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82)화 (82/85)

외전 10.

박선임.

박 주임의 이름이었다. 대학교 졸업 후 곧장 바이디오에 입사한 그녀는 올해 서른이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 부장, 어머니는 전업주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집안에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친구 중 누가 똘똘이 인형을 사면 그녀도 반드시 가져야 했고 친구 중 누가 메이커 패딩을 사면 그녀 역시 몇 날 며칠을 부모님을 졸라 얻어 내곤 했다.

욕심만큼 머리가 따라 주진 않아서 원하던 대학교에 진학하진 못했지만 다행히 인서울엔 성공했다. 선임은 새로이 펼쳐진 제 앞날이 꽃길일 거라 믿었다.

부모님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그녀를 서포트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를 결심했을 때도,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부모님은 적금을 탈탈 털어서 그녀를 지원했다. 딸 하나인 집이라 최대한 잘 키워 보려고 아등바등한 부모덕에 선임은 딱히 궁핍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적어도 대학교 졸업할 무렵까진 그랬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궁핍함이란 것은 비단 밥을 굶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나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 친구가 부모 잘 만나 떵떵거리며 사는 것, 나는 매일 지옥철에 몸을 싣고 출퇴근하는데 친구는 졸업과 동시에 2억짜리 스포츠카를 선물받은 것,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청약 통장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그녀 앞에서 사실 제가 물려받은 강남의 한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하는 친구.

그 상대적인 빈곤 앞에서 선임은 마음이 궁핍해졌다.

‘쟤보다 내가 학점이 더 좋았는데 왜? 쟤보다 내가 도서관에 더 오래 앉아 있었잖아. 쟤보다 내가 더 똑똑한데, 쟤보다 내가 더 예쁜데!’

하등 저보다 나아 보일 것 없었던 친구의 부유함은 선임에게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아니, 차라리 그건 괜찮았다. 부모 잘 만나는 게 로또 맞는 것보다 어렵다던데 쟤는 운 좋아 로또 맞았나 보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 됐으니까.

그보다 더 그녀를 힘들게 한 건 입사 직후 들려온 다른 친구의 결혼 소식이었다. 이름 김유주. 부유한 친구와 더불어 대학 시절 선임과 어울려 다니던 삼총사 중 한 명이었다. 김유주는 선임과 비슷한 가정환경을 가진 아이였다. 지나치게 쪼들리지도, 손가락을 빨지도 않았지만 매 학기 등록금 걱정을 해야 하는 정도의 형편이었다. 그녀는 삼총사 중 유난히 부유했던 다른 친구를 늘 부러워하곤 했고, 비슷한 처지의 선임과 함께 몰래 그 친구의 뒷담화를 까기도 했다.

졸업을 앞둔 어느 날, 김유주의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직원이 삼백 명인 회사의 오너 아들과 결혼을 한다지. 혼전 임신이라고 그랬던 거 같은데.’

그때까지만 해도 속으로 조금 비웃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김유주의 결혼식 날 선임은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았다. 신라 호텔에서 진행된 유주의 결혼식은 지금껏 선임이 보아 온 어떤 결혼식보다 호화스러웠다. 먹을 것도 없는 뷔페에 와글와글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 도떼기시장만 경험했던 선임의 눈에 유주의 결혼식은 공주 마마의 결혼식처럼 느껴졌다. 셀 수 없이 늘어선 축하 화환과 유명 가수의 축가, 테이블마다 장식된 아름다운 생화…….

선임은 멍하니 유주를 바라보았다. 하객이 있는 곳보다 한 단 높이 위치한 버진 로드는 유주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웨딩드레스를 보며 선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남보고는 부모 잘 만나서 호강한다고 그렇게 욕을 하더니 지는…….’

결혼식을 다녀온 날 선임은 정수리에 술이 찰랑거릴 때까지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런 후에 내린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보증금 천에 월세 오십만 원, 이 구질구질한 방구석을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남자 하나 잘 물어서 시집가고 말겠다고.

그러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바이디오는 직원이 백 명도 안 되는 중소기업이었다. 그마저도 고인 물이라 뉴 페이스를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회사에서 안 되면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김유주 그 얄미운 계집애는 소개팅 시켜 달란 선임의 부탁을 에둘러 거절했다.

―남편한테 한번 물어봤는데 남편 친구들은 다 애인이 있거나 비혼주의자래. 소개팅은 좀 어렵겠다, 선임아.

흥, 비혼주의자는 개뿔.

급이 안 맞으니 소개 못 시켜 주겠다는 거겠지. 지는 돈 많은 남자 만나 떵떵거리면서 친구 잘되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거지? 나쁜 년.

선임은 그날 밤 오랜만에 부잣집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신나게 유주의 뒷담화를 깠다.

이름은 선임인데 왜 직급이 주임이냐는 우스갯소리를 한 백 번쯤 들었을 무렵이었나. 기철이 입사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기철은 남달랐다. 보통 회사원과 달리 딱 봐도 귀족적인 인상이었고 회식 다음 날 술이 떡이 된 몰골조차 반지르르했다. 휴대폰은 늘 최신형. 가끔 메고 오는 가방은 검색해 보니 400만 원대의 명품이었다. 전사적인 회식이 있었던 다음 날, 벤츠에서 내리는 그를 보았다.

‘왜 조수석에서 내리지? 설마 여자 친구가 데려다준 건가?’

막 지옥철에서 내려 회사로 들어가던 선임은 뭔가에 홀린 듯 기철을 바라보았다.

“엄마, 갈게요!”

기철이 차 문을 닫으며 하는 말이 선임의 귀를 사로잡았다.

‘엄마?’

짙게 선팅이 된 차창 안쪽으로 중년 여성의 실루엣이 보였다. 얼굴까지는 보지 못했지만 목덜미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다이아 목걸이만큼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딱 봐도 ‘나 사모님이요’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는 듯한 차림새의 여자였다.

“드디어 찾았네.”

선임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그 후로 선임은 쉴 새 없이 기철에게 추파를 던졌다. 탕비실에서 마주치면 모른 척 냉장고에서 홍삼 음료를 꺼내 주기도 하고, 그가 잔일을 부탁하면 두말하지 않고 처리했다. 그가 사적인 업무에 법인 카드를 유용하는 일 정도는 알고도 모른 척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기철은 팀원들 중에서도 유난히 그녀를 친근하게 대했다. 일말의 희망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저기, 팀장님…….”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 가슴앓이를 끝내기 위해 용기 내어 그의 자리를 찾아간 선임의 눈에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들어왔다. 켜진 액정엔 ‘melody’라는 이름과 함께 빨간색 하트가 붙어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박 주임?”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느냐고 물어보려던 선임은 힘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melody가 대체 누구지? 외국인인가……. 장거리 랜선 연애 뭐 그런 거? 하긴, 김기철 팀장님 저렇게 멀쩡한데 여자 친구가 없을 리 없겠지…….’

선임은 기철의 휴대폰에 저장된 그 ‘melody’가 선율일 거라곤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기철의 애인의 정체가 누군지 알게 된 건 계순이 회사로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운 날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선율의 따귀부터 날려 버린 그 여자가 몇 달 전 기철을 회사까지 태워다 준 여자와 동일 인물이란 걸 눈치채고 얼마나 놀랐던지. 선임은 마치 실연당한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러니까 한 팀장이랑 비밀 연애를 하고 있었단 거지? 그래서 내가 그렇게 추파를 던지는데도 모른 척한 거고?”

하아. 진짜 짜증 나네.

그때부터 선율은 선임에게 눈엣가시였다. 기철과 정작 아무 관계도 아닌 건 자신이면서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건지. 선율의 존재를 느닷없이 나타난 첩처럼 느끼는 자신이 한심하고 자괴감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나?’

애써 마음을 다잡은 선임은 예전과 다름없이 사근사근하게 기철을 대했다. 대충 눈치를 보니 선율과 기철의 사이가 꽤 위태로워 보여 언젠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몇 달이 흐르고 집에서 쫓겨난 기철이 자신을 찾아왔다. 마음을 몰라주어 미안하다고 입을 맞춰 오는 기철을 기꺼이 받아 주던 날, 선임은 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기철과 같은 집에서 잠들고, 눈을 뜨고, 잠자리를 하고.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였다. 기철은 때때로 선율과 유신의 동태를 물어 왔다. 선율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 기철의 눈동자는 늘 뜨거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마음이 아직 선율에게 있음을 알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필요한 건 기철의 배경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난 김기철이랑 결혼만 하면 돼. 사랑이 뭐 밥 먹여 주나? 요새 돈 많은 사람들 애인 두엇씩 두고 사는 거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데 김기철이 누굴 사랑하든 무슨 상관이야? 한주그룹 며느리만 되면 박선임 인생 피는 거야. 한 푼 두 푼 모아서 반전세로 돌릴 궁리 안 해도 된다고!’

물론 시어머니 자리가 보통이 아니란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에 불안함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그딴 건 사소한 문제였다. 부모님 등골 마지막으로 한 번 거하게 빼서 혼수 마련할 생각에 선임은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꿈은 모터쇼에서 한주자동차가 폭발하면서 함께 날아갔다. 김한주 회장의 구속, 반토막이 난 주가, 연일 휘청대는 그룹 상황이 매일같이 보도되었다. 결정적으로 기철이 감옥에 수감된 후 선임의 인생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선임 씨 괜찮아? 김 팀장 그렇게 돼서 어떡해?”

회사에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위로를 건넸고.

“어휴, 선임아. 나 오늘 기사 봤어. 네 예비 신랑 감옥 갔다며? 어쩌니, 안쓰러워서.”

유주는 대놓고 비아냥댔다.

그들이 어떻게 알았냐고? 기철과 사귄 직후에 제 입으로 자랑했으니까!

내가 한주그룹 회장 아들을 만나고 있다고. 곧 결혼할 것 같다고.

친하게 지내는 회사 사람 몇 명과 유주를 비롯한 동창들에게 은근히 흘린 얘기들이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야, 김유주! 예비 신랑은 누가 예비 신랑이야? 몇 달 사귄 걸로 예비 신랑이면 지금껏 네가 만난 남자들도 다 예비 신랑이니?”

“선임아, 난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너희 동거까지 했다고 들어서…….”

“미혼 남녀가 마음 맞으면 같이 살 수도 있는 거지. 내가 청첩장을 돌리기를 했어, 식장을 잡기를 했어?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절대 하지 마. 얘가 누구 앞길 막으려고 작정을 했나!”

다른 게 지옥이 아니라 이게 지옥이었다. 선임은 카드값을 메우기 위해 회사에 나갔고 매일 아침 죽지 못해 눈을 떴다.

그 와중에 들려온 선율의 결혼 소식은 거의 그녀를 미치게 했다.

‘나한테 쓰레기 더미를 넘기고 자기 혼자 빠져나간 년이 결혼을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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