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83)화 (83/85)

외전 11.

청첩장에 찍힌 유신의 모습을 보니 더욱 가슴이 부글부글 끓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히 빚은 도자기를 보는 듯 아름다운 남자였다. 게다가 능력도 출중하다지? 모르긴 몰라도 자동차 업계에서 맥파이 이름 석 자 모르면 간첩이라고 하니 돈도 엄청나게 벌어들일 거다.

“저년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길래 이런 남자를 꿰찼냐고! 세상 불공평하잖아!”

청첩장을 박박 찢어 쓰레기통에 처넣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선임은 성큼성큼 탕비실을 걸어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결혼식 얘기를 하고 있는 이들이 꼴도 보기 싫었다.

“역겨워, 정말!”

건물을 걸어 나온 그녀가 아스팔트에 굴러다니는 빈 캔을 힘껏 걷어찼다.

퍽! 탁!

“……헉.”

재수 없는 년은 빈 캔을 걷어차도 슈퍼 카로 날아가는 건가.

그게 왜 거기로 날아가는 건데!

파리도 미끄러질 법한 깨끗한 차창을 정확히 가격한 후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빈 캔을 보며 선임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한눈에 봐도 비싼 차다. 번쩍번쩍 광이 나는 걸 보니 뽑은 지 얼마 안 된 신차일 테고. 선임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려 로고를 살폈다.

“베링거…… 모터스?”

망했다.

차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라도 베링거의 값어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제일 저렴한 차가 서울의 아파트 전셋값 정도는 된다지.

자세히 보니 아는 차다.

‘저 차 슈퍼스터드 아닌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조유신 이사의 차가 슈퍼스터드라고 했었다. 날렵한 보디와 낮은 차체를 보니 맞는 것도 같은데.

‘슈퍼스터드는 한국에 딱 두 대뿐이라고 했는데……. 그럼 저 차가 그 나머지 한 대?’

차 문이 열리고 하얀 스니커즈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선임은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죄, 죄송해요! 제가 그쪽으로 차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실수로……!”

“오, 괜찮아, 괜찮아. 뭘 이런 걸로.”

음?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선임이 시선을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서 있었다. 좌우로 쭉 찢어진 눈매, 한 올 흐트러짐 없이 쓸어 올린 머리카락. 턱이 뾰족해 신경질적인 인상이었으나 대체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날라리 스타일이랄까. 선임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몇 살?”

“서른…… 살이요.”

대뜸 반말을 해 온 남자가 나른한 눈으로 선임을 스캔했다. 뱀이 온몸을 훑는 듯 소름 돋는 눈길이었으나 남자의 손목에서 반짝이는 R사 시계에 정신이 팔려 있던 선임은 눈치채지 못했다.

“문형주예요.”

문형주가 빙글거리며 손가락 사이에 명함을 껴서 내밀었다. 물론 가짜 명함이었다. 여자를 등쳐 먹고 살다가 단물 다 빠지면 몰카 영상으로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그에게 제대로 된 명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박……선임입니다.”

선임은 뺨을 붉히며 명함을 받았다.

‘……대표?’

명함엔 영어로 기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 들어 보는 회사였지만 선임은 의심을 품지 못했다. 문형주의 뒤에서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 슈퍼스터드의 영향이었다. 유신이 일의 대가로 문형주에게 슈퍼스터드를 넘긴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선임은 입을 헤 벌렸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길에서 자빠진 여자 앞에 백마 탄 왕자님이 짠하고 나타나는 건 동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차를 이렇게 만든 건 상관없는데 내가 방금 선보러 나갔다가 대차게 까였거든.”

“까……여요? 왜요, 너무 괜찮으신 분 같은데.”

“그래 보여?”

“……네.”

문형주가 씩 미소를 지었다. 위험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미소였으나 선임에겐 한없이 매력적이기만 했다.

“기분도 꿀꿀한데 같이 술이나 한잔할래요? 내가 살게.”

“네? 술이요?”

“아는 친구 놈이 이 근처에 살아서 불러내려 했는데 하필 출장을 갔다네.”

“술은 좀…….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서…….”

“둘이 마시기 그러면 친구 몇 명 부르든지. 비싼 거 사 줄게.”

선임은 선택의 기로가 왔음을 알았다. 친구를 부르라고? 괜히 불렀다가 엄한 년이랑 눈 맞게 할 일 있어?

“아녜요. 그냥 둘이 마셔요.”

선임이 문형주의 손을 잡았다. 매끈한 그의 손이 사실 시궁창보다 더러운 냄새를 풍긴다는 건 알지 못한 채.

“타.”

문형주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차에 오르는 선임을 보고 그가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한 사람의 욕망과 한 사람의 추악한 속내가 뒤엉킨 차 안은 연신 화기애애했다. 위험한 남녀를 실은 슈퍼스터드가 짙게 물든 석양 사이로 달려갔다.

* * *

화창한 날씨였다.

청담의 한 옥상 정원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푸릇한 잔디 위에 꽃길을 깔고 있는 플로리스트와 곧 있을 결혼 행진곡을 준비하는 피아니스트, 테이블마다 돌아다니며 와인을 준비하는 소믈리에와 행사 전반을 기획한 파티 플래너까지.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노련한 전문가들이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오늘은 바로 선율과 유신의 결혼식이었다. 진심으로 축하해 줄 사람 몇 명만 초대해 파티 같은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선율의 의견에 따라 둘의 결혼식은 작은 결혼식으로 결정했다. 날짜와 장소가 적힌 청첩장을 받은 건 양가 합쳐서 딱 삼십 명. 초대받은 사람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어머! 너무 예뻐요, 팀장님!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 뻔했잖아요! 결혼식 왔다가 소송 걸 뻔!”

방금 도착한 사람은 주희였다. 그녀는 연두색 원피스에 하얀색 스틸레토 힐을 신었다. 얼마 전 밝은 갈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해 발랄한 매력이 한층 돋보였다.

“시끄러운 거 보니까 황주희 온 거 맞네.”

선율이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맞았다.

야외 정원 한편에 신부 대기실이 있었다. 아름다운 리시안셔스와 새하얀 휘장으로 꾸며진 아늑한 공간은 그림처럼 예뻤다. 동글동글 봉오리 진 작약 부케를 들고 다소곳이 앉은 선율의 아름다움이야 두말할 나위 없었다.

“결혼식 나만 초대받았다고 팀원들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축의금 안 받는다고 하셔서 나만 죽어났잖아요. 선물이 이이이이따만큼 들어와서 차에 싣고 오느라 팔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참 말 안 들어. 우리 주희 씨 팔 줘 봐. 호 해 줘야겠네.”

“요기요, 요기!”

선율은 엄살을 떠는 주희를 우쭈쭈 해 주었다. 유신과 인사를 하겠다며 주희가 나간 후 휘장이 걷히고 선우가 들어섰다.

“오, 시스터! 오늘 화장발 좀 받는데?”

선우는 오늘 교복 대신 정장을 입었다. 아직 학생이라 조금은 어색한 모습이었다. 슈트를 입은 제 모습이 이상한지 자꾸만 윗옷을 끌어 내리는 모습에 선율은 미소를 지었다. 업어 키운 동생이 장성한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순수함을 잃지 않은 지금의 모습이 그리울 때가 있다.

“누나, 잘살아. 성질 좀 죽이고.”

“야, 좋은 날 꼭 초 칠래?”

“절대 돌아오면 안 돼. 누나 반품돼도 절대 안 받아 준다고 아빠랑 나랑 합의 봤어.”

“……한선우 죽고 싶냐.”

선율이 떽 하며 눈을 부라렸다. 부케로 저 입을 한 대 쳐 줄까 갈등이 됐다.

“잘살라고. 행복하게, 사랑 많이 받으면서.”

어느새 선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선우의 모습에 선율은 목이 메었다.

“……그럴게.”

“귀여운 조카들도 낳고.”

“응.”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아쉬운지 모르겠다.

“이리 와.”

선율은 두 팔 벌려 선우를 꽉 안았다. 언제 이렇게 컸는지 어깨가 벌써 태평양만 한 동생을 보니 새삼스레 참 열심히 살았단 생각이 든다.

“숨 막혀. 이제 좀 놔.”

안은 지 3초도 안 됐는데 선우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기 땐 안 안아 준다고 그렇게 빽빽 울더니 배은망덕한 자식.’

선율은 구시렁대면서 그를 놓아주었다.

선우가 나간 후 신부 대기실이 잠시 한산해졌다. 선율은 가만히 앉은 채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목엔 상미가 물려준 다이아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상미 역시 시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건데 알의 크기가 크진 않아도 순도가 아주 높아 귀한 보석이라고 했다. 이미 유신이 선물한 프러포즈 반지가 있어서 상미는 그것을 목걸이로 만들어 주었다. 선율은 이미 세상을 떠난 할머니를 떠올렸다. 자신을 ‘딸’이라 부르며 늘 아껴 주던 할머니. 그녀가 남긴 유산이 제 목에서 빛나고 있다. 꼭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부님, 잠시 들어갈게요.”

번진 화장을 손보기 위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선율은 그녀에게 얼굴을 맡긴 채 바깥을 바라보았다.

야외 정원의 출입구 쪽에선 재철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싱글벙글한 얼굴로 하객들과 인사를 하는 모습에서 충만한 기쁨이 느껴졌다. 귀국한 상미와 복수도 나란히 서서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따로 올리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어찌나 깨가 쏟아지는지 옆에 있다가 거의 닭이 될 뻔했다고 유신이 우는소리를 하기에 대체 어느 정도일까 했는데, 음……. 말을 말자.

그리고 그 옆에 그녀의 남자가 있다.

평소 끼는 가죽 장갑이 아닌 하얀 장갑을 끼고서 흐트러짐 없이 머리를 쓸어 올린 모습이 야외 정원에 우뚝 선 조각상 같다. 긴 팔다리에 착 떨어지는 라인에서 섹시함이 물씬 풍겼다. 힐끗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예쁘네요.’

입 모양으로 하는 말에 가슴이 쿵쿵 울렸다.

버진 로드 위로 꽃잎이 흐드러졌다.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한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휘장이 열렸다.

“갈까요?”

그가 손을 내밀었다. 오랜 시간 거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 준 고마운 손이었다. 기꺼이 그의 손을 잡고서 선율은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응, 가자.”

유신이 가볍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그의 온기에 또다시 눈시울이 시큰했다. 선율이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우리 이제 이 손 절대 놓지 말자.’

유신이 대답하듯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못 놓지, 영원히.’

정수리 위로 흩뿌려지는 꽃잎 사이로 나란히 걸음을 옮긴다. 아름답게 흐르는 피아노 반주와 함께 그들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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