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84)화 (84/85)

특별 외전 1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대로 위.

눈이 시원할 정도로 뻥 뚫린 도로를 은회색 세단 한 대가 갈랐다.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보디에 고양이의 눈처럼 새초롬한 라이트. 유선형으로 쭉 뻗은 곡선이 마치 스포츠카를 방불케 하는 비주얼이었다.

고광택 크롬 바가 수직으로 배열된 라디에이터 그릴이 햇빛을 받아 번쩍번쩍했다. 지나가던 차들이 일순 속도를 줄이고 흘깃거릴 정도로 강렬한 아름다움이 도로 위를 지배하는 듯했다.

세계 최고의 슈퍼 카 디자이너 맥파이의 작품이자 세상에 단 한 대뿐인 자동차.

차의 주인인 선율은 조수석에 앉은 채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드디어 신혼여행이다, 우와!”

결혼식이 끝난 후 곧장 신혼여행 길에 오른 터였다.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는 그녀의 얼굴엔 피로감이 언뜻 엿보였으나 기분만큼은 홀가분했다.

“작은 결혼식이었는데도 챙길 게 왜 이렇게 많은 거야? 30명 초대했는데 이 정도면 호텔 결혼식이라도 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많이 힘들었어요?”

“재밌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두 번 하라면 도망갈 거야.”

“난 여보랑 하는 거면 백 번도 괜찮은데.”

“여……보?”

운전석엔 유신이 앉아 있었다.

듣기 좋은 저음으로 능청스레 대꾸하는 말에 선율이 웃음을 터트렸다.

“얘 좀 봐. 결혼식 끝난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여보래?”

이 여우 같은 남자 같으니라고.

“왜요. 여보는 아직 좀 그래요, 여보?”

“야, 그만해. 손가락 없어지려고 그래.”

“결혼도 했는데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여보.”

“아오, 그만하라니까?”

“달리 듣고 싶은 애칭이 있으면 말해 줘요, 여보. 그 전엔 안 바꿀 거니까.”

“어우, 조유신 진짜!”

찰싹!

선율이 유신의 팔을 소리 나게 때렸다. 오글거리는 데 항마력이 달리는 체질인 선율은 ‘여보’ 소리에 질겁했다.

물론 유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지만.

“다 왔네요.”

그가 빨개진 팔에 불끈 힘을 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립시다, 여보.”

“야!”

티격태격하는 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도망가는 유신을 따라 선율이 다다다 쫓아가기 시작했다.

즐거운 신혼여행의 시작이었다.

* * *

두 사람의 신혼여행지는 특별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이었는데, 실버벨 아일랜드라 이름 붙은 그곳은 보통의 여행지와 다르게 개인이 소유한 사유지였다.

프랑스에 내려 경비행기를 타고 또 두어 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곳인데 일반 비행기가 지나다니지 않으니 당연히 개인 소유의 비행기가 필요했다.

이륙장엔 ‘베링거 모터스’ 로고가 크게 박힌 경비행기가 대기하고 있었다.

큰 비행기들 사이에서도 꿇리지 않는 위풍당당한 자태에 선율이 감탄했다.

“이러니까 진짜 귀빈이라도 된 것 같아. 살면서 베링거 경비행기 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 비행기는 베링거 모터스가 소유한 경비행기 중에서도 오직 베링거의 임원단 또는 귀빈만이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 해외여행을 거의 가 보지 못한 선율로서는 이런 초호화 신혼여행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게 당연했다.

“진짜 꿈만 같아. 새삼 엄청 대단한 남자와 결혼했다는 생각이 드네.”

“돌아가면 경비행기 디자인도 공부해 볼까?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 보니 다음엔 경비행기 한 대 선물하고 싶어지네.”

유신이 씩 웃으며 선율의 어깨를 감쌌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스무 살. 모두가 제 발밑만 보고 종종거릴 때 누구보다 멀리 내다봤던 그였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고 미친놈처럼 매달렸다. 세상에 한 대뿐인 차를 선물하겠다는 약속을 10년이 채 흐르기도 전에 지킨 그였으니 이번에도 그럴 터였다.

“너라면 정말 그렇게 할 것 같아.”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거라 믿으니 벌써부터 설레는 기분이었다.

얼마 후, 경비행기가 실버벨 아일랜드에 착륙했다.

실버벨 아일랜드는 베링거 모터스의 부회장인 존 웰슨이 소유한 섬이었다. 복수의 스승으로 유신을 누구보다 아끼는 그는 결혼 선물로 통 크게 섬을 빌려주었다.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있어도 된다며, 별장에서 일해 줄 사용인까지 내어 준 그였다.

“와…….”

오랜 비행으로 조금 피로했던 선율은 섬에 내리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쫙 펼쳐진 모래사장 위에 우뚝 선 별장은 한 개인이 소유하기엔 아까울 정도로 근사했다. 베이지색의 아름다운 건물은 지중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산뜻함을 자랑했다. 굵은 기둥이 떠받친 단층 건물 안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었는데 몇 팀이 수영 강습을 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에메랄드색 물 주변으론 선베드가 놓여 있었다. 강렬한 햇볕을 피할 때 쓸 수 있는 카바나도 곳곳에 있어 수영을 하다가 지치면 얼마든지 쉴 수 있었다.

별장 뒤편으론 녹음이 짙은 산이 웅장함을 뽐냈다.

낮에는 별장으로 쏟아지는 태양을 막아 주고 석양이 질 땐 붉게 흩뿌려진 노을이 쉬어 가는 곳이었다. 반짝이는 별빛이 내려앉으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여길 우리 둘만 쓰는 거야?”

“별장 안쪽에 메이드 숙소가 있어요. 때맞춰 식사를 준비해 주고 세탁이나 침구 교체 등 여기 머무는 동안 불편함이 없게 신경을 써 줄 거예요. 프라이빗한 별장이다 보니 우리 눈에 띌 일은 없을 테지만.”

“넌 여기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한 번.”

“누구랑 왔었는데?”

“!”

어, 너 왜 당황하지.

별 뜻 없이 물어본 말에 눈에 띄게 당황하는 유신을 보고 선율의 눈매가 새침해졌다.

촉이 온다, 촉이 와.

“여자랑 왔구나?”

“아닌데.”

“표정 보니 아닌 게 아닌데? 말해 봐. 어차피 지난 일인데 뭐 어때. 난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쿨한 사람이야.”

“…….”

“지금 말하면 용서해 줄게.”

유신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자랑 같이 온 게 아니에요. 거기에 여자가 섞여 있었던 거지.”

“찔리는 게 없으면 목소리가 왜 기어들어 가지?”

“전 당당합니다.”

“목소리가 떨리는데?”

“착각이에요.”

조유신은 놀리는 맛이 있는 남자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겨서 버벅거리는 모습을 보니 속으로 웃음이 났다.

어쭈, 얼굴도 빨개지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싶은 선율은 유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괴롭혔다.

결론적으로, 별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너한테 한눈에 뿅 반해서 기습 키스를 했다. 요약하자면 그런 거네?”

“당한 거라니까.”

선율은 훅 유신의 코앞에 얼굴을 붙였다.

유신이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벌리자 선율이 팩 코웃음을 치며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이것 봐. 이렇게 반사 신경이 뛰어난 사람이 당하긴 개뿔.”

“이건 일부러 벌려 준 거고.”

유신이 선율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깊게 입술을 빨아들였다. 선율은 못 이긴 척 그의 키스를 받아 주었다.

긴 비행시간 동안 차올랐던 갈증이 노도처럼 터져 나왔다. 선율의 아랫입술을 진득이 빨아 당긴 유신은 흐르는 숨을 모조리 받아먹으며 그녀의 잇새를 파고들었다. 가지런한 치아를 훑고 붉게 영근 살덩이를 휘감아 맛보았다. 입 안에 넘실거리는 은실을 단숨에 빨았다가 다시 뱉어 놓자 선율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아…….”

“아파요?”

살짝 찡그린 그녀의 미간에 유신이 낮게 물었다.

선율의 입 안은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살짝 혓바늘이 돋아 있었다. 쓰라린 곳을 마찰하니 아플 수밖에 없었다.

“조금.”

선율은 미안한 표정으로 입가를 손으로 훔쳤다.

“분위기 깨고 싶지 않아 티 안 내려고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네, 선배는.”

유신은 엄지로 선율의 입술을 쓸어 주며 웃었다.

“회복될 때까지 거긴 안 건드릴게요.”

“!”

바짝 자세를 낮춘 그의 입술이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입술에 밀려 벌어진 블라우스 아래쪽으로 파고든 손은 땀에 젖은 속옷을 끌어 내리며 봉긋한 속살을 움켜쥐었다.

이럴 줄 생각도 못 했던 선율은 당황한 나머지 입을 틀어막았다.

“야, 벌건 대낮에……!”

“미안. 좀 급해서.”

“그렇지만.”

“비행기에서 시간을 너무 까먹었어.”

응접실 소파에 눕혀진 선율이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생활이 보장되는 곳이라 유신이 호언장담했지만 이렇게 탁 트인 곳이라니, 역시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경계하는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느른하게 풀어지는 덴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의 왼손에 부드럽게 손깍지를 낀 채 귓바퀴를 애무하던 유신이 봉긋한 살을 어루만졌다. 땀이 흐른 목덜미를 따라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이윽고 촉촉한 입술이 정점에 닿았을 때 선율의 신음이 비음으로 바뀌었다.

“하…….”

말캉한 혀가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단단해진 살갗을 핥았다. 완전히 달아오른 정점을 이 사이로 넣어 살짝 깨물자 선율의 아랫배가 찌르르 울렸다.

유신이 치마를 걷어 올렸다. 금세 달아오른 틈을 어루만지던 그가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선율을 응시했다. 선율은 자신이 땀에 절어 있다는 걸 깨닫고 조금 창피해졌으나 유신의 이마 역시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끝나면 씻겨 줄게요.”

나직이 속삭인 그가 선율의 다리를 벌렸다.

삐걱삐걱.

둔중한 소파가 규칙적인 비명을 질러 댔다.

환하게 쏟아지는 빛 속에 유신의 얼굴이 있었다. 눈이 부신 선율은 그저 눈을 감았다. 능숙한 애무에 쾌락이 짙어졌다.

어느새 선율은 원초적이고 은밀한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 * *

약속대로 유신이 온몸 구석구석을 씻겨 준 후, 선율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결혼식 직후 오랜 비행을 해서 그런지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노곤했다.

눈을 떴을 땐 한밤중이었다. 벽시계가 없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던 선율의 눈에 커다란 통유리로 쏟아지는 별빛이 보였다.

“와…….”

아름답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온갖 보석을 주워다 흩뿌려 놓은 듯 비현실적인 하늘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었지만 통유리창의 커다란 프레임에 가둬져 한 폭의 그림처럼 고귀해 보였다.

매일 보는 하늘이 이런 얼굴이었구나.

감탄한 눈으로 하늘을 감상하느라 유신이 침대에 없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일어났어요?”

인기척을 느낀 유신이 안으로 들어왔다.

뻥 뚫린 아치형 천장에 하늘하늘 늘어진 휘장을 걷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이 꼭 로마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막 샤워를 마쳤는지 머리카락이 물기로 반짝였다.

“씻고 왔어?”

“응. 아까 선배 씻겨 주느라 제대로 못 씻어서.”

잠들기 전 유신과 목욕을 했던 걸 떠올린 선율이 괜히 목덜미를 긁적였다. 목욕이라기엔 참 일방적이었지. 사실 뭘 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씻은 건 10분이고 더럽혀진 건 한 시간이었다는 것만 기억이 날 뿐이었다.

“선물이 왔더라고요.”

“선물? 누구한테?”

“집주인한테요.”

전용 비행기가 없으면 발길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에 어떻게 선물이 온 건지 궁금했던 선율은 유신의 대답을 듣고 바로 납득했다.

“집주인이면 베링거 부회장님?”

“결혼 축하한다고.”

유신이 씩 웃으며 벽을 가리켰다.

눈짓을 따라 자연스레 이동한 선율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저게 선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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