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
“깼죠. 누가 하도 더듬길래.”
“더듬긴 누가 더듬었다고 그래.”
“손 봐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헉.
선율은 유신의 옷 안을 파고든 손을 얼른 빼냈다. 쪽방이다 보니 웃풍이 세서 따뜻한 데를 찾다 보니 거기까지 기어 들어간 모양이었다.
‘못된 손 같으니라고.’
선율은 뜨끔하여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이 시려서 그런 거야. 길고양이가 보닛에 들어가는 거랑 마찬가지 이치라고.”
“누가 뭐래?”
나른하게 웃으며 유신이 옷을 걷었다. 다시 들어오라는 의미였다. 선율은 킥킥 웃으며 얼음장 같은 손을 그의 옷 안에 집어넣었다. 유신은 팔을 꽉 닫아 온기를 가둔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 하고 있었어요? 한숨도 못 잔 얼굴이네.”
“이런저런 생각 하다 보니 날밤 새웠어. 그나저나 어제 일 기억나?”
“전반전만요. 양주까진 괜찮았는데 소주로 넘어가니 정신 못 차리겠던데.”
“연장전까지 했던데? 테이블 정리하다 보니 막걸리 병도 있더라.”
선율이 쿡쿡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조유신 취한 거 처음 보는데 술버릇 되게 웃기더라.”
“……술버릇?”
“충성! 충성! 얼마나 우렁찬지 훈련소 갓 입소한 이등병인 줄 알았어.”
“……에이.”
“정말인데? 어제 하룻밤 만에 군대 다녀온 줄 알았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려던 유신의 뇌리로 번쩍 기억 한줄기가 떠올랐다. 선우에게 업혀 가는 재철의 등 뒤에 대고 경례를 올려붙이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망할.’
그의 수려한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스물여덟, 결코 짧지 않은 인생에서 정신을 잃은 것도 처음인데 술주정까지 하다니.
‘……수치사 각이다.’
유신은 드물게 귓불을 붉히며 말을 돌렸다.
“그래도 나보다 아버님이 먼저 취했어요. 난 제법 버틴 편이었다고.”
“그래그래, 알지. 우리 아빠도 내 나이가 어때서 한 삼백 번 불렀어.”
“당연하죠. 섞어 마셔서 말린 거예요. 술로는 어디 가서 밀리는 놈이 아닌데…….”
“술 취하니 목소리 엄청 크더라. 충성! 단결! 완전 복식 호흡으로 제대로 하던데? 귀청 떨어질 뻔.”
눈에 불을 켜고 놀려 대는 선율을 보며 유신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다 기억나요. 그만해요.”
나직한 음성은 안쓰러울 만큼 자괴감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모처럼 얻은 찬스를 놓칠쏘냐. 선율은 우렁찬 목소리로 척 경례를 붙였다.
“이병 한선율! 명받겠습니다!”
“선배.”
“충성!”
“자꾸 이럴 거예요?”
“시정하겠습니다, 단결!”
“하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도저히 그만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그녀를 보고 유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를 물로 봤겠다.’
불리한 상황을 바꿀 방법은 하나뿐이다.
육탄전.
“엄마얏!”
유신이 몸 위로 올라타는 순간 선율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새카맣게 차오른 동공, 배를 짓누르는 단단한 허벅지의 감촉.
“자꾸 충성, 충성 하는데.”
유신이 붉은 입술을 한 번 핥았다. 새벽녘 어스름에 물든 유신의 더욱 자극적인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났다.
“지금이라도 받을 생각 있어?”
“뭐, 뭘?”
“내 충성.”
충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섹시한 단어였나. 조금 잠긴 목소리가 더욱 매혹적으로 귓가를 감쌌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목덜미로 내려앉았다. 발끝이 절로 오므려지는 감촉에 선율이 몸을 떨었다.
“읏…….”
달팽이처럼 기어오른 혀가 흐트러진 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저 멀리 던져진 이불 때문에 조금 닭살이 돋은 살결 위를 음미하듯 오르내린다. 얇은 레이스 위로 끈적한 막이 덧입혀지고, 무방비한 옷가지가 한 겹씩 풀린다.
“술도 안 깼는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안 깨서 더 좋죠. 취한 김에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보려고.”
“……?”
아직 해 보고 싶은 게 더 남았단 소린가? 뜯고 맛보고 핥고 음미하고 그간 내 몸에 해 온 짓이 얼만데!
선율은 억울한 얼굴로 항변하려 했으나 그녀의 말머리는 이내 유신에게 먹혀들었다. 술에 취해 평소보다 조금 뜨거운 체온이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가녀린 쇄골에, 움푹 들어간 배꼽에 그의 숨결이 머물렀다.
“아……. 미치겠어…….”
기다렸다는 듯 금세 찰랑이는 그녀를 유신은 한참이나 채워 주지 않았다. 제 몸을 숫제 가지고 노는 그를 보며 선율은 ‘해 보고 싶은 거 다 해 보겠다’는 그의 말이 헛된 경고가 아님을 깨달았다. 가슴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입 안엔 가득 침이 고였다.
“유신아, 이제 좀…….”
“좀, 뭐?”
“흐윽.”
“선배 입으로 말해 봐요.”
유신은 짓궂게도 선율의 갈증을 모른 체했다. 붉어진 얼굴로 헐떡이는 선율의 귓바퀴를 느릿하게 핥으며 그가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뭐든…….”
“하던 거 계속할까?”
도리도리.
지금껏 부끄러워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말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유신은 그 말을 잘 알면서도 넘어가 주지 않았다. 애원하다가 나중엔 울먹이는 선율을 보며 유신 역시 인내를 거듭했다. 이윽고 격정을 이기지 못한 선율의 입에서 신음처럼 그 말이 흘렀다.
“들어와…… 줘.”
씨익.
“명받겠습니다.”
유신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땀으로 축축이 젖은 그의 몸이 선율의 위로 부드럽게 겹쳐졌다. 이내 뜨거운 살덩이가 한 덩이로 얽혔다.
“흣!”
쪽창을 기웃거리는 아침 햇살이 유신의 등 뒤에 드리웠다. 땀으로 범벅이 된 연인의 얼굴에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며 유신은 오롯이 제 것이 된 그녀를 탐하고 또 탐했다.
날이 갈수록 저를 미치게 하는 그녀가 이젠 무서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멈출 수가 없어서, 유신은 그녀를 향해 끝없이 치달았다.
* * *
그날 오후.
선율은 약속대로 선우와 함께 엄마의 산소로 향했다. 재철과 해장을 마치고 나온 유신도 함께였다.
“누나가 뒤에 타. 난 형 옆에 탈게.”
선율은 황당한 표정으로 선우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옆에 타? 그 자리 내 거야.”
“누나는 많이 타 봤잖아. 나 차 구경 좀 하게. 형, 그래도 되죠?”
“좋을 대로.”
생글거리며 유신에게 들러붙는 선우를 보며 선율은 기가 찼다. 뾰족한 얼굴로 뒷좌석 문을 열며 선율이 쏘아붙였다.
“형 소리가 자연스럽다? 조유신한테 하는 거 나랑 아빠한테 반만 해 봐. 아예 업고 다니지.”
“형은 대학 가라고 잔소리 안 하잖아. 그리고 말이야. 대학교 안 나와도 이렇게 성공할 수 있다! 그걸 몸소 보여 주신 분인데 내가 존경 안 하게 생겼냐? 수컷들의 세계란 그런 거야.”
“말이나 못하면.”
놀랍게도 선우는 유신을 아주 잘 따랐다. 아니, 따르는 정도가 아니라 떠받드는 수준이었다. 처음엔 얘가 뭘 잘못 먹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깨달았다. 지금 선우의 눈에 비친 조유신이 어떤 모습일지.
대학 중퇴에 군 미필, 게다가 자신과 똑같은 편부모 가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신은 같은 남자가 봐도 근사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행색은 또 어떤가!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슈트에 번쩍번쩍한 시계. 길가에 그냥 주차해 놓기 송구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슈퍼 카의 주인.
그야말로 성공한 남자의 표본이었다.
“와, 차 진짜 좋네요.”
따뜻한 느낌이 감도는 가죽 시트에 한 번, 화려한 대시보드에 또 한 번 감탄한 선우가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차에 관심 있어?”
“차에 관심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와, 진짜 이 깡촌에서는 보기도 힘든 모델인데 직접 타 보기까지 하다니 대박.”
유신이 몰고 온 차는 슈퍼 스터드가 아니라 이클립스라는 베링거 모터스의 대표 모델이었다. 원래 몰던 차는 문형주에게 줘 버렸기에 다른 차를 몰고 온 건데 사실 다음 시즌 모델인 슈퍼 스터드보다는 이클립스가 한국에서 훨씬 유명했다. 수선을 떠는 선우를 보며 유신이 잔잔히 미소를 머금었다.
“나중에 면허 따면 한번 몰게 해 줄게.”
“왁, 진짜요?”
“그래. 누나 말 잘 들으면.”
선우는 경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로망의 집결체 앞에서 그는 나약한 어린양일 뿐이었다.
“이야, 똥 기저귀 갈아 키운 누나보다 처음 본 사람 말을 더 잘 듣네. 한선우 이 기회주의자야.”
“누나가 이 차 가지고 있었으면 누나 말도 들었겠지.”
“네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조유신이랑 결혼하면 내 차이기도 해! 부부 공동 재산 몰라?”
“혼인 신고서에 도장 안 찍었잖아. 언제 파투 날지 알고…… 아얏!”
따악!
선율이 뒷머리에 꿀밤을 놓았다. 선우는 평소대로 버럭 화를 내려다가 힐끗 쳐다보는 유신의 시선에 곧장 입을 다물었다.
“……하아. 착한 내가 참고 말지.”
세상에. 한선우가 지랄발광을 참는 날이 오다니!
조유신 효과에 새삼 놀라는 사이 어느새 차가 산기슭에 진입했다.
“내립시다.”
엄마가 묻힌 곳은 기계읍의 야트막한 산이었다. 차가 진입할 수 있는 곳까지 가서 주차를 마친 이들이 차례로 차에서 내렸다.
“여기서 10분만 걸어 올라가면 돼.”
유신은 대답 대신 선율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깍지 낀 채로 눈앞에서 흔들리는 두 사람의 손을 보고 선우가 닭살을 털었다.
“어우, 유난이다, 유난! 저 꼴 보기 싫어서라도 내가 앞서가고 말지.”
고3의 패기로 성큼성큼 앞서 걷는 선우를 따라 선율과 유신이 산책하듯 산을 올랐다. 땅거죽을 뚫고 푸릇푸릇 자라기 시작한 풀잎과 듬성듬성한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참 어여쁜 날이었다.
“엄마, 나 왔어. 잘 있었어요? 오랜만에 왔다고 딸 얼굴 까먹은 거 아니지?”
잘 다듬어진 봉분 앞에 선율이 무릎을 꿇었다. 숙취에 허덕이며 재철이 새벽부터 푹 삶은 보쌈 고기와 소주 한 병을 정성스레 내려놓는 손길이 애틋했다. 선율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묵념을 올렸다.
그때 선우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이제 술 뿌려야 하지? 내가 할게.”
매년 차례를 올릴 때마다 어색하게 서 있던 선우가 웬일로 두 손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하얀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봉분 위에 조금씩 뿌려 준 그가 선율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눈을 꾹 감은 모습은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엄마, 오늘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딸 언제 시집갈지 거기서도 걱정 많았을 텐데 사윗감 데려왔으니 매의 눈으로 한번 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