 들이밀며 나를 겁박했지만 그 모습마저도 그저 귀엽게 보인 것이다.

“뭐,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웃고 지랄이야?”

“그러게요. 허허허허허허.”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미친놈처럼 웃어버리자 오히려 크게 당황한 사람은 양화종이었다.

‘이 새끼가 겁에 질려 돌았나?’

평소 졸아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내가 미친놈처럼 크게 웃자 양화종은 왠지 모를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양화종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일항사님, 피곤하실 텐데 얼른 내려가서 쉬시지요.”

“어?”

일항사는 나의 달라진 기운을 느낀 듯 보였다.

‘이 새끼 갑자기 뭔가 분위기가 변한 것 같네.’

양화종은 나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일항사는 눈치가 빠르고 처세에 능한 인간이었다.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직감한 듯 사태 파악을 위해 이번은 그냥 넘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러지. 미친 건 아니겠지? 일단 무슨 일인지 좀 지켜봐야겠네.’

양화종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간혹 승선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미친 짓을 하다가 난동을 부리는 삼항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항사는 사태 파악을 위해 일단 이번에는 조용히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그래, 삼항사, 일단 오늘은 피곤하니까 먼저 내려가고 나중에 보자.”

“감사합니다. 일항사님.”

“음, 그리고 출항하면서 짠 항로가 수정됐으니 해도도 잘 보고 확인해둬. 전자해도도 입력해 뒀으니까 확인하고.”

“네, 알겠습니다.”

일항사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선교를 떠나갔다.

“새끼, 그래도 귀엽네.”

일항사가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조타수가 서있었다.

조타수는 필리핀 출신의 선원이었는데, 그는 한국말을 대강 알아들은 듯 나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삼항사님, 짱! 써(Sir).”

“허허허.”

일항사는 선원들에게도 평판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일항사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평소에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리핀 선원도 오늘 내가 곰치와의 기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도 조타수를 바라보며 크게 한 번 씩 웃어보였다.

하지만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환청이 들려왔다.

< 띠링! >

그리고 눈앞에는 신기한 장면이 떠올랐다.

+

<메인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특전 : 회귀, 퀘스트, 상태창, 레벨업

메인 퀘스트 : 선박왕이 되어라

클리어 조건 : “선박왕 칭호를 획득”

제한시간 : 생존시

보상 : ???

실패시 : ???

+

뭐야?

퀘스트? 선박왕이 되라고?

조타수 조셉

내 눈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창이 떠올랐다.

손을 들어 휙휙 저었지만 만질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그대로.

꿈이라도 꾸는 건가?

눈을 비비고 뺨을 때려도 눈앞에 떠있는 창은 선명하기만 했다.

그때였다.

< 띠링! >

또 다시 머릿속으로 환청이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의 떠오를 글자가 빠르게 변경되기 시작했다.

+

<보너스 퀘스트를 시작합니다.>

“지금 비너스호에는 위험에 처한 선원이 있습니다. 선원을 구하세요!”

세부 퀘스트 : 선원 구조

클리어 조건 : 위험에 처한 선원의 건강 회복

제한시간 : 생존시

보상 : 명성 + 5, 외국인 선원들의 충성심, 기술 [인명구조 Lv.1.]

실패시 : ???

+

뭐야 이건 또? 보너스 퀘스트?

위험에 빠진 선원을 구하라고?

‘내가 미친 건가?’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이 있었다.

‘아! 초임으로 승선했던 선박이라면?’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선교에 설치된 해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선박들은 출항하기에 앞서 항해할 경로를 짜게 되는데, 보통 이등항해사들이 담당하는 업무였다.

대형 컨테이너선에서는 전자 해도와 종이 해도를 동시에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선박도 마찬가지였다.

탁자 위에 놓인 종이로 된 해도에는 수정된 항로가 표시되어 있었다.

해도를 바라보던 나는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쭈뼛 쭈뼛 팔뚝 위로 닭살이 돋기 시작하더니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심장이 갑자기 쿵쿵 뛰었다.

‘뭐지, 이 기분은? 공황장애? 아니면 부정맥?’

하지만 나는 과거에 이런 질병을 겪은 기억은 없었다. 그리고 아직 이십대 초반의 건강한 몸이 아닌가.

머릿속에 갑자기 과거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 이번 항로가 그때구나!’

이 항차는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아서 힘들었던 항차(항해의 차례)였다.

내가 초임으로 승선한 선박에서 유난히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자, 곰치 일항사는 나에게 사고를 부르는 재수가 없는 놈이라며 구박을 늘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내버려둘 이유가 없었다.

나는 빨리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갑판장님, 어디 계십니까? 브릿지입니다.”

무전기가 몇 번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갑판장이 대답했다.

“갑판장입니다. 지금 저는 선수 쪽에 있습니다.”

“네, 갑판장님. 삼항사입니다.”

“어이, 삼항사님! 벌써 교대 시간이 됐나? 빨리 올라왔구먼.”

“네, 선교로 잠시 올라오세요.”

갑판장은 해신해운에서 30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선원이었다.

나의 아버지도 해신해운에서 부원으로 근무했었다.

이 배의 갑판장은 내 아버지가 갑판장으로 근무했던 선박에서 부원으로 일했던 인연이 있었다. 그리고 평소 왕래도 잦아 어린 시절 나는 그를 삼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초임 항해사로 승선한 선박에서 아는 그를 만난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아이고, 우리 삼항사님!”

갑판장이 싱긋 웃으며 선교로 들어섰다.

나는 살짝 목례를 한 후 조타기 근처로 갑판장을 불렀다. 그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갑판장님, 조셉도 지금 작업 중입니까?“

“조셉? 오늘은 아닌데.”

“그럼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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