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선율은 무척 당황했다.
분명 가방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커다란 상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게 어디 간 거지?”
평소 정리 정돈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 가방 안엔 온갖 잡동사니가 함께 들어 있었다. 파우치와 USB, 태블릿과 립스틱이 뒤섞인 가방을 뒤지고 또 뒤지다가 결국 우르르 쏟아 보기까지 했으나 상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 회사에 놓고 왔나 봐……. 내 정신머리 어떡해. 진짜 미쳤나 봐. 너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데.”
선율이 낭패한 얼굴로 말했다.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던 유신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선물이라면 이거 말하는 거예요?”
까만색 상자에 금색 띠가 둘린 그것은 선율이 찾던 물건이 맞았다. 선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왜 거기서 나와?”
“오늘 아침에 내 차에 떨구고 갔던데.”
“아.”
선율은 오늘 아침에 유신의 차를 타고 출근한 걸 떠올렸다.
‘그때 흘렸나 보네.’
야심 차게 준비한 깜짝 선물이 무산된 건 아쉽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선율은 비장한 얼굴로 유신의 장갑을 벗겼다.
“장갑은 왜.”
난데없이 드러난 화상 흉터에 유신이 본능적으로 손을 움찔했다. 선율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왼손을 딱 붙들었다.
어둑한 교정, 살짝 불어오는 바람, 풀벌레 소리 하나 없는 정적.
고백하기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다. 선율의 손가락 끝이 유신의 손등을 쓸었다. 왼손 약지에서부터 손등을 뒤덮은 화상 흉터는 유신의 지나온 세월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흉측할지도 모르지만 선율의 눈에는 더없이 고마운 상처다.
“네 모든 게 좋지만 난 그중에서도 이 손이 제일 좋더라.”
선율은 유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짧게 한 번, 그리고 길게 한 번.
“예뻐.”
그녀의 숨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착하고.”
은은한 향기가 나는 입술이 손등을 적시자 유신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손등에 상처를 입은 후 늘 장갑 안에 갇혀 있던 손이었다. 매사 자신감 넘치는 유신이지만 이 손만큼은 누구에게도 보여 주기 싫었다. 제 상처이자 과오이자 어쩌면 죄라서.
이 손을 볼 때마다 불구덩이에 처박히던 준기가 떠올라서 때로는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싫었던 그 상처는 선율이 손등에 입을 맞추는 순간 마법처럼 아물었다. 내내 아팠던 자리에 통증이 순식간에 멎고 어느새 새살이 돋았다.
“이제 이 손 내 거라고 찜하는 거야. 족쇄 채워서.”
선율은 박스 안에서 시계를 꺼내 유신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은색 테의 시계는 늘 장갑을 끼고 다녀 유난히 하얀 손에 잘 어울렸다.
“구해 주고 지켜 주느라 고생 많았어. 아픈 줄도 모르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유신은 뜨거워진 눈으로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상자를 슬쩍 열어 보았을 때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녀가 직접 의미를 더해 주고 나니 세상 어떤 물건보다 귀하고 근사했다. 말없이 한참이나 시계를 바라보던 유신이 가만히 눈을 들었다.
“죽을 때 관에까지 가지고 들어갈게요. 선배도 그렇게 해 줄 건가?”
“응?”
유신이 상자 안을 채우고 있던 포장용 습자지를 헤집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유신의 것과 똑같은 모양의 여성용 시계였다.
“언제 이걸……?”
“족쇄, 나만 차면 억울하잖아.”
아침에 조수석에 떨어진 상자를 발견하고 선율의 계획을 눈치챈 그는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 백화점에 같은 디자인의 여성용 시계가 없어 부산에서부터 시계를 공수해 왔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손 줘요.”
놀란 눈을 한 선율의 손을 유신이 가만히 끌어당겼다. 하얗고 고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천천히 시계를 채워 주었다.
“아프지도 고생스럽지도 않았어.”
입에 넣고 잘근잘근 깨물면 단내가 날 것 같은 그녀의 손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치열하긴 했지. 선배에게 오는 길은 늘 나에게 어려웠으니까.”
나직이 속삭인 그가 고개를 들어 선율과 눈을 맞췄다.
“사랑해요.”
밥 먹듯 말해 줘도 모자란 말.
“사랑해.”
숨 쉬듯 떠올려도 갈증이 나는 한마디가 유신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일 분도 빼놓지 않고 사랑하고 있어.”
선율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리다 툭 하고 뺨으로 흘러내렸다.
“나도야. 나도 사랑해, 유신아.”
유신은 그녀의 눈꺼풀에 입술을 묻었다. 맑은 눈물을 닦아 낸 자리에 뜨거운 숨결이 덧그려졌다.
젖은 입술이 선율의 콧날을 타고 내려와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헤집었다. 도톰한 입술을 한껏 빨아들였다가 놓아준 자리로 부드럽게 혀가 얽혔다. 짠 내를 품었던 살덩이가 어느새 달콤해졌다. 서로의 호흡이 녹아든 자리에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스윽.
불현듯 스커트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키스에 열중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선율은 그의 손이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을 때에야 이질감을 알아챘다.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손길에 숨을 헐떡이며 선율이 물었다.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유신은 모른 척 몸을 기울였다. 아예 벤치에 눕혀져 버린 선율의 위로 그가 올라왔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빛은 장난이라고 보기엔 위험할 정도로 색정적이었다.
설마 여기서?
선율은 다급하게 유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너 그러다가 손모가지 날아가는 거 알지.”
그러나 거침없이 몰아치는 유신 앞에서 그녀의 힘은 한없이 미약했다.
“예쁜 손이라며.”
그의 숨이 젖은 귓바퀴를 나른하게 핥았다.
“그러니까 이 손으로 하는 짓은 뭐든 용서해.”
“읏……!”
작게 반항하던 움직임은 유신의 노련한 손길에 점차 멎었다. 그의 손길은 정성스럽게 선율의 곳곳에 불을 지폈고 선율은 뜨거워진 제 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처음 입술을 나누었던 교정의 벤치 위.
세상에 오직 둘만 남은 듯한 고요 속에 살결의 마찰음이 울렸다. 더없이 충만한 밤이었다.
* * *
바이디오는 선율과 유신의 결혼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둔 오늘 바이디오 직원들은 이색적인 청첩장을 받았다. 시간과 장소 대신 아주 간결하게 두 사람의 웨딩 사진과 한 문장만이 쓰인 청첩장이었다.
<평생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이 앞에서 담담히 고하는 사랑의 맹세였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정에 사람들은 부러움을 느꼈다.
“그럼 우린 따로 결혼식엔 참석 안 하는 건가?”
“가족이랑 친지 몇 명만 불러서 작게 할 생각인가 봐. 의외네. 조유신 이사 명성이면 5성급 호텔에서 초호화 결혼식으로 치를 수도 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휘유, 웨딩 사진 보니까 진짜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진짜 부럽다.”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일 때마다 그들의 결혼 얘기를 하며 하루를 채웠다.
물론 모두가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니었다. 탕비실에서 여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듣던 양 팀장, 아니 양아준 대리는 한껏 심술이 났다. 제 앞으론 따로 청첩장이 오지 않아 오후 늦게야 결혼 소식을 알게 된 그는 다른 직원의 손에 들린 청첩장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예쁘긴 뭐가 예뻐? 삐쩍 말라서 뼈다귀가 따로 없구만.”
“꺅, 깜짝이야! 양 대리님 언제 오셨어요?”
“탕비실을 뭐 예약하고 오나? 그거 이리 줘 봐.”
우격다짐으로 청첩장을 빼앗은 그가 입술을 삐죽였다. 청첩장에 찍힌 선율과 유신의 모습은 제가 봐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근사했다. 까만 배경에 두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선 모습은 당장 광고 포스터로 써도 될 정도였다. 그러니 더 심술이 났다. 오늘 아침에도 저를 갈군 여자가 저렇게 천사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흥, 요새 결혼식 준비하느라 그렇게 바쁘신 거였구만? 멀쩡한 미팅을 절반으로 줄여 놓는 의미가 뭐겠어! 일 안 하고 놀고먹겠다는 거 아냐!”
“그건 아니죠, 양 대리님. 비효율적인 미팅이 너무 많다는 팀원들 클레임 때문에 미팅을 줄이는 거라고 한선율 팀장님이 그랬잖…….”
“말이야 번지르르하지! 요새 한 팀장 얼굴 통통해진 거 못 봤어? 팀원들은 일하느라 다 죽어 나가는데 자기만 잘 먹고 잘살아서 그런 거 아니야!”
“조금 전까진 삐쩍 마른 뼈다귀라고…….”
“사진이 그렇단 얘기지, 사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은 양아준 대리가 쓸쓸하게 퇴장했다. 탕비실에 남은 직원들은 요새 양 대리가 갈굼을 많이 당해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다고 수군댔다.
팀장에서 팀원으로 강등된 그는 매일같이 선율에게 기본적인 업무 방식이며 태도를 지적받았다. 매일 1, 2분씩 지각하는 것, 한 시간에 한 번씩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오는 것, 회의록을 공유하지 않는 것 등등.
진즉 고쳐져야 했을 부분이지만 달리 말하면 입사 10년이 넘어서까지 고쳐지지 않은 고질병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선율은 하루가 멀다 하고 양아준을 팀장실로 불러들였다. 개인 면담이 끝나고 나면 팀장실에 냉기가 펄펄 날린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것을 증명하듯 양아준의 뺨은 날이 갈수록 홀쭉하게 말라붙었다.
“어휴, 양 대리 진짜 골 때리네. 자기가 아직도 팀장인 줄 아는 거야 뭐야?”
“그러게나 말이야. 양 팀장 밑에 있을 땐 하루에 미팅만 일곱 개씩 있었잖아. 팀장 바뀌고 팀원들 모두 좋아 죽는데 자기 혼자 모르나 봐.”
“그런 눈치도 없으니까 강등당했겠지.”
직원들이 키득거리며 커피를 손에 들고 나갔다.
딸그락딸그락.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탕비실에 조용한 소리가 울렸다. 파티션 반대편 구석에서 컵을 씻고 있던 박 주임이었다. 기척을 죽이고 밖의 소리를 엿듣고 있던 박 주임의 눈썹이 힐끗 치켜 올라갔다.
‘뭐야. 한선율 팀장 결혼해?’
그녀는 씻고 있던 컵을 그대로 내려놓고 커피 메이커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그곳엔 방금까지 있던 직원이 실수로 떨어트리고 간 청첩장이 있었다. 박 주임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청첩장을 열었다.
“하. 짜증 나.”
사진 속 선율과 유신의 모습은 시샘이 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심플한 드레스를 우아하게 소화하는 선율이나 모델보다 더 모델 같은 유신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열불이 치밀었다.
“누군 이렇게 망했는데 누군 이렇게 잘살고 세상 참 불공평하네.”
검은 눈자위로 청첩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박박 종이를 찢기 시작했다.
수십 조각으로 갈린 청첩장이 파란색 휴지통 안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