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73)화 (73/85)

외전 1.

상견례 이틀 전.

선율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가 가족을 만났다.

“우리 공주 왔나? 서울 가가 몬 먹고 살았나? 살이 와 이리 쏙 빠졌노.”

선율의 아버지인 재철은 경북 포항에서 작은 보쌈집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선율이 어릴 땐 직장을 다녔는데 아내와 사별한 후 아이 둘을 돌볼 사람이 없어 프랜차이즈 보쌈집을 인수했다. 집에서 5분 거리인 보쌈집은 테이블 세 개 정도의 작은 규모였고 주로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라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집으로 뛰어갈 수 있어 혼자서도 아이 둘을 키워 낼 수 있었다.

“못 먹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니라 요새 다이어트 중이라 그래. 웨딩드레스 입으려면 바짝 빼야 한다고.”

“하이고마, 네가 살 뺄 데가 어데 있다고 다이어트고? 다이어트 같은 거 때려치워라, 마.”

“안 보여서 그렇지 여기저기 숨겨진 살 많아요, 아부지.”

선율은 보쌈 고기를 산처럼 쌓아 놓고 그녀를 기다리는 재철을 보며 어리광을 피웠다.

재철은 큰딸인 선율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귀하게 키웠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어디 가서 엄마 없는 아이 소리 듣지 않게 하려고 투박한 손으로 매일 다림질을 했고 학교에서 오는 알림장도 꼬박꼬박 챙겼다. 대학교 진학을 위해 선율이 서울로 갔을 땐 그녀가 탄 고속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텅 빈 딸아이의 방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적적해서 한동안 소주를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선우는 어디 갔어요?”

따뜻한 보쌈 고기를 상추에 싸서 크게 한 입 먹으며 선율이 두리번거렸다.

“선우 금마 밖으로 나도는 게 어데 하루 이틀 일이가? 때 되면 들어오겠지. 마 신경 꺼라.”

선우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인 선율의 남동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 어릴 땐 선율이 업어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중학생이던 무렵부터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녔다. 사고라고 해 봐야 밤늦게까지 PC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 정도였지만 선율은 하나뿐인 남동생의 방황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선우 요새도 아버지 말 잘 안 들어요? 성적도 개판이고?”

“하이고마, 개판 정도긋나. 그 정도면 개판에 굿해야 할 판이다.”

재철이 굵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우가 엇나가는 걸 알면서도 자주 들여다보지 못한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선율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제가 선우한테 전화 한번 해 볼게요.”

“내비 둬라 고마. 외박은 안 하는 놈이니 자기 전엔 기어들어 오겠지.”

“그래도요.”

“마 치우고, 그놈아 얘기나 한 번 해 봐라.”

“누구요?”

“니캉 결혼한다는 그놈.”

재철이 고기 썰던 칼을 내려놓고 선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숨기지 못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선율이 서른이 넘은 이후로 대체 언제 결혼할 거냐고 닦달하던 그였기에 갑작스레 결혼하겠다고 내려온 선율의 말이 단비처럼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유신을 떠올리니 괜스레 뺨이 붉어진 선율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화로 대충 말씀드렸잖아요. 이틀 후면 만날 텐데 그때 보시면 되죠.”

“하모, 아주 대에에에충 들었제. 사지 멀쩡한 머스마다, 그 말뿌이 더 했나? 이제 말해 봐라. 모레 상견롄데 이 아부지도 어느 정도는 알고 가야 한다 아니가.”

재철의 성화에 선율이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저를 많이 사랑해 주고요.”

“당연한 소리를 해쌌노? 니 뭐 쑥스러워서 그러나? 그라지 말고 함 말해 봐라. 아부지 숨넘어간다 안 카나.”

재철은 아예 그녀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나이는?”

드디어 호구 조사 시작이구나.

선율은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스물여덟이요.”

“스물여덟? 니보다 네 살이나 어리다 이 말이가?”

아니나 다를까. 재철의 미간에 세로줄이 쭉 그어졌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재철은 다소 보수적인 면이 있었다. 선율의 자취 생활을 감시(?)하기 위해 주인집 아저씨와 호형호제해 버릴 정도이니 말 다했지. 남자란 자고로 소나무처럼 듬직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온 그는 네 살이나 어리다는 선율의 남자 친구가 벌써부터 마뜩잖기 시작했다.

“대학은 나왔고?”

“저랑 같은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했는데?”

“중퇴했어요. 그게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하모 고졸이라 이거가?”

쭈욱.

재철의 미간에 세로줄이 하나 더 파였다.

선율은 그냥 둘러댈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상견례 도중 얘기가 나올 수도 있는 부분이라 솔직히 말한 건데 재철의 반응이 예상보다 더욱 안 좋았다.

“흐음.”

못마땅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재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양친은 살아 계시나?”

“어머니 혼자 계세요.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니가 모시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제?”

“그런 건 아니에요! 어머님도 그런 성향은 절대 아니시고요.”

재철은 끄응,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선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하는 듯했다.

“군대는 다녀왔고?”

……헉.

선율은 가슴이 뜨끔해 시선을 피했다.

‘어쩌지? 유신이 군대 안 다녀왔는데!’

그녀가 알기로 유신은 교도소에 다녀온 후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수감 이력 때문에 군 면제를 받은 듯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해서 재철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선율은 난감할 따름이었다.

히끅.

긴장을 하니 딸꾹질이 터졌다. 입술이 하얗게 돼서 물만 벌컥벌컥 들이켜는 걸 보니 보통 일이 아닌지라 재철의 눈매가 더욱 매서워졌다.

“그 머스마 사지 멀쩡하다 안 켔나?”

“멀쩡……하긴 한데.”

“뭐고? 사지 멀쩡한 머스마가 군대를 안 간 게 말이 되나!”

재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해병 수색대 병장으로 만기 제대한 그는 군대 안 갔다 온 남자는 사내도 아니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요새도 장이 서면 심심찮게 빨간 베레모를 쓰고 나갈 정도이니 그의 군대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 망했네.’

선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칫하면 모레 상견례 자리를 취소해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이다.

‘그냥 다 솔직히 말해야겠지?’

어지간하면 기철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함구할 생각이었다. 하나뿐인 딸을 서울로 올려 보내고 전전긍긍하던 재철을 알기에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에게 고스란히 내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같은 성격의 재철이 당장 기철의 모가지를 비틀겠다며 날뛰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선율이 걱정하는 건 가게 일이 바빠 자주 들여다보지도 못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재철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철의 반응을 보니 얼렁뚱땅 넘어가긴 이미 그른 것 같았다.

“이 가스나가 치아라 마! 공부하라고 서울 보내 놨더니 개밥만치도 못한 머스마를 신랑감이라고 데리고 왔노! 암만 배를 곯아도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안 된다고 켔나 안 켔나!”

“아빠, 드릴 말씀이 있어요. 사실은요.”

선율이 굳은 결심을 하고 입술을 떼었을 때였다.

똑똑똑.

보쌈집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영업시간 끝났는데 또 누고?”

재철이 구시렁대며 몸을 일으켰다. 불 꺼진 문 앞엔 훤칠한 키의 사내가 서 있었다. 자르르르 떨어지는 슈트 원단과 티끌 하나 묻지 않은 구두 앞코를 보니 딱 봐도 보통 인물은 아닌지라 재철은 고개를 꺾어 빤히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누구요?”

“안녕하십니까, 아버님!”

“……아버님?”

“따님과 교제 중인 조유신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손대면 베일 것처럼 또렷한 인상의 남자가 대뜸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뒤늦게 재철을 따라 나온 선율의 입이 딱 벌어졌다.

‘맙소사. 상견례 하려면 이틀이나 남았는데 왜 벌써 내려온 거야?’

예고도 없이 찾아온 유신의 등장에 선율의 동공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선율은 냉큼 유신의 소매를 끌어다 속사포처럼 속삭였다.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지금 분위기 엄청 안 좋아. 내가 아빠한테 설명을 잘못해서 좀 오해가 생겼어. 일단 지금은 돌아가고 내일 만나서…….”

“선배.”

유신이 안심시키듯 선율의 팔목을 잡아 내렸다.

“좀 놔 봐요. 아버님한테 첫인사드리는데.”

“인사고 나발이고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우리 아빠가 지금 너에 대해 오해를……!”

“밖에서 좀 들었어.”

유신이 부드럽게 웃으며 선율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선율은 좌불안석이었지만 유신이 단호히 말하니 더는 끼어들지 않았다.

재철은 팔짱을 끼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유신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불신이 가득했다. ‘군대도 안 다녀온 하자투성이 머스마가 어데 귀하디귀한 내 딸을?’이라고 적혀 있는 눈빛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려다 갑자기 보고 싶어서 연락도 없이 내려왔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유신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요놈 봐라?

재철의 눈썹이 힐끗 올라갔다. 깍듯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솔직하지만 건방져 보이지는 않는다. 자신감이 충만한 사내에게서만 볼 수 있는 분위기를 재철은 금세 알아보았다. 그는 시험하듯 유신을 떠보았다.

“상견례 때 보면 되지, 만다꼬 쪼르르 따라 내려왔노? 보고 싶어서 왔으모 인자 얼굴 봤으니 고마 올라가면 되겠구먼.”

유신은 대답으로 양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빈손으로 온 게 아니어서요.”

네모난 쇼핑백 두 개엔 누구나 알 만한 고급 양주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약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긴장해 뻣뻣하게 굳은 주제에 제 할 말 다 하는 녀석이 재철은 밉지 않았다. 넉살 좋아 헤실거리면서 실속은 없는 놈보단 나은 것도 같고?

“자네 술 좀 하나?”

재철이 부러 엄하게 물었다. 대답은 썩 만족스러웠다.

“어디 가서 실수 안 할 정도는 됩니다.”

드르륵.

재철이 셔터를 내렸다.

“율아, 뭐 하노? 퍼뜩 술상 안 차리고!”

한적했던 가게 안이 다시 부산스러워졌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남자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멀리서 왔다꼬 봐주나 봐라. 남자는 남자가 보면 딱 아는 기라.’

‘사윗감이 될 만한 놈인지 직접 테스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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