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탁.
집 앞에 도착한 유신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선율은 차에서 내려 곧장 트렁크로 향했다.
“이리 줘요. 내가 들게요.”
그녀가 캐리어를 꺼내자 유신이 곧장 손을 내밀었다.
“됐어. 별로 무겁지도 않은……. 저게 뭐야?”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 집이었다. 그 정도 거리는 혼자 들 수 있다며 고집스레 캐리어를 끌고 가던 선율의 눈이 커다래졌다.
“누가 남의 집 앞에 차를 마음대로 대 놨어?”
그녀의 눈에 띈 건 담벼락을 통째로 가로막고 선 커다란 자동차였다. 선율은 덜컹거리는 캐리어를 끌며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대체 어떤 막돼먹은 인간이 여기 차를 대놓은 거지?”
주택가가 으레 그렇듯 선율의 동네도 주차난이 심각했다. 모르는 사람이 집 앞에 차를 대 놓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그 때문에 종종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선율이 출퇴근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차를 구입하지 않은 건 주차 문제로 스트레스를 늘리고 싶지 않은 이유가 컸다. 그러니 남의 집 앞에 무단으로 주차한 차량을 보고 선율이 구시렁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포장도 풀지 않은 신차였다. 선율은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주인아저씨 차 바꾸셨나?”
좀 더 가까이서 보니 보닛에 리본이 달려 있다. 웨딩 카에 달린 것처럼 커다란 은색 리본이었다. 리본 밑에는 친절하게 편지도 쓰여 있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A4 용지에 프린트된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선율의 눈동자가 이내 지진을 일으켰다.
“To. Melody Han? 이게…… 뭐야?”
멜로디 한은 선율의 영어 이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쓰윽 옆에서 고개를 내민 유신이 대꾸했다.
“뇌물.”
선율은 이 상황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이거 내 선물이야?”
“선물 아니고 뇌물이라니까.”
유신이 비스듬히 웃으며 팔짱을 꼈다.
“벗겨 봐요. 나만큼 근사한지.”
“어……. 응.”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일단 제 이름이 쓰여 있으니 풀어 보기는 해야 했다. 선율은 떨리는 손으로 자동차의 포장을 벗겨 냈다.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감탄사가 새어 나왔다.
“와……!”
까만색 보디 커버가 스르륵 벗겨지자 차량의 위풍당당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리알같이 반짝이는 은회색 보디에 고양이의 눈처럼 새초롬한 라이트. 뚜껑이 열리는 차인 듯 루프 부분이 특이했다. 차체 위에 천을 씌워 놓은 것처럼 살짝 재질이 달라 조금 더 다채로운 느낌이었다.
선율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차체를 따라 흘렀다. 유선형으로 뻗은 곡선은 우아했으나 바퀴가 커서 강한 느낌을 주었다. 세세한 무늬가 음각되어 달빛에도 번쩍번쩍 빛나는 휠은 고급스러움의 끝판왕이었다. 선율은 홀린 듯 차체에 다가섰다.
“대박…….”
차량 내부는 더욱 럭셔리했다. 라디에이터 그릴엔 고광택 크롬 바가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최고급 나파 가죽으로 제작된 시트는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전체적으로 로제 골드로 색감을 맞춘 차량 내부는 화사하고 분위기 있었다. 핸들에 박힌 베링거의 엠블럼은 화룡점정이었다. 넋이 나간 듯 차량을 살피던 선율의 눈에 문득 엠블럼 아래에 음각된 작은 글씨가 보였다.
‘뭐지?’
그러고 보니 사이드 미러 아래에도 같은 글씨가 있다. 손잡이의 반짝거리는 크롬 위에도, 어둠에서도 당당한 위용을 드러낸 휠에도 같은 무늬가 새겨진 것을 보고 선율의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거…… 네가 전에 얘기했던 그 차야? 세상에 하나뿐이라던…….”
“맞아요. 내가 직접 디자인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을 위한 차예요.”
선율의 눈동자에 기어이 눈물이 차올랐다. 철모르는 스무 살 때 그가 그랬었다. 언젠가 꿈을 이루면 반드시 그녀만을 위한 차를 만들어 주겠다고.
[유신아, 넌 나중에 꿈을 이루면 뭘 할 거야? 자동차 디자이너 되고 싶다고 했잖아.]
[꿈을 이루면 이루는 거지. 이룬 후에도 뭘 해야 해요?]
[꼭 뭘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 그런 거 있잖아. 네 이름을 딴 자동차를 출시한다든가 부모님께 집을 사 드리고 싶다든가. 아, 할머니 계시니까 할머니 모시고 근사한 데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거.]
[음. 난 선배한테 세상에서 하나뿐인 자동차를 선물하고 싶어요.]
[오, 완전 좋은데. 세상에서 하나뿐인 차면 손잡이나 백미러 같은 데 막 시그니처 같은 것도 찍혀 있나?]
[선배가 원하면 뭐든 하죠.]
그때의 약속이 눈앞에 실현되어 있었다.
이렇게 멋지게, 이토록 근사하게.
선율은 가슴이 벅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만 뚝뚝 흘리는 그녀에게 유신이 한 걸음 다가섰다.
“아침에 했던 건 장난이었고. 이게 진짜예요.”
“유신아…….”
“프러포즈 할 때 쓰려고 했는데 차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찬 바람이 흐트러트린 선율의 머리칼을 유신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침에 프러포즈 거절해 놓고 후회했죠?”
“조금…… 아니고 많이.”
솔직한 그녀의 대답에 유신이 미소를 지었다.
“선배가 온종일 내 프러포즈 기다린 거 아는데 기왕이면 다이아보다 큰 걸로 주고 싶어서. 김기철보단 뭐든 나아야 할 거 아니야.”
“야……. 분위기 좋은데 그 자식 얘긴 왜 꺼내.”
“선배 울음 좀 그치라고.”
그의 말마따나 김기철 얘기가 나오자마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울음을 그친 선율을 보고 씩 웃은 유신이 트렁크로 향했다. 트렁크는 색색의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선율이 좋아하는 튤립부터 리시안셔스, 장미와 라넌큘러스까지 평생 받아 본 꽃보다 더 많은 꽃 사이로 커다란 현수막이 펼쳐져 있었다.
<결혼하자, 한선율.>
미사여구 없이 딱 일곱 글자.
그러나 무엇보다 진심이 느껴지는 글자에 선율의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아침부터 내내 속앓이를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대체 뭘 걱정한 거야. 바보 같아, 한선율.’
프러포즈 선물로 세상에 하나뿐인 차를 받는 여자는 나밖에 없을 거다. 맥파이란 이름을 얻는 데 몇 년을, 차를 만드는 데 또 몇 달을. 그가 하루도 빠짐없이 고대하며 준비했을 이 순간이 벅차서 선율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받아 줄 건가?”
유신이 차체를 툭 치며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선율은 눈물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러니까 나 되게 속물 같은데…… 안 넘어가곤 못 배기겠다.”
선율이 발끝을 들었다.
“고마워, 유신아.”
그녀가 두 팔로 유신의 목을 끌어안았다. 부드럽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유신이 속삭였다.
“선물은 꿀꺽해도 되지만 뇌물은 꿀꺽하면 감옥 가요.”
“응, 알아.”
“그래서 대답은?”
“결혼……할게. 너랑 결혼하고 싶어, 유신아.”
유신의 입술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선율의 눈꺼풀 위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이번엔 입술 위에.
“정말로, 진심으로, 누구보다 더 한선율을 사랑해.”
초옥. 길게 닿았다 떨어진 그의 온기를 선율은 놓고 싶지 않았다. 두 손으로 그의 뺨을 붙잡아 끌어 내린 그녀가 진하게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사랑해. 정말로, 진심으로, 너보다 더.”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듯이 둘은 서로를 갈구했다. 부드럽게 엉킨 입술이 서로의 안을 더듬어 들어갔다. 깊숙한 곳에 닿아서야 안도하듯 마음껏 숨을 터트려 본다.
사랑해.
사랑해, 한선율.
못다 한 말을 가슴으로 되뇌며 유신은 가늘게 눈을 떴다. 파르르 떨리는 선율의 속눈썹에 유신의 가슴이 젖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마법과도 같아서 그간 아팠던 상처가 말끔히 아무는 기분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참 많이도 헤매었지, 우리.
그 고단한 여정 속에서도 한순간도 놓을 수 없던 너를 이제야 품에 안아 본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는 기쁨보다도 이제야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가.
그토록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과거가 이제야 저물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겠지. 너를 놓을 수 없는 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같은 농도의 행복이 번졌다.
“어이, 거기 누구요?”
그때 머리 위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율과 유신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떼고 담벼락에 바짝 붙었다.
“헉, 주인아저씨인가 봐.”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둘은 놀란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율의 립스틱이 번져 같은 색이 되어 버린 입술에 쿡쿡 웃음이 터졌다.
“너 입술 가관이다. 완전 분홍색 됐어.”
“선배도 만만치 않은데.”
“많이 번졌어?”
“차라리 지우는 게 낫겠어요. 나만 믿어.”
입술 지우는데 왜 너를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곤대는 둘의 귓가로 구시렁대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뭐지? 방금 전까지 분명히 남자 목소리 들렸는데! 여보, 당신도 들었지?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소리는 무슨 소리가 났다고 그래요! 야밤에 누가 여기까지 올라온다고!”
“아냐. 틀림없다니까! 분명 떠드는 소리 들렸다고. 저건 또 뭐야? 누가 남의 집 담벼락에 차를 대 놨어?”
집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선율과 유신이 눈을 딱 마주쳤다.
“튈까?”
“그래, 좋은 생각이다.”
유신이 선율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그의 손 안에 차 키가 들어 있었다. 자연스레 키를 건네받은 선율이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차 문을 열었다.
띠딕.
헤드라이트 불빛이 반짝이면서 차 문이 45도 각도로 열렸다. 비스듬히 허리를 숙여 운전석에 앉은 선율이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렸다.
그사이 조수석에 오른 유신이 선율의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선율은 오른발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우우웅―
짐승의 낮은 숨소리 같은 배기음이 골목의 적막을 깼다.
동시에 일 층 대문이 벌컥 열렸다. 한 손에 빗자루를 들고 나오는 주인아저씨를 보며 선율이 두 손으로 핸들을 꽉 잡았다.
“간다.”
“출발해요.”
부아아아아앙!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차.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맥파이가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제작한 맞춤 카가 질주를 시작했다.
각기 걸었던 길을 이제는 함께 걷게 될 것이다.
같은 방향을 향해 달리고, 같은 꿈을 꾸겠지.
새로운 미래를 향해 첫발을 뗀 선율의 머리카락이 시원스레 휘날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유신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립서비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