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78)화 (78/85)

외전 6.

“얘가 안 때렸다잖아요! 우리 선우가 게으르고 싸가지 없고 공부 못 하는 건 맞는데 적어도 거짓말은 안 하는 애라고. 교문 앞에서 범죄를 모의하는 남자를 보고 신고한 게 잘못이에요? 그놈이 달아나려 하는데 도망치게 두는 게 이 나라 법인가?”

귀를 후비적거리며 앉아 있던 건달의 안색이 싹 변한 건 그때였다.

“뭐라는 거야, 이 여자가! 당신이 거기 있었어? 본 것도 아니면서 어디서 끼어들고 난리야!”

우당탕!

거칠게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난 건달이 우악스러운 얼굴로 선율을 노려보았다. 경찰서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당신?”

선율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굳었다.

키 크고 마른 체격에 왼쪽 눈두덩에 검은 반점.

후드를 뒤집어쓴 모습이 어쩐지 낯이 익다 했는데 눈두덩을 덮은 엄지손톱만 한 반점을 보고 나니 확신이 들었다.

“맞지? 묻지 마 폭행!”

떨리는 손가락이 건달의 코끝을 정확히 가리켰다. 건달은 우뚝 선 채로 험상궂은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뭐라는 거야, 이 여자가!”

“맞잖아! 넉 달 전 원양동 골목길! 길 가던 중년 여성을 스패너로 내리친 거 당신이잖아!”

선율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진동했다. 어둠 속에서 느꼈던 그날의 공포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인정사정없이 스패너를 내리치려던 그 모습이 떠올라 바르르 어깨가 떨렸다.

“……너 뭐야?”

눈을 부라리며 선율에게 다가서던 건달의 눈매가 이내 가늘어졌다.

그제야 선율을 알아본 걸까.

여유 만만하던 그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염병, 진짜!”

짓씹듯 욕설을 내뱉은 그가 홱 등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경찰도 대응하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선율이 뻗은 손은 허공만 쥐었고 재철이 가까스로 막으려 했다가 괜히 엉덩방아만 찧었다. 선우 역시 당황한 건 매한가지였다.

“비켜!”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한줄기 바람처럼 사라지던 그가 발라당 넘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우왁!”

날쌔게 문을 넘어서던 몸이 성냥개비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를 저지한 건 차를 대고 상미와 함께 들어서던 유신이었다. 큰 움직임도 없었다. 그저 긴 다리를 쭉 한 번 뻗었을 뿐이었다. 반드시 토끼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무지막지하게 달려 나가던 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유신이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나이스 샷.”

* * *

유신이 도착한 후 경찰 조사가 착착 진행되었다.

박광남. 39세. 현재 무직. 전과 17범.

왼쪽 눈두덩에 반점이 있는 남자의 프로필은 대략 보아도 막장이었다. 그는 김한주 회장의 밑에 있던 조폭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밀어 버리고, 앞길에 걸리적거리는 게 있으면 치워 버리는 김한주 밑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했다. 김한주가 철창신세를 지면서 낙동강 오리알이 된 그는 두어 달 전 고향으로 돌아왔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돌아온 후로도 양아치 짓을 일삼아 한적하던 동네의 분위기가 흉흉하게 변했다고 했다.

김한주의 명령을 받아 상미를 테러했다는 사실을 그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증거 있어?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냐고!]

듣기 싫은 목소리로 내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던 그는 유신의 한마디에 입을 닫았다.

[목격자와 피해자만 있지. 현재로서는.]

[…….]

[증거는 지금부터 찾을 생각이야. 그 분야는 내가 전문이라서.]

[!!!]

[얄팍한 선처라도 받고 싶으면 네 입으로 부는 게 좋을 거야. 3일 줄게.]

그사이 상부로부터 어떤 보고를 받았는지 내내 나태하던 경찰이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그는 박광범에게 자수를 종용하며 연신 겁을 주었다.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태평하던 박광범의 낯이 납빛이 된 건 순식간이었다.

“형, 진짜 멋있었어요. 거기서 다리를 착! 걸어 가지고 캬아.”

신속하게 상황이 정리된 후 경찰서를 나서던 선우가 엄지를 착 치켜들었다. 박광범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충격을 받은 재철과 상미를 선율이 모시고 간 터라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한선우.”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두르며 방정을 떨던 선우는 낮게 깔린 유신의 음성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네?”

유신은 몸을 돌려 선우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앞으론 좀 똑똑하게 움직여. 일이 잘못되면 빨간 줄 그이는 거 순식간이야.”

“네……. 그래야죠.”

“아까 그 상황에선 녹음 버튼부터 누르고 덤비는 게 순서야. 아니면 증언을 서 줄 만한 사람부터 확보하든지.”

“네…….”

선우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었다. 젊은 혈기에 좋은 일 한번 해 보겠다고 냅다 덤비긴 했는데 정작 일을 해결한 건 유신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멍청하긴 했지. 후우…….’

선우는 자책하며 제 머리를 꽝 쥐어박았다. 그때 커다란 손이 어깨를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그래도 잘했어.”

“네?”

“네가 그 여학생 구한 거야. 너 아니었으면 지금쯤 무고한 여학생 하나가 어두컴컴한 창고에서 울고 있을 수도 있겠지.”

“아……!”

묵직한 위로가 선우의 심장을 때렸다. 내가 사람을 구했다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누군가를 구해 본 게 처음이었다. 그 뿌듯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학교에선 문제아, 집안에선 말썽꾸러기로 낙인찍힌 한선우가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형.”

의기소침해 있던 선우의 얼굴이 금세 피어났다.

“저 처음으로 꿈이 생겼어요.”

차를 향해 걷던 유신이 천천히 멈추었다. 그가 진지한 눈동자로 바라보자 선우는 저 밑에서부터 용기가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경찰 되려고요.”

“음.”

“아까 그 무책임하고 나태한 경찰 보니까 울화가 치밀어서! 나같이 억울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나마 난 누나도 있고 형도 있어서 무사히 풀려났지만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사람은 진짜 억울했을 거예요.”

주먹을 불끈 쥔 선우의 모습에 유신의 입가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가 어렸다.

“공부는 좀 하나?”

“……지금부터 하면 되죠!”

“기왕이면 경찰대를 목표로 해.”

유신이 주머니에 손을 꽂으며 돌아섰다. 선우는 쪼르르 그의 곁에 따라붙으며 투덜댔다.

“에이, 제가 경찰대를 어떻게 가요. 고1로 돌아가도 그건 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은데…….”

“나처럼 되고 싶다며. 그럼 노력해야지.”

유신이 차 문을 열며 시크하게 덧붙였다.

“뼈를 깎아 다시 빚을 정도의 노력.”

헐……. 뼈를 깎아 다시 빚으려면 엄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선우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사나이로 태어나 한 번쯤은 죽을힘을 다해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 법이다. 선우는 그 처음을 ‘경찰대’로 정하기로 했다.

“……알겠어요.”

“오늘부터 시작해. 필요하다면 고액 과외든 족집게 과외든 뭐든 붙여 줄 테니까.”

“네…….”

“올해 수능은 글렀고 내년을 목표로 해. 하루 열세 시간 꽉 채워 공부하려면 체력 관리도 좀 해 두고.”

“네…….”

이 형 가차 없네. 왠지 잘못 걸린 느낌적인 느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목표로 삼을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없던 힘도 생겨났다. 명함 한 장으로 경찰을 휘어잡던 그 모습이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

닮고 싶다. 나도 노력하면 형처럼 될 수 있겠지? 경찰 대학교에 진학해 제복을 입고 입학식을 치르고, 멋진 차를 몰고, 예쁜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래서 선우는 태어나 처음으로 노력이란 걸 해 볼 참이었다.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설령 이루지 못하더라도 후회가 없도록.

* * *

김한주 회장의 형이 확정되었다.

징역 8년.

기업 총수치고는 이례적으로 높은 형량이었다. 뉴스에서 온종일 떠들어 대는 보도를 접하며 상미는 오징어 다리를 씹고 있었다.

“어우, 꼬시다. 8년이면 사회 방출될 땐 꼬부랑 할아버지 돼서 나오겠네?”

“저, 저는 좀 아쉽네요. 저런 인간은 그냥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어야 하는데!”

“하긴, 그것도 그래.”

“저, 저 인간이 누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자, 자다가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니까요.”

손으로 공손하게 접시를 받치고 있는 복수는 매우 분한 얼굴이었다. 감히 하늘 같은 우리 누님을 해코지하려 하다니, 감방에서 8년 썩는 걸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 됐다.

‘나오기만 해 봐라. 그때부턴 더 지옥 같은 앞날이 펼쳐질 테니.’

복수는 연신 씩씩댔다.

“그나저나 너 다시 미국 간다며?”

상미의 말에 복수의 안색이 어둑해졌다.

“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고요. 스, 스승님이 부르셔서.”

“스승님이 존 웰슨이라고 했나? 베링거 모터스 부회장?”

“예. 현재 대표 이사 자리가 고, 공석이거든요. 이번 주주 총회에서 새, 새로운 대표 이사를 선출할 모양이라 힘을 실어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오, 그렇게 말하니까 너 되게 있어 보인다.”

상미는 가볍게 웃으며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복수는 서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나 미국 간다는데 왜 저렇게 태평한 건데. 이번에 들어가면 언제 다시 나올지도 모른다는데 웃음이 나오느냐고, 지금.

“아, 안 서운해요?”

“응?”

“나 미국 가는 거 아, 아무렇지도 않으냐고요.”

상미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물론 아무렇지 않지는 않지. 저녁때면 같이 밥 먹어 주는 사람 있어서 좋았는데 앞으론 좀 쓸쓸하겠다. 마당 잔디 깎을 때도 유용했는데. 참, 갑자기 아프면 119보다 먼저 달려와 줄 사람도 없네.”

“…….”

“장 보러 가는 것도 문제야. 너랑 같이 있으면서 바리바리 사 오는 게 익숙해졌는데 이제 짐꾼 없어졌으니 조금씩 사야겠다.”

“…….”

“그러고 보니 너랑 같이 한 게 많네.”

상미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졌다. 숨기고 싶었지만 기어이 툭 떨어져 버린 눈물 한 방울에 너울대는 감정을 감출 수도 없었다.

“왜 안 아쉽겠어. 너무 아쉬워서 주책맞게 눈물이 난다, 야.”

“누님.”

복수가 설거지를 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상미의 눈을 본 순간 오랫동안 묵혀 두었던 감정이 요동쳤다.

“나 그, 그냥 가지 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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