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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두 여인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차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유신은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우리 엄마 저렇게 웃는 거 오랜만이네.’
냉장고에 한 달은 들어 있던 사과처럼 퍼석퍼석하던 엄마의 얼굴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저토록 생기 있는 표정을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미국 생활 끝내고 귀국했을 때도 저런 표정은 아니었는데.’
상미의 곁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조잘대는 선율이 있었다. 미끄러지듯 선율에게로 향한 유신의 시선이 뜨겁게 물들었다.
“……한선율.”
귀도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에게 말벗이 되어 주던 선율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내 멍하니 앉아 있다가도 선율이 오는 날엔 버선발로 뛰어나오던 할머니.
활짝 웃는 상미의 얼굴은 꼭 그때의 할머니를 닮아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맙고 미안하고 예쁘고. 잔잔한 파문이 가슴에 번져 쉼 없이 찰랑였다.
그녀는 외롭게 자란 유신에게 기꺼이 가족이 되어 주는 사람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그의 가족을 품을 줄 아는 여자.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제 것처럼 아껴 줄 줄 아는 여자. 그래서 더욱 그녀를 놓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냐, 선배. 그냥 이대로 확 보쌈해 버리고 싶네.”
잠깐 고민하던 유신은 조용히 두 사람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햇살이 화창한 날, 나란히 걷던 두 사람이 커피숍에 도착했다. 왜 왔냐고 하면 둘러댈 말이 없어서 돌아갈까 하다가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시선이 멀뚱히 그를 향하는 순간 그는 곧장 제 결정을 후회했다.
“왜 왔어?”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뭐지, 이 불청객 취급은.
“내가 뭐 못 올 데라도 왔어요?”
“…….”
“그냥 갈까?”
약속이라도 한 듯 대답이 없다.
“진짜 나 그냥 가요?”
처음엔 장난인지 알았는데 맞춘 듯 박대하는 두 사람의 반응에 진짜로 서운해지려고 한다.
“아니, 뭐…… 기왕 왔으니 밥이나 사고 가든지.”
상미가 시크하게 자리를 허락해 주었다.
“밥도 사게 해 주시고 아주 기분 째지네요.”
“네 덕에 돈 굳었다.”
“축하드려요.”
“뭘 이런 걸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선율은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녀를 시작으로 전염되듯 웃음이 번졌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환한 햇살이 따스하게 세 사람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 * *
며칠 후.
선율은 유신의 호텔에서 짐을 빼고 있었다. 유신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꽤 오래 머무른 터라 늘어난 짐이 많았다.
“꼭 가야 해요? 그냥 같이 살면 안 되나.”
커다란 여행 가방 속에 화장품을 쓸어 담는 선율을 보며 유신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건강 완전히 회복하면 나가기로 했잖아. 뼈도 다 붙었고 이제 운동도 할 수 있고. 내 집 놔두고 뭐 하러 여기 있어?”
“여기가 살기 편하잖아요. 회사도 더 가깝고.”
“아침에 10분만 일찍 일어나면 불편할 것도 없는데 뭐.”
“그래도.”
선율은 유신의 투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서른 넘어서까지 남의 집에서 자는 건 생각도 안 해 봤는데 그간 유신과 함께 지낸 것만으로도 그녀로선 충분히 모험을 한 셈이었다.
“외간 남자 집에서 몇 주나 같이 지냈다고 하면 우리 아버지 목덜미 잡고 넘어가셔.”
“장기 출장이라고 둘러댔다면서요.”
“어. 이제 돌아갈 때가 된 거지.”
선율이 찬장 위에 놓인 크림을 꺼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발꿈치를 힘껏 들어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높이의 그것을 유신은 손쉽게 꺼내 주었다.
“같이 살면 이런 것도 맨날 해 줄 수 있는데.”
등 뒤로 바짝 밀착한 그의 몸에서 청량한 체취가 훅 풍겼다. 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의 향기에 하마터면 홀랑 넘어갈 뻔한 것을 선율은 가까스로 참아 냈다.
“의자 갖다 쓰면 되거든.”
유신은 짐을 챙기는 그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 한번 해 봐요. 나 형광등도 잘 갈아요. 지난번엔 빨래도 짜 줬잖아. 같이 살면 되게 유용하게 쓸 수 있다니까.”
“너 유용한 거 누가 몰라? 길쭉하고 튼튼해서 여기저기 쓸모 많은 거 나도 알아.”
“길쭉하고 튼튼해서 밤에도 즐겁잖아요.”
“야!”
선율이 매서운 손바닥으로 유신의 등을 찰싹 때렸다.
“네가 아무리 유용하고 쓸모 있어도 같이 사는 건 안 돼. 나 이래 봬도 되게 보수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야. 엄마 없는 티 내면 안 된다고 하도 단속을 하셔서 그게 몸에 뱄나 봐. 여기 사는 동안 죄짓는 기분 들었다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그랬다. 대학교에 진학하며 자취 생활을 시작한 그녀를 걱정해 집주인 내외와도 호형호제해 버린 극성 아버지를 알기에 지금껏 함부로 외박을 한 적이 없었다.
병간호를 핑계로 시작한 며칠간의 동거, 그것도 낮이고 밤이고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짐승과 함께하는 동안 선율은 괜히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이제라도 돌아가야지. 이번 주말에 아버지 만나기로 했는데 찔리면 안 되잖아.’
굳게 결심한 선율은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듯 단호히 선언했다.
“한선율 인생에 동거는 없다. 얘기 끝. 오케이?”
이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선율은 스스로의 철벽력을 뿌듯해하며 드르륵 캐리어를 닫았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가 동거하재?”
“……어?”
“결혼하자고.”
선율의 손이 멈췄다. 대체 내 귀가 뭘 들은 건가 싶어 눈알을 굴리는 그녀의 허리를 유신이 뒤에서 안아 왔다.
“선배, 나랑 결혼해요.”
듣기 좋은 중저음이 귓가에 스몄다. 따뜻한 그의 체온 안에 갇히는 순간 쿵쿵,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유신은 선율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날씬한 복부를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렀다.
“결혼하고 같이 사는 건 아주 합법적이고 상식적인 일 아닌가.”
그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선율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설마 이거 프러포즈야?”
끄덕.
그의 고개가 목덜미를 한번 깊게 눌러 왔다. 선율은 홱 돌아서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프러포즈를 이따위로 하냐! 너랑 나 지금 헐벗고 있는 거 몰라?”
백 허그로 잔뜩 설렜던 심장이 짜게 식었다. 아니, 적어도 프러포즈를 하려면 립스틱 바를 시간 정도는 줘야지. 막 일어나 부스스한 몰골로 짐을 싸는 사람에게 이러는 건 반칙 아닌가.
예상치 못한 선율의 반응에 유신은 무척 억울해했다.
“자연스러운 게 좋다면서요.”
그녀가 분명히 그랬다. 텔레비전에서 촛불 반짝반짝 깔고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을 보며 요새 누가 저렇게 촌스럽게 프러포즈를 하냐고, 뭐든 자연스러운 게 제일 좋은 거라고. 오글거리는 장면만 보면 치를 떠는 그녀의 취향을 고려해 나름 고르고 고른 순간인데 이 정도로 싫어한다고?
이건 앞뒤가 다르잖아!
“촛불도 싫다, 풍선도 싫다, 레스토랑 대관도 싫다, 다 싫다고 한 사람이 누군데?”
“자연스러운 것도 정도껏이지! 이건 너무 성의가 없잖아!”
“제대로 하면 받아 줄 생각이었어요?”
“아니?”
선율은 홱 돌아서며 작게 구시렁댔다.
“내가 다이아 반지는 바라지도 않아. 적어도 꽃 한 송이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싹퉁머리 없는 김기철도 프러포즈는…… 헉.”
맙소사.
그놈 이름이 왜 이 순간 튀어나와 버린 것인가.
선율의 척추를 타고 오소소 살얼음이 꼈다.
들었을까? 못 들었겠지?
……들었구나.
돌아선 순간 유신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본 선율의 안색이 파리하게 식었다.
“쓰리 캐럿이었지 아마.”
“야……. 그런 뜻이 아니라.”
“플래티넘 밴드에 스퀘어 믹스드 컷. 디자인만 봐도 딱 알 법한 브랜드에 그래, 남자가 봐도 예쁘기는 하더라.”
냉소적인 음성에 선율의 두 손이 절로 공손히 모였다. 유신은 그녀가 뭐라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반지 안 받은 거 후회해요?”
“무슨 그런 망발을! 그 반지 안 받은 건 한선율 인생에서 제일 잘한 일이야.”
“두고두고 곱씹는 걸 보면 반지가 예쁘긴 했나 보네.”
유신은 서늘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뚜벅뚜벅 다이닝 룸으로 향하는 그의 뒤를 선율이 졸졸 쫓아갔다.
“삐졌어?”
“어.”
속이 타는 듯 유신이 냉수를 벌컥벌컥 마셨다. 선율은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껴안으며 혼신의 애교를 펼쳤다.
“삐지지 마. 내가 잘못했어.”
“쓰레기만도 못한 전 남친보다 내가 별로인가 보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입에 이름도 올리기 싫은 놈과 너를 어떻게 비교해?”
“그럼 증명해요.”
“뭘.”
“날 사랑한다는 거.”
유신이 순식간에 비운 컵을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물기가 어린 그의 입술이 유난히 촉촉했다. 선율은 팔뚝에 돋은 닭살을 떨쳐 내며 진지하게 말했다.
“사랑해.”
“말로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번엔 선율이 발뒤꿈치를 쫑긋 들었다. 두 팔로 유신의 목을 감은 그녀가 물기를 머금은 그의 입술에 촉 키스를 했다.
“진짜 사랑해.”
“진심이 안 느껴져.”
……나 이번엔 제대로 걸린 거 같은데.
선율은 조금 전 망발을 내뱉은 제 입술을 원망하며 아예 유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폴짝 뛰어 두 다리로 유신의 허리를 감자 그가 자연스레 선율의 허벅지를 받쳐 들었다. 완전히 밀착된 상태에서 선율은 다시 한번 고백했다.
“진짜 진짜 진짜 사랑해. 한선율이 사랑할 수 있는 남자는 이 세상에 조유신밖에 없어.”
씨익.
그제야 만족한 미소가 유신의 입술에 덧그려졌다. 깊게 입술을 맞물어 오는 선율을 안고 성큼성큼 소파로 다가선 그가 털썩 그녀를 내려놓았다. 소파 가죽 위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가 느릿하게 몸을 기울였다.
“몇 시간만 더 있다가 가요.”
선율의 얼굴로 그의 그림자가 커다랗게 겹쳐졌다. 지그시 밀착한 하체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선율의 목덜미가 다시금 붉어졌다.
“못 말리겠다, 정말.”
이러려고 삐진 척했다는 걸 빤히 아는데 안 넘어가 줄 수가 없다. 눈꺼풀 위로 뜨겁게 쏟아지는 그의 시선을 받으며 선율이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침범해 오는 그의 숨결을 느끼며 선율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