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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85)화 (85/85)

특별 외전 2

현수막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었다.

반짝반짝한 은색 레이스에 한 땀 한 땀 자수로 새긴 글귀는 보기에도 퍽 고급스러웠고 존 웰슨의 필기체가 섬세하게 구현되어 있어 상대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선율의 눈에 그 현수막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와…… 허…… 이게 옷이야, 어망이야?”

현수막 바로 아래 나란히 걸린 커플 가운에 선율의 눈동자가 요란하게 흔들렸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베이지색 가운은 가운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숭숭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러니까 모양은 가운이 맞는데 딱 두 군데만 빼고 얼기설기한 망사로 이루어져 있어 옷으로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는 디자인이었다.

유신의 옷은 또 어떻고.

그의 것은 아예 가운도 아니었다. 보통 남자가 수영장에서 입는 짧은 반바지 형식의 그것은 잠자리 날개처럼 얇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입어 줄래요?”

유신이 태연하게 옷걸이에서 옷을 벗겨 냈다.

선율은 진저리를 치며 도리도리를 했다.

“어망을 어떻게 입어? 구멍이 커서 물고기도 안 잡힐 거 같은데.”

“입어 보면 알겠지. 물고기 걸리나 안 걸리나.”

“이건 불공평해. 네 옷은 멀쩡하잖아!”

“정 억울하면 방법은 있는데.”

씨익.

“나도 하나 덜어 내죠, 뭐.”

유신이 팬티인지 어망인지 모를 그것을 아무렇게나 구겨 침대에 내던졌다.

이거 계산이 좀 이상한데.

쟤 저거 덜어 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 거 아닌가……?

“설마 다 벗고 돌아다니겠다고?”

“어때요. 어차피 우리 둘뿐인데.”

유신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귓불을 깨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율은 결코 이 옷을 입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딱 사흘이 지난 후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섬 소유주의 혜안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느낄 수 있는 해방감은 도시에서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도시에서는 집 안에 있어도 혹시 창밖에서 보일까, 누군가 갑자기 벨을 누를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집에서도 온전한 휴식은 취할 수 없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돌아다니는 것도, 한밤중에 섬이 떠나가라 크게 음악을 트는 것도 오직 이곳에서만 가능했다.

깊은 고립은 완전한 자유를 선사했다. 다른 누군가에 민폐를 끼칠 일이 없으니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고, 어딜 가도 둘뿐이니 일정을 짤 필요도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다가 내킬 때 수영을 하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일이 반복되었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오면 서로의 온기를 나누고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를 나누었다.

첫날 수영복을 입었던 선율은 둘째 날엔 비키니를 입었고, 셋째 날 드디어 ‘어망’을 입었다.

이후론 태고의 상태였다. 나중엔 슬리퍼를 꿰는 것도 귀찮아서 맨발로 모래사장을 활보했다. 꿈 같은 하루하루가 쌓일수록 몸은 자유로워졌다.

물론 부작용은 있었다.

“아…… 엄청 따갑다.”

강렬한 지중해의 햇볕에 홀랑 타 버린 살갗이었다.

“많이 아파요?”

“응. 선크림을 몇 번이나 덧발라도 이 모양이네.”

입도한 지 일주일이 지난 무렵, 선율은 카바나에 엎드려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놀았는지 목뒤와 등이 완전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벗은 채로 엎드린 그녀의 등 위로 유신의 손끝이 매끄럽게 움직였다.

“타긴 했네.”

“너는 왜 멀쩡해?”

“글쎄. 원래 잘 안 타는 체질인가 보지.”

“별걸 다 축복받았네.”

빨갛게 타 버린 살은 조금만 스쳐도 통증이 느껴졌다.

작게 신음하는 선율을 보며 유신은 안타까워했다.

“몸이 이래서 오늘은 못 하겠네요.”

“뭐, 인마? 사람이 아픈데 지금 그 생각을 왜 해?”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뱉어 낸 선율을 보고 유신이 매끄럽게 웃었다.

“신혼이잖아요.”

그래도 오늘은 봐줄게요.

나직이 속삭인 그가 태연하게 등에 부채질을 했다.

이 젊고 야한 짐승을 어찌해야 하나.

선율은 벌써부터 체력이 달리는 듯했다.

* * *

2주가 쏜살같이 흘렀다.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두 사람은 카바나에 앉아 아쉬운 밤을 붙잡고 있었다.

“여기 너무 좋다.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

선율은 물끄러미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서울로 돌아가면 이런 풍경은 보지 못하겠지. 다이아몬드를 박아 놓은 듯 반짝이는 하늘도, 코끝에 스치는 청량한 바다 냄새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인지 유신이 가만히 어깨에 턱을 기대 왔다.

“다음에 또 오면 되죠. 매년은 아니더라도.”

“서울 돌아가면 너나 나나 일에 치여 살 텐데 시간을 낼 수 있을까?”

휴가를 빼느라 한 달 넘게 야근한 것을 떠올린 선율은 조금 회의적이었다.

“선배가 원하면 난 뭐든지 해.”

시무룩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유신이 약속하듯 단단히 손가락을 얽었다.

“정말?”

“알잖아요. 내가 언제 빈말한 적 있나.”

“그럼 나도 휴가 좀 쟁여 놔야겠다.”

그제야 선율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그가 말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걸 알기에, 오늘 보는 이 풍경이 마지막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선율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유신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땡볕에 2주를 굴렀는데도 피부가 창백하리만치 새하얬다. 조유신의 모든 걸 좋아하지만, 조각 같은 옆선은 언제 봐도 가슴이 뛰었다.

바닷바람이 가만히 다가와 머리칼을 흔들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 쭉 뻗은 콧날이 유독 우수에 찬 듯 서늘했다. 선율은 그의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돌려 저를 바라보게 했다.

“왜.”

발갛게 달아오른 선율의 뺨을 본 유신이 나직이 웃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체온을 느끼듯 그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냥. 모든 게 꿈처럼 느껴져서. 깨어나면 물거품이 될 것 같아.”

유신은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뻔한 위로는 하지 않았다.

달콤한 꿈에서 깰까 두려운 건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인해 봐도 돼?”

선율이 갈망 어린 눈으로 유신을 올려다보았다.

유신은 입꼬리를 한 번 끌어 올린 후 기꺼이 그녀의 갈망을 받아들였다.

“얼마든지.”

선율이 다가가자 그가 입술을 벌렸다.

단단한 목덜미를 두 팔로 끌어안고 하염없이 입맞춤을 나누었다. 바다 내음을 머금은 입술이 더한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온 우주에 둘만 남은 듯 간절하고 또 간절하게 서로의 숨을 나누고, 정제되지 않은 욕망을 마음껏 드러냈다. 어느새 엉덩이 아래가 흥건했다. 가만히 손가락을 움직이던 유신이 불현듯 허리를 일으켰다.

“콘돔이 안에 있어요.”

그간 수없이 사랑을 나누면서 한 번도 피임을 잊지 않은 그였다. 이 와중에 콘돔 가져오겠다고 일어나는 게 조금 웃겨서 선율은 질척한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가지 마.”

모래사장을 디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흐름 끊기니까 그냥 하자.”

유신은 조금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겠어요?”

“응.”

“그럼 밖에다 할게요.”

“안에다 해도 돼.”

그의 잇새에서 살짝 바람이 샜다.

“무슨 의미지, 이거?”

“알잖아. 그걸 모를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니까.”

“선배.”

유신이 진지하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아이 갖고 싶어요?”

“절실한 정도는 아니고 그냥.”

어떻게 대답할까 잠시 고민하던 선율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내보였다.

“있어도 좋겠다 싶어. 왜, 넌 싫어?”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유신은 잠깐 미간을 찡그리더니 픽 웃었다.

“막상 생각하니 좀 쫄리네.”

조유신의 인생은 오로지 한선율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껏 한선율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경주마처럼 달려오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틈이 없었다.

아이를 가지기 싫냐는 예기치 못한 질문에 선뜻 대답을 못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쫄릴 거 뭐 있어. 너 닮았으면 똑똑하고 나 닮았으면 예쁘겠지.”

“그 반대 아닌가?”

“……이 상황에 팩폭이라니 너 좀 잔인하네.”

“팩폭이라고 하는 거 보니 선배 눈에 내가 예뻐 보이기는 한가 봐.”

“말이나 못 하면.”

유신은 퍽, 가슴을 때리는 선율의 손목을 휘감았다.

살짝 눈을 흘긴 선율이 대답을 강요하듯 유신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나 좀 마르려고 그래.”

짧은 시간에 결정을 내릴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듣고 싶었다.

‘오늘이 마지막 밤이니까…… 그리고 우리 이제 부부니까.’

“마르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유신은 낮게 속삭이며 자세를 낮추었다. 움푹 파인 배꼽을 지나 점점 깊숙한 곳을 파고든 숨결이 다시금 살갗을 달궜다.

“선배 여기 너무 예뻐.”

진득한 숨결이 불어 넣은 습기에 선율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맨살이 닿으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쌀 거 같네.”

말마따나 그의 몸은 완벽히 단련된 상태였다. 선율의 살결이 이슬을 머금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녀를 함락시켰다.

“흣……!”

어떤 방해도 없이 피부가 마찰했다. 질걱거리는 느낌은 강해졌고 표피를 감싼 부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황홀했다.

완연한 승낙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난 선율은 버석거리는 이불로 몸을 감싼 채 한참을 뒹굴었다.

섬을 떠나는 날이라 그런가 유난히 일어나기가 싫었다.

먼저 일어난 유신이 짐을 모두 챙겨 둔 덕에 아직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며 선율이 중얼거렸다.

“어제 뭔가 험난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간밤에 꿈을 꿨다.

생생하지만 흐릿한, 아주 묘한 느낌의 꿈이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본 채 기억을 곱씹던 그녀가 손뼉을 탁 쳤다.

“맞다! 별똥별!”

모래사장에 누워 밤하늘을 보고 있는데 보석처럼 콕 박혀 있던 별이 툭 떨어졌다. 아주 어마무시한 속도로 떨어지는 바람에 깔려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굳이 따지자면 별똥별이 아니라 핵폭탄급이었지. 아름답기보다는 웅장했고.

“하나였는지, 두 개였는지 기억이 안 나네.”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의 귓가로 유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옷 입어야 해요, 선배.”

시계를 보니 슬슬 준비를 하긴 해야 했다.

아득한 꿈은 굿바이.

이제 속세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열흘 넘게 걸어만 두었던 속옷에 팔을 꿰며 선율이 휘장을 걷었다.

“응! 지금 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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