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79)화 (79/85)

외전 7.

당연히 상미는 펄쩍 뛰었다.

“아서라! 저 외롭다고 남자 앞길 막는 캐릭터 딱 질색이야. 처녀 적 청주여고에서 근무했을 때 신임 교사가 한 명 있었거든? 남편이 검사였단 말이야. 그 남편이 밤낮없이 일해서 서울로 발령이 났는데 그 여자가 청주에 혼자 남기 싫다고 그 좋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는 거야. 그 후회를 오십 넘어서도 하더라. 얼마나 한심하던지.”

묻지도 않은 과거 얘기를 줄줄 풀어내며 상미가 손을 내저었다. 자신에 대한 복수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눈시울이 벌게진 채로 등을 떠미는 그녀를 복수가 빤히 바라보았다.

“나 그냥 보, 보내는 건 후회 안 할 자신 있고요?”

상미는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솔직히 없었다. 정원에 나란히 앉아 치킨을 뜯던 기억, 주황빛으로 지는 석양을 보며 꼭 늙어가는 우리 같지 않느냐며 노닥거리던 기억…… 추억이 너무 많았다. 어느덧 석양처럼 깊어진 감정을 추스르기가 벅차서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굳이 하나를 택하자면 네가 가는 게 맞다고 봐.”

그러나 보내야 했다. 한창 일할 나이의 복수를 제 곁에 붙잡아 두는 건 욕심이었다. 상미는 아린 마음을 애써 다독이며 말을 이었다.

“스승님이 부르신다며. 그분 베링거 회장 되면 너한테도 좋은 일 아니야? 그럼 당연히 가야지.”

“같이 갈래요?”

“응?”

훅 들어온 한마디에 상미가 들숨을 들이켰다.

“나랑 같이 미국 가자고.”

“얘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상미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러나 안경 너머로 상미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누님이 방금 한 말,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는 남는다는 뜻이잖아요. 이대로 나와 헤어지는 것도 싫은 거 아니에요? 나 지금 거기에 걸고 있는 거예요.”

어느새 복수는 말도 더듬지 않고 있었다. 상미는 그가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강렬한 시선과 달리 하얘지도록 꽉 쥐어진 주먹이 애처로울 정도로 떨렸다.

“글쎄,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봐요.”

복수가 봉투를 내밀었다. 하얀 봉투 겉면에 항공사 로고가 찍혀 있다. 굳이 열어 보지 않아도 안의 내용물을 알 수가 있었다. 상미는 쿵쾅거리는 가슴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거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장면인데?”

“따라 했죠. 저 같은 연알못이 조금이라도 성공률을 높이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연알못?”

“연애 무식자라고요.”

복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봉투에서 손을 뗐다. 살짝 스친 손끝이 불같이 뜨겁다. 봉투를 건네받은 상미의 손 역시 긴장으로 땀이 배어났다.

“기다릴게요. 누님이 나를 선택해 주기를.”

마지막까지 한마디도 더듬지 않고서 복수가 빙긋이 웃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이해해 주겠다는 듯 포근한 미소였다.

* * *

“아이참, 얘는 어쩌자고 덜컥 비행기 티켓부터 끊은 거야? 부담스러워 죽겠네.”

복수가 돌아간 후 상미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30년 가까이 다닌 직장에 사직서를 던질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보다 더 갈등이 되었다.

“따라갈까? 아니지, 아니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덜컥 미국으로 따라가서 뭐 하게? 그냥 한국에 남는 게 낫겠어.”

이성이 손짓하면.

“그래도 이번에 미국 들어가면 또 언제 볼지도 모르는데……. 장복수 없으면 꽤 심심할 거 같은데 따라가서 그냥 말벗이라도 할까?”

마음이 일렁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비행기 티켓을 보며 상미는 몇 시간이나 자리를 서성였다.

‘우리 유신이 다시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다시 헤어질 순 없지 않나?’

그녀는 그녀에게 남은 하나뿐인 가족을 떠올렸다. 기준을 유신에게 두니 오히려 갈팡질팡하던 마음이 맑아지는 듯했다.

유신은 곧 결혼한다. 세상에 둘도 없는 금쪽같은 아들이지만 평생 끼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율이 그런 아이는 아니라는 걸 알지만 아무래도 홀시어머니는 부담스럽기 마련이고, 더 늙으면 소소하게라도 아이들의 손을 빌릴 일이 잦아질 것이다. 상미는 작고한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시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의지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시어머니를 건사하느라 새 출발은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두 아이들 신혼 즐길 동안만이라도 떠나 있는 건 괜찮잖아?’

정확히는 떠난다기보다 복상미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남편이 죽고 한 번도 꿈꿔 보지 못한 그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 인생의 마지막 갈림길이 될 선택의 순간에 상미는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먼저 생각해 주기로 했다. 아들도, 며느리도, 복수도 아닌 복상미 자신을.

‘……가야겠다.’

고민은 길었으나 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상미는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비행기 티켓을 집어 들었다.

저물어 가는 인생의 벗으로 삼기에 더없이 든든한 남자와 마지막 모험을 해 보기로 한다.

* * *

성환과 민서의 결혼식 날이었다.

서울 신도림에서 치러지는 결혼식장은 성환과 민서의 지인들로 북새통이었다.

한껏 단장한 민서는 여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대학교 동창 여진과 규연이 그녀를 둘러싸고 화기애애한 덕담을 나누었다.

“민서야! 너무 예쁘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까 진짜 공주님 같아!”

“그러게. 부케가 민서 미모에 기가 죽어서 시들시들하네.”

“신혼여행은 오스트리아로 가기로 했다며? 진짜 부럽다. 나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 빈 한 번 다녀왔는데 진짜 너무 좋았거든. 사진 많이 찍어 와. 알겠지?”

친구들의 축하에 민서는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응. 찾아와 줘서 고마워.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으니까 진짜 인형 놀이하는 것 같아서 엄청 긴장했는데 너희들 오니까 한결 편해진다.”

“우리가 옆에 있어 줄까?”

“정말?”

“그럼! 식장 들어가 있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는데 네 옆에서 시녀 노릇이나 하고 있지, 뭐.”

여진과 규연이 기다란 보조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막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손님이 찾아와 민서가 잠깐 인사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이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참, 여진아, 그 소식 들었어? 김기철 감방 갔다는 얘기.”

“당연하지! 우리 동기들 중에 그 소문 못 들은 애 없을걸? 와……. 죄목도 엄청나더라. 살인 미수에 몰카까지 찍었다며? 소문엔 그 몰카 피해자가 한선율이라고 하더라.”

“안 그래도 나도 들었어. 집안이 아예 풍비박산이 났더라.”

요새 동기들 사이에선 기철에 대한 소문이 무성했다. 매일 뉴스에서 한주그룹 얘기를 떠드니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규연은 손님을 맞느라 바쁜 민서를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환이랑 김기철이랑 좀 친한 편이었잖아. 성환이 보러 찾아온 남자애들도 지금 다들 그 얘기 하고 있을걸? 내가 아까 지나가다가 언뜻 들었는데 김기철이 몰카 찍은 거 이번이 처음이 아니래.”

“정말?”

“응. 대학교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거야. 김기철이 한선율 몰카 찍었고 조유신이 그거 알고 미쳐 날뛰었다고.”

“대박. 진짜야?”

여진이 놀란 눈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기철은 남자답고 리더십 있는 성격이었다. 거기에다 집안도 좋고 인물도 훤칠해 남녀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그 음흉한 속내를 몰랐던 이들은 설마하니 기철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여진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자세한 건 잘 모르는데 그때 조유신이 누명 쓰고 감방 들어갔다고 하더라. 그래서 갑자기 자퇴한 거였대. 남자애들은 좀 들은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

뉴스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만 들은 여진은 멍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틀어막고 “헐…….”을 연발하던 그녀가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한선율 불쌍해서 어떡해? 나 그런 것도 모르고 대학 다닐 때 걔 피해 다녔는데.”

“너만 그랬어? 우리 다 그랬지. 그때 막 이상한 소문 돌아서 전부 다 걔 왕따 시켰잖아. 되게 헤프고 여우 같은 년이라고 후배들까지 욕을 그렇게 했는데.”

규연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좀 껄끄러워서 저번 동문회 때 인사도 제대로 안 했거든.”

“이게 다 김기철 때문이야. 한선율 소문 그렇게 낸 거 김기철이라고 하더라.”

“진짜 그렇게까지 했다고?”

“그렇다니까! 종수한테 들으니 가관도 아니더라.”

여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만나면 사과해야겠네…….”

“만나 주면 다행이지. 우리가 대놓고 선율이 따 시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옆에 있어 주지 못했잖아. 민서는 유학 가고 너랑 나는 취업 준비한다고 바빠서 괴롭힘당하는 거 뻔히 알면서도 막아 주지도 못하고.”

대화를 하다 보니 한숨만 나왔다. 들어올 때와 달리 분위기가 급다운된 두 사람을 보고 민서가 말을 건넸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아, 그게…….”

여진이 대답하려 하자 규연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좋은 날 뭐 하러 남의 구설수를 얘기하느냐는 뜻이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급히 말을 얼버무린 여진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오늘 부케는 누가 받아?”

민서가 조금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 그게. 너희도 아는 사람이야.”

“우리가 아는 사람이면 대학교 동창이란 소린데? 우리 과에서 친하게 지낸 거 우리밖에 없지 않아?”

여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성대학교 미대는 전통적으로 여학생 비율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진과 같은 학번의 경우 유독 여학생이 적었다. 친한 사이라고 해 봐야 여진, 규연, 민서, 선율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마지막 학기에 민서가 유학을 간 후로는 뿔뿔이 흩어졌다.

“설마 규연이 너야?”

여진이 추궁하자 규연이 펄쩍 뛰었다.

“무슨 말씀! 나 비혼주의자인 거 알면서 그래. 굳이 따지자면 네가 더 유력하지.”

“하긴. 근데 난 남친 없어서 부케 받을 일도 없는데? 뭐야, 대체 누군데?”

민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명 남았잖아.”

여진과 규연은 동시에 같은 이름을 떠올렸다.

“설마?”

“……에이, 설마.”

신부 대기실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어디선가 빛이 번쩍번쩍 빛난다 했더니 열린 문 사이로 남녀가 들어왔다. 진그레이 트위드 투피스를 입은 선율과 같은 계열의 슈트를 갖춰 입은 유신이었다.

“안녕.”

여진과 규연을 발견한 선율이 먼저 인사했다. 걷는 것만으로도 런웨이를 방불케 하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여진과 규연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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