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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71)화 (7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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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려 보니 창밖이 어두컴컴했다.

“와……. 말도 안 돼.”

선율이 학을 떼며 몸을 일으켰다. 분명 짐 싸서 나가려던 게 아침인데 조유신 수작에 몇 번 넘어가다 보니 벌써 하루가 가 있었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그의 공세에 지쳐 깜빡 졸았다가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창밖 풍경에 선율은 힘이 쭉 빠졌다.

“해 저문 거 실화냐…….”

오늘 한 일이라곤 아침에 일어나 깔짝깔짝 짐을 싼 것뿐이었다. 그다음에는 내내 유신의 몸 아래 깔려 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밥도 한 끼밖에 안 먹었네.’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를 부여잡으며 선율이 울상을 지었다.

건물 너머로 거의 넘어간 해가 붉은빛을 뿌렸다. 선율은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안으로 돌렸다. 처연할 정도로 아름다운 노을이 창을 넘어와 소파 위를 기웃대다 유신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가뜩이나 또렷한 이목구비의 윤곽이 석양에 더욱 도드라졌다. 선율은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눈뜨자마자 보는 광경으론 분에 넘치게 호화스럽네. 매일 이 얼굴을 보며 일어나면 무슨 기분일까?’

최근 며칠간 경험해 본 바로는 아침마다 생체 활력이 두서너 배씩 증폭하는 효능이 있기는 했다.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니 종일 웃는 낯이었고, 활짝 핀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니 자연스레 일도 술술 풀렸다. 참 여러모로 쓸모 넘치는 생명체였다.

‘콧날 봐. 깎아 놓은 것처럼 예쁘네.’

선율은 손가락으로 닿을 듯 말 듯하게 유신의 콧날을 쓸어 보았다. 베일 것처럼 날카로워 보이는 것과 달리 그의 콧날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선율은 저도 모르게 그의 코끝에 쪽 입을 맞추고는 그가 깰까 봐 얼른 물러났다.

“아……. 배고파. 뭐라도 먹어야 살겠다.”

냉장고를 기웃거린 그녀가 사과 하나를 꺼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깨끗이 씻어 통째로 베어 문 그녀가 입을 우물거리며 소파로 돌아왔다.

“배도 안 고픈가 봐. 잘 자네.”

선율은 장난스레 유신의 코앞에 사과를 가져다 댔다. 유신은 솔솔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몇 번 그렇게 장난을 치다가 유신을 깨우는 걸 포기한 선율이 털썩 유신의 옆에 앉았다.

“한 것도 없이 밤이 되니까 심란하네.”

실은, 아침에 얼렁뚱땅 프러포즈를 받은 이후 내내 싱숭생숭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낄 때, 천천히 제 안을 오가는 그의 움직임을 느낄 때, ‘사랑해’ 하고 말해 주며 그가 입술에 키스를 해 올 때. 자꾸만 그 말도 안 되는 프러포즈가 떠올랐다.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다는 그 단순한 인과가 이제 와 자꾸만 선율의 가슴을 쿡쿡 찔러 댔다. 조유신을 사랑한다. 여태껏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도 쭉 해 왔다. 그 와중에 그가 결혼 얘기를 꺼내니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말해 주면 못 이긴 척 승낙해 주려 했는데…… 바보.’

선율은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렸으나 해가 질 때까지 그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먼저 얘기를 꺼내 볼까 하다가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방금 전 거절한 주제에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기도 그렇고 해서 내내 마음만 졸이던 참이었다.

‘뭔가 입장이 뒤바뀐 거 같아.’

선율은 괜히 괘씸한 마음에 감정을 실어 유신의 뺨을 쿡 찔렀다. 인기척을 느낀 그가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일어났어요?”

……눈뜨니까 더 잘생겼네. 얄밉게.

“왜 째려보는 건데. 내가 아까 너무 험하게 했어요?”

살짝 잠긴 허스키한 음성이 무척 색정적이었다. 선율은 습기가 찬 것 같은 고막을 어루만지며 괜히 투덜거렸다.

“너 때문에 대낮에 곯아떨어져 버렸잖아. 집에 가야 하는데 너도 잠들면 어떡해.”

“조금 피곤해서. 꿈에서도 선배가 나왔어.”

“꿈에 내가 나오면 좋은 거지 뭘 그래?”

“좋기야 했지. 몸은 좀 고단했지만.”

내가 꿈에 나왔는데 네 몸이 왜 고단한지 모르겠다고 항변하려던 선율은 불룩 솟아오른 이불을 보고 나서야 납득했다.

“아…….”

건강해도 너무나 건강한 이 남자를 어쩌면 좋을까.

아까 그렇게 하고도 힘이 남았는지 은근슬쩍 허리까지 감아 온다.

“아까 너무 좋았나 봐. 좀 여파가 있네.”

선율은 학을 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려서 그런가 되게 건강하다, 너.”

“어려서는 아니고.”

촉촉한 눈빛이 핥듯이 선율의 목덜미를 훑었다.

“자극제가 눈앞에 있어서 그렇죠.”

꿀꺽.

야릇한 그 시선에 선율의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갔다. 밤이고 낮이고 참 정성스럽게도 꼬신다. 하마터면 또 홀랑 넘어가 버릴 뻔했으나 이미 바닥난 체력으론 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선율은 허리를 휘감은 유신의 손을 혼내듯 찰싹 때렸다.

“이 음란 마귀야. 머릿속에 온통 그런 생각밖에 없어?”

“응.”

“…….”

“내 머릿속엔 선배 생각뿐이에요. 다만 선배와 ‘그러는 걸’ 좋아할 뿐이지.”

“말이나 못하면.”

“말 못 하게 하면 몸 쓰죠, 뭐. 사실 그편이 더 좋기는 해.”

유신이 건강한 치아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나도 사과 줘요. 배고파.”

“직접 가져다 먹어.”

“귀찮게 뭐 하러 그래.”

유신이 단숨에 선율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녀의 입 안에 조각조각 부서져 있던 사과가 그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한 조각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정성스레 입 안을 훑어 내린 그가 달짝지근한 선율의 혀를 몇 번이고 빨았다. 쪼옥, 쪽 야한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입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빨려 나갔다. 달콤한 향기가 얽히며 선율의 뺨이 사과처럼 물들었다.

“나 집에 갈래.”

더 머물렀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아서 선율은 얼른 캐리어를 챙기며 신발을 꿰었다.

덩그러니 남은 사과 반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유신이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하늘하늘한 이불이 그의 몸을 타고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려다줄게요.”

* * *

집으로 가는 차 안에 잔잔한 클래식이 흘렀다. 불면증이 있는 유신은 습관적으로 클래식을 들었는데 주로 피아노 연주곡이나 바이올린 독주곡이 많았다. 서울의 야경과 함께 보면 괜히 감상에 젖게 되어 선율은 그의 차에 타는 시간이 좋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좋은 클래식을 들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선율의 머릿속은 온통 아까의 프러포즈로 가득했다. 당장 결혼이 하고 싶어 애가 달은 것은 아니지만 기왕 얘기가 나왔으니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유신은 다시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거절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아까는 당황해서 분명 그렇게 얘기하긴 했는데, 정작 선율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이율배반적이지만 선율은 그와 결혼이 하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그가 얘기를 꺼냈을 때 덥석 물 것을.

“아까 했던 얘기 말인데.”

물끄러미 창밖을 보던 선율이 말문을 열었다.

“응.”

“진심으로 한 얘기야?”

주어는 없지만 둘 모두 그게 ‘결혼’에 대한 얘기라는 걸 알았다. 유신은 살짝 걷은 팔을 운전대에 얹은 채 간단히 대꾸했다.

“선배한테 한 말 중에 진심 아닌 거 없어요.”

“그래…….”

선율의 표정이 심란했다. 그의 대답이 어쩐지 두루뭉술하게 느껴졌다.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말자는 것도 아니고, 진심은 진심인데 ‘결혼’이란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으니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땐 그냥 확 밀어붙여 줬으면 좋겠는데.’

그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면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줄까 싶은데 아까 말을 꺼낸 이후 그는 아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선율은 주제가 다른 곳으로 넘어가 버릴까 싶어 얼른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결혼 생활은 지금과 많이 다를 거야. 온갖 환상이 다 깨진다고 하더라. 매일 같은 모습만 보면 지겨워질 수도 있고. 그것도 예쁜 모습만 보는 것도 아니잖아. 아침에 일어나서 퉁퉁 부은 얼굴도 보고 떡 진 머리도 보고 하여간 연애 때랑은 다를 거야.”

“그런 거라면 지금도 보고 있는데.”

“야! 사람 진지하게 말하는데 자꾸 이럴래?”

버럭버럭하는 선율을 보며 유신이 쿡쿡 웃었다.

화낼 때 정말 귀엽단 말이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유신이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선배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요. 아직 내 나이가 어리고 연애 경험도 없으니 너무 섣부른 결정이 아닌가 불안하겠죠.”

“사실 그래. 우리가 8년 전에 만났다고 해도 정작 함께한 시간은 너무 짧잖아. 떨어져 있는 사이 너는 나름대로 나에 대한 환상을 키워 왔을 텐데 그게 깨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무섭네.”

“환상이라.”

유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내가 키워 온 환상도, 그게 깨진 이후의 현실도 어차피 한선율 아닌가?”

“그건 그렇지만…….”

“내 인생에 여자는 한선율밖에 없어. 선배는 그것만 생각하면 돼.”

그의 확신은 선율을 안도하게 했다.

그래. 조유신에게 여자는 나밖에 없지. 해가 달이 되고, 수많은 별이 하나로 뭉쳐지는 상상은 할 수 있어도 유신의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 모습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럼 우리…… 결혼해?”

허벅지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선율이 물었다. 유신의 대답은 조금 싱거웠다.

“선배가 괜찮다면.”

예상과 다른 썰렁한 반응에 선율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쟤 진짜 나랑 결혼하고 싶은 거 맞나. 결혼해 달라 무릎 꿇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그렇게 시크한 얼굴로 ‘그래, 내가 해 준다’ 하는 식은 아니지 않아?’

그가 좀 더 강하게 당겨 주기를 바랐던 선율은 김이 팍 새는 기분이었다. 괜히 기분이 상한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 볼게.”

이번에도 유신의 대답은 간결했다.

“얼마든지.”

대화가 뚝 끊겼다.

클래식이 흐르는 차 안에는 어쩐지 불편한 침묵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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