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80)화 (80/85)

외전 8.

“어……어, 안녕?”

여진은 놀란 눈으로 선율과 유신을 바라보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놀란 것도 있지만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레드카펫에 선 배우처럼 근사하고 아름다워 순식간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오랜만이야. 지난번에 동문회에서 보고 처음이네.”

“응. 그땐 인사도 제대로 못했으니 이렇게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네.”

선율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동문회에서 여진은 일부러 선율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교 때 돌았던 선율의 소문이 진짜인 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데없이 김기철이 프러포즈를 하고 유신이 나타나면서 정신이 없었기도 했다.

‘게다가 펍이라 어둡기도 했지.’

그래서 그런가? 여진은 오늘 선율의 모습이 영 낯설게 느껴졌다. 수수하던 대학생 때와 달리 화려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풍기는 선율은 꼭 완성된 미술 작품처럼 예뻤다. 자르르 떨어지는 웨이브 머리에선 윤기가 났고 뽀얀 피부엔 잔주름 하나 없었다. 코랄 핑크 색상의 입술은 탐스러우면서도 싱그러웠다. 김기철이 10년을 넘게 왜 그렇게 목을 매달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조유신은 또 어떻고.

‘자체 발광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여실히 보여 주듯 그는 존재 자체가 압도적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 제일 어둡게 입고 있는데도 가장 빛이 났다.

“조유신 저거 사람 맞냐.”

규연이 자그맣게 속살거린 말에 여진은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사람이 저렇게 생기면 반칙이지.”

말해 놓고 보니 괜한 패배감이 들었다. 그러나 조유신 저렇게 생긴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이제 와서 부러워해 봤자 배만 아프니 여진은 시선을 돌림으로써 애써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유신은 그들에게 고개만 까딱하고 말았고 선율 역시 억지로 말을 붙이려 하지 않았기에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어색해져만 갔다. 딱딱해진 상황을 중재한 건 민서였다.

“야야, 곧 신부 입장이라 가뜩이나 긴장되는데 너희까지 이럴 거야?”

“아, 그래, 참. 민서 네 결혼식이었지.”

“얘 좀 봐! 결혼식 1분도 안 남았거든? 나 드레스 입고 가다 자빠지면 다 너희 때문이야. 알았어?”

“미안, 미안.”

“미안하면 인상 좀 풀어. 너희 모두! 특히 조유신 너!”

민서가 너스레를 떠는 바람에 분위기가 다소 풀어졌다. 두 손을 모으며 사과하는 제스처를 하던 여진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눈앞엔 인상을 푼답시고 눈썹을 꿈틀거리다 더 엉망이 되어 버린 유신이 있었다.

이윽고 신부 입장.

“다녀올게.”

민서가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신부 대기실을 나섰다. 식장으로 이동을 하려던 여진은 앞서 나가는 선율의 뒷모습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사과……해야 하는데. 말이라도 한번 걸어 볼까?’

내내 고민하던 그녀는 선율이 식장으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용기를 냈다.

“선율아.”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만 같아서.

“……이따 민서 결혼식 끝나고 우리끼리 커피 한잔할래?”

낯부끄럽지만 눈을 꾹 감고 내뱉어 본다.

선율은 한참이나 대답이 없었다. 손에 잔뜩 땀이 밴 여진이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건 환하게 웃는 선율의 얼굴이었다.

“커피 말고 술 어때?”

“……술?”

옆에 서 있던 규연이 대신 엄지를 척 내밀며 화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술이 낮에 먹는 술이야. 난 콜!”

여진 역시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콜.”

세 사람은 그제야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힘들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한 미안함이 낮술 한 번으로 훨훨 날아가 버릴까마는 그래도 미안했다고.

진심을 다해 말해 주고 싶었다.

* * *

유신이 발표한 차세대 베링거 모터스의 신차 디자인은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수요가 많은 중형 세단인 데다 스포츠카를 방불케 하는 미끈한 디자인으로 베링거의 신차는 출시도 전에 예약 문의가 줄을 이뤘다. 베링거 모터스의 브랜드 밸류, 맥파이의 명성에 더해 이번엔 새로운 이슈도 있었다. 이번에 출시되는 그 모델이 바로 한주자동차에서 훔쳐 모터쇼에서 전시했던 그 모델이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디자인을 도용당할 뻔한 그 사건을 베링거에서는 똑똑하게 활용했다. 얼마나 욕심이 나면 ‘감히’ 맥파이의 디자인을 손댈 생각까지 하느냐며 은근히 돌려 까는 통에 이미 형편없이 쪼그라든 한주자동차는 다시 한번 위기를 맞았다. 반면 맥파이의 명성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드높아졌다.

바이디오에서는 베링거의 마케팅 전략을 충실히 반영해 광고 제작에 돌입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디자인 도용 사건을 최대한 드러내는 편이 효과적이긴 한데 대놓고 저격을 할 수는 없으니 고심이 깊어졌다.

연일 밤샘 회의가 이어지던 중 먼저 무릎을 탁 친 건 선율이었다.

“좀 과감하게 가자. 어차피 세상이 다 아는 사건인데 굳이 쉬쉬할 필요 있어?”

“그렇다고 대놓고 까발릴 수는 없잖아요. 한주자동차가 탐낸 맥파이의 디자인 전격 공개! 이런 식으로 했다간 당장 고소당할걸요?”

“거기서 한주자동차만 빼면 되지!”

선율은 당장 수첩 위에 글자를 휘갈겼다. 궁금한 주희가 목을 빼어 쭉 보았다가 이내 헤 입을 벌렸다. 수첩 위에는 딱 아홉 글자가 쓰여 있었다.

<훔치고 싶다, 저 완벽함.>

“와…….”

주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감옥에서 김한주 회장이 보면 명치가 싸하겠는데요.”

“제대로 때린 거 같아?”

“완전히요.”

‘훔친다’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무얼 뜻하는지는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한주자동차 입장에서는 뼈를 맞은 셈이겠지만 저 아홉 글자에서 한주자동차를 특정할 어떤 것도 나오지 않으니 소송을 걸 수도 없을 거고.

그야말로 굿 아이디어였다.

그때부터 회의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선율과 주희는 순식간에 광고 콘셉트를 정리하고 대략적인 가이드를 완성했다. 회의 결과를 정리해 방성범 부장에게 보고하는 건 주희의 몫이었다. 선율은 광고주 쪽을 맡았다.

선율은 퇴근하는 길에 유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밖에서 볼 땐 연인이지만 일로 연락을 할 땐 깍듯이 존댓말을 썼다. 항상 보는 눈이 많은 위치라 유신 역시 일할 때는 철저히 광고주로서 선율을 대했다.

“이사님, 한선율입니다. 광고 콘셉트가 나와서 중간보고드립니다. 메일로 따로 보고드리겠지만 일단 오늘 회의에서 나온 내용부터 말씀드리자면…….”

―직접 와서 보고하면 안 됩니까?

“어딘데요?”

―어디겠어.

음?

선율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세요?”

―아니.

“그럼, 집?”

―아니.

그럼 대체 네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반문하려던 선율의 등줄기로 문득 소름이 번졌다.

“……헉.”

생각해 보니 오늘 유신과 저녁에 약속이 있었다. 퇴근하고 7시에 연성대학교 미대 정원에서 보기로 했었다. 심지어 유신이 잡은 약속도 아니었다. 몇 날 며칠을 벼르고 별러 선율이 직접 고른 시간과 장소였다.

‘망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였다. 선율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어떡해! 나 완전 잊고 있었어. 전화하지 그랬어!”

―했어.

“……전화했었어? 미안해. 나 완전 잊고 있었어.”

유신은 조금 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완전히 기억에서 잊을 만큼 중요한 약속이 아니었나 보지.

“아냐, 그런 게 아니라 오늘 회의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정신이 없어서…….”

―나 오늘 회의 일곱 시간 했어요.

“……미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선율은 달려오는 택시를 급히 잡아탔다.

“지금 갈게. 어디야?”

―아직 거기에 있어요.

“30분만 기다려 줘. 아니 20분!”

―그러죠.

유신이 짧게 대답했다. 세 시간도 기다렸는데 그깟 20분 더 못 기다리겠냐는 듯 대꾸하는 그의 말투에 선율은 오늘 그녀가 계획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음을 알았다.

“허억, 허억…….”

정문 앞에서 내린 선율은 약속 장소를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온종일 하이힐에 짓눌려 있던 발에서 피가 났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도착한 곳은 연성대학교 미대 뒤편의 조각 정원이었다. 잔디가 깔린 정원엔 철제 구조물과 각종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주로 4학년들의 졸업 작품이었다. 작품전을 준비할 땐 인생 최고의 걸작을 주무르듯 신경을 쓰지만 졸업하고 나면 관리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러웠다. 유신은 나뭇등걸 벤치에 앉아 있었다. 8년 전 선율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앉아 있던 바로 그 벤치였다.

“허억……. 허억……. 미안해, 유신아. 나 너무 늦었지.”

방학인 데다 늦은 밤이라 사방이 적막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유신의 모습은 꼭 조각 정원의 일부가 된 듯 정적이었다. 바람이 살랑 불었다. 유신의 앞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여기서 내내 기다린 거야? 어디 들어가 있기라도 하지!”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품에서 나는 희미한 바람 냄새가 그가 꽤 오랫동안 이곳에 앉아 기다렸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우리 첫 키스 한 데서 만나자고 한 사람이 누구더라. 내 기억은 여기라서.”

유신이 나직이 웃으며 선율의 정수리를 흐트러뜨렸다. 내려다보는 시선은 고요했다. 세 시간 삼십 분을 기다리고서도 짜증 한 번 안 내는 그였다.

“어휴, 진짜 이 꼴통!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냐! 사람이 안 오면 그냥 집에 갔어야지. 이 어두컴컴한 데서 계속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해?”

“왔으니 됐어요.”

탁탁.

유신이 입술을 길게 늘이며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앉아요.”

통나무를 반으로 툭 쪼개어 만든 벤치는 세월이 흘러 반질반질했다. 유신이 사려 깊게도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내준 덕에 선율은 찬기를 느끼지 않아도 됐다.

“왜 여기서 보자고 했어요?”

“어, 그게.”

선율이 가방을 뒤적였다. 오늘 그녀가 유신을 이곳으로 부른 건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제 결혼식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남들은 한창 바쁠 시기라고 하는데 정작 선율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결혼식장, 신혼집, 신혼여행, 인테리어 등 사실상 모든 결혼 준비는 유신이 도맡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신은 선율의 지갑이 열리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모든 선택권은 그녀에게 주면서 정작 돈은 그에게서 나오니 선율은 한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나름 직장 생활하면서 모은 돈이 있었지만 유신이 벌어들이는 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신은 선율이 차곡차곡 모은 적금 통장을 선우의 학비로 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고, 선율은 마지못해 수락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결혼 선물이었다. 지금껏 변변한 선물 하나 못해 준 게 마음에 걸려서 선율은 오랜 고심 끝에 시계를 골랐다.

그건 선율이 지금껏 백화점에서 가격을 물어본 물건 중 제일 비싼 것이었다. 계산하면서 손이 떨렸지만 이걸 착용한 조유신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 떨렸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빨리 뇌물부터 바쳐야지.’

선율은 기뻐할 유신을 떠올리며 열심히 가방을 뒤졌다. 잠시 후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어…… 없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