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77)화 (77/85)

외전 5.

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유신이 성큼성큼 다가와 큰절을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조유신이라고 합니다.”

바른 자세로 두 번 절을 마친 그가 나직한 시선으로 봉분을 바라보았다. 살아 계셨다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얘기를 했을 텐데. 불러도 대답이 없는 봉분 앞에서 유신은 마음속으로 감사 인사를 올렸다.

‘따님을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옆에서 선율과 선우의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괜히 숙연해진 유신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음?”

봉분 위에서 불어온 청량한 바람이 유신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것은 그저 바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손길처럼 또렷한 감촉이기도 했다. 피부 위에 잔상처럼 남겨진 감각에 기이한 기분이 들어 봉분을 바라보니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유신의 귀에는 바람에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얼굴값, 돈지랄하지 말고 평생 떠받들고 살아!

유신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거릴 정도로 놀랐다. 곁눈질로 보니 선율과 선우는 두 손을 모은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다.

봉분 위에 피어난 들꽃 한 송이가 하늘하늘 움직였다. 반가운 사람에게 손을 흔드는 듯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에 유신의 가슴에 잔잔한 파동이 번졌다.

재철에게 듣기로 선율의 어머니는 생전 무척 호탕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남자란 자고로 얼굴값, 돈지랄만 안 하면 된다는 게 신조였는데 그거 따라 살다 보니 이렇게 후줄근한 남자를 만나 버렸다고 입버릇처럼 재철을 갈궜다고 했다.

묵묵한 시선으로 봉분을 바라보던 유신의 입가에 이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다녀가셨군요.’

바람이 그쳤다.

유신은 꿈쩍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봉분을 바라보며 나직이 입술을 움직였다.

“예. 어머님. 평생 여왕처럼 떠받들고 살겠습니다.”

그것은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야 할 약속이자 다짐이었다.

절대 깨지지 않을 맹세이기도 했다.

* * *

상견례 날이었다.

전날 성묘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간 유신이 상미와 함께 포항으로 내려왔다. 한정식집엔 선율과 재철이 미리 도착해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멀리서 오신다꼬 고생 많으셨지요? 선율이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한재철이라꼬 합니다.”

재철이 이틀 내내 진지하게 연습한 서울말로 인사를 건넸다. 상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네. 안녕하세요, 사돈어른. 복상미라고 합니다.”

아주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자리인 만큼 상차림은 무척 훌륭했다. 길쭉하게 늘어선 테이블 세 개에 가득 찬 요리를 사이에 두고 네 사람이 마주 앉았다.

“우리 유신이가 누굴 닮아 가꼬 이렇게 훤칠하나 했더니 안사돈을 닮아서 그런 거군요, 허허!”

“과찬의 말씀이세요. 선율이야말로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로 예쁜걸요.”

“선남선녀가 만나 짝을 이룬다고 하니 더없이 마음이 뿌듯합니다.”

“저도 그러네요, 호호.”

상견례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진행이 되었다. 재철과 상미는 서로의 자식을 칭찬하느라 바빴고 덕담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중간에 낀 유신과 선율은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은 칭찬 퍼레이드를 묵묵히 감당해야만 했다.

‘우리 아빠 오늘 입에 모터 단 것 같지 않아?’

‘우리 엄마도요.’

선율과 유신은 몰래 눈빛을 교환하며 쿡쿡 웃었다.

결혼식 날짜와 장소, 신접살림을 차릴 집과 예물 등에 대해 순식간에 의견이 교환되었다. 재철과 상미는 뭐 하나라도 더 해서 보내려고 안달이었고, 받는 쪽에서는 그보다 더 많이 돌려주기 위해 계산기를 두드렸다.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굵직한 사안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돈총각은 안 왔나 봐요.”

편안한 마음으로 첫술을 뜨던 상미가 물었다. 재철은 무척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오늘 뭐 모의고사 본다꼬 못 온다고 카데요. 고3이 무슨 벼슬이라꼬, 공부한다 카는데 뭐 어쩌겠습니까.”

“고3이면 벼슬 맞죠. 전 오히려 기특하네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맨날 싸돌아댕기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 가꼬 갑자기 공부하겠다고 카데요.”

“자신의 의지로 공부를 시작한 애들은 성적도 금방 오르더라고요. 선율이 닮았으면 머리도 좋을 테니 잘할 거예요. 서울로 대학교 오게 되면 제가 많이 챙기겠습니다.”

“아이쿠,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따스하게 미소 짓는 상미를 보며 선율은 문득 계순을 처음 소개받던 자리가 떠올랐다. 그때 계순이 뭐라고 그랬더라.

[엄마 없이 자라서 그 모양이냐, 동생이 어려서 대학 공부 시키려면 돈 많이 들겠다, 내 아들 등골 빼서 공부 가르치는 건 아니지?]

그랬었지 아마.

얼굴 한 번 보지 않은 선우에 대해 뭘 안다고 그렇게 막말을 해 댔던 건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기도 차지 않았다. 내 동생 공부는 내가 알아서 시킨다고, 김기철 월급보다 내 월급이 10만 원 많다고 쏘아붙여 줄 것을.

하지만 상미는 달랐다. 선율이 닮았으면 똑똑할 거고, 선율이 닮았으면 잘생겼을 거고, 선율이 닮았으면 착할 거고……. 그녀의 상상 안에서 선우는 세상에 둘도 없을 엄친아가 되어 있었다.

계순을 만났을 때와는 180도 다른 상황에 선율은 코끝이 찡해졌다. 내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누군가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동생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품어야 할 대상이 된다는 게 눈물 나게 행복했다. 지금 제 곁에서 손을 잡고 있는 이 남자가 더없이 소중해지는 이유다.

“아이쿠, 실례합니다.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와가…….”

식사가 거의 끝났을 무렵 재철이 휴대폰을 들고 일어났다. 아까부터 요란하게 울리던 진동 소리가 안 그래도 신경이 쓰이던 상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받으세요.”

“예. 그럼 잠시…….”

남은 세 사람은 편안히 대화를 이어 가며 식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잠시 후 장지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뭐라꼬요? 우리 선우가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꼬예?”

* * *

밥 먹다가 갑자기 맞은 날벼락에 모두가 수저를 놓고 경찰서로 출동했다. 사색이 된 재철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내가 분명히 들었다고요! 분명히 저 남자가 여고생 하나 따먹……. 아니, 그러니까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그랬다니까요? 그게 아니고서야 멀쩡한 성인 남자가 30분 넘게 교문 앞에 어슬렁거릴 일이 뭐가 있어요?”

“허, 참! 생사람 잡고 있네. 내 발로 내가 서 있겠다는데 문제 될 거 있어? 교문 앞이 네 땅이라도 돼? 엉?”

경찰서 안에선 선우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변하고 있었다. 그의 옆자리에 다리를 꼬고 앉아 귀를 후비고 있는 건 30대 후반의 남자였다. 거만하게 덜렁대는 다리를 보니 경찰서에 한두 번 드나든 폼이 아니었다. 딱 건달 그 자체였다.

“자자, 고마하이소. 학생도 적당히 하고!”

두 사람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던 경찰이 중재에 나섰다.

“뭘 적당히 해요!”

“증거 없고 다른 목격자도 없다 안 하나! 학생이 잘못 들은 거 아이가? 고3이라 스트레스가 과했는가베.”

“아니라니까요. 두 귀로 똑똑히 들었어요. 교문 앞에서 영계 하나 픽업해 간다고, 간만에 몸보신이나 해 보자고 막……!”

“증거 있나? 뭐 녹취록이라든가 그칸 거 말이다. 휴대폰으로 간단히 녹음한 것도 괜찮고.”

그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항변하던 선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눈동자를 굴려 건달을 한 번 쳐다본 선우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분명히…….”

“학생, 교문 앞에서 피해자랑 몸싸움했다믄서? 이짝에서 걸고넘어지면 폭행죄로 감방 드가는 거 모르나? 이짝에서 선처해 준다고 할 때 냅다 고맙다고 하고 집에나 가그래이. 괜히 버팅기다가 골 아파진다 안 카나? 이짝에서 학생이라고 한 번 봐준다 카니 운 좋은 줄 알그라!”

선우는 무척 억울했다. 교문 앞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남자를 경찰에 신고하고 붙잡는 과정에서 몸싸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결단코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남자가 폭행을 당했다며 맞불을 놓는 바람에 정작 자신이 가해자 신세가 된 것이 어이가 없었다.

“아이고야, 아파 죽겠네. 진단서 떼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건달 같은 남자가 살짝 멍이 든 팔을 어루만지며 인상을 썼다. 선우는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엄살떨지 말죠? 그 정도로 아파 죽겠으면 그냥 뒈지든가!”

경찰은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퇴근 시간이 코앞인데 이 망나니 같은 학생 하나가 시간을 끌고 있으니 귀찮기 짝이 없었다. 씩씩대는 선우를 살살 구슬리며 그가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고마 이쯤에서 정리합시데이. 박광남 씨는 진술서 쓰고 가면 됩니데이. 학생도 고마 집에 가 보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날 한선우가 아니다.

“저 사람 패거리가 있어요. 여고생 픽업해서 무슨 창고로 데려간다고 그랬으니까 그쪽을 조사해 보면 될 거 아니에요!”

“무슨 창곤데?”

“그게 정확히는 모르지만…….”

“증거도 없다, 목격자도 없다, 창고도 모른다,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야? 경찰 시간은 뭐 땅 파서 나오는 줄 알아? 엉?”

급기야 경찰이 소리를 치자 선우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재철과 선율이 끼어든 건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한선우 보호자입니다.”

냅다 한소리 하려던 재철을 말리고 나선 건 선율이었다. 잠시 문 앞에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본 선율은 분노를 꾹 참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한선율이라고 합니다.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왔능교? 상황이라고 할 게 뭐가 있나. 저 학생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대충 해결 봤으니 퍼뜩 데려가이소! 학생이 우찌나 고집이 센지 말도 몬 합니더.”

경찰이 귀찮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이어진 싸늘한 음색에 그의 낯빛이 삽시간에 굳었다.

“경찰이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요?”

“야아?”

“학생이 용기 내서 신고를 했으면 조사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얘가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는데 증거 없다고 막 풀어 주면 돼요? 만에 하나 선우 말이 사실이면 미성년자 납치에 불법 감금에 성범죄까지 성립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거 엄청난 강력 범죄인 거 아시죠?”

“하이고.”

경찰이 골 때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생이 지랄발광을 하더니 보호자는 더하네. 딱 그 표정이었다.

“피해자는 저짝이라 안 캅니까? 학생이 저짝을 폭행한 거라고예.”

“너 저 사람 때렸어?”

선율은 선우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똑바로 얘기 안 하면 집에 가서 탈곡기로 탈탈 털릴 줄 알아.’

무언의 경고에 선우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아니야. 절대 그런 적 없어. 경찰에 신고하니까 막 도망가려고 하기에 붙잡으려다가 손목만 붙잡은 거야!”

“들었죠?”

선율이 선우를 딱 막아선 채 경찰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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