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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사람은 바로 계순이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따위 망발을 지껄이는 거야? 뭐? 태그 떨어졌으니 환불이 안 돼? 그딴 거지 같은 법이 어디 있어?”
그녀의 삿대질에도 점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주 화를 내는 대신 기계적으로 답변을 줄줄 읊었다.
“손님, 확인해 보니 제품 구매하신 지 6개월이나 지났더라고요. 원칙적으로 구입 후 일주일 이후에는 교환, 환불이 불가합니다. 게다가 이 상품은 태그도 떨어져 있고 제품의 상태가 양호하지 않아요.”
“제품 상태가 뭐가 어떻다고!”
“착용의 흔적이 너무 선명해서요. 여기 보이시죠? 미세하게 빨간 국물이 튄 자국 같은 거요.”
노련한 점원의 태도에 계순은 더욱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깟 보이지도 않는 자국 때문에 환불이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처음 구매했을 때부터 튀어 있었던 걸 수도 있잖아!”
“손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부티크에서는 철저히 새 상품만 판매합니다. 손님이 사 가시기 전에 눈앞에서 검수를 해 드리고요. 그때 제품에 문제가 없는 걸 직접 확인하셨잖아요.”
“내가 이깟 돈 몇 푼 때문에 억지나 부리는 사람으로 보여? 이봐, 나 안계순이야. 한주그룹 안계순 몰라? 여기 VVIP라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환불은 안 되세요.”
“내가 지금껏 여기서 쓴 돈이 얼만데 고객 응대를 이따위로 하는 거야?”
최소한의 품위를 지키는 일마저 잊어버린 듯 계순은 길길이 날뛰었다. 목소리 큰 것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숍 안의 시선들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창피해서라도 그냥 돌아갔을 테지만 계순은 원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것들이 말로 해서는 안 되겠네. 야, 여기 사장 어디 있어? 사장 나오라고 해!”
“제가 사장입니다.”
계순은 순간적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쪽이 사장이라고?”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하! 나 원 참!”
앳되어 보이기에 영락없이 점원인 줄 알았더니 사장이란다. 갈 곳 없는 분노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계순의 눈에 선율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너……?”
계순의 사나운 눈초리가 홱 찢어졌다.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화가 단박에 선율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너 얼굴 좋아 보인다?”
성큼성큼 다가간 계순이 감정을 잔뜩 실어 비아냥댔다. 선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순을 노려보았다.
“그다지 반가운 얼굴도 아닌데 그냥 볼일 보고 가시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환불하러 오셨다면서요. 환불 자알 받고 가시라고요.”
예상치 못한 만남에 선율은 조금 당황했으나 그만큼 화도 났다. 상미와 함께 있는 상황만 아니었으면 아들을 그따위로 키운 주제에 누구한테 막말이냐고 욕을 퍼부어 주었을 텐데.
애써 참아 넘기고 돌아서려는 순간 등 뒤에 싸늘한 조소가 꽂혔다.
“값싼 성냥 같은 계집애.”
선율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여기 붙이고 저기 붙이고, 아주 보이는 사내놈들 꼬랑지마다 불붙이고 다니는 게 특기잖아, 너.”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는다는 게 이런 상황인가.
선율은 머리에서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는 부류가 뭔지 알아? 바로 너 같은 인간이야!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번듯한 남자 하나 꼬셔서 팔자 고치려는 년!”
“하……. 아줌마.”
“교활한 년! 어머님 어머님 하면서 눈웃음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아줌마래?”
뚫린 입으로 망발이 쏟아졌다.
“왜, 내 아들 꼬셔서 팔자 고쳐 보려고 했는데 안 되니까 열받디? 그래서 내 아들 버리고 조유신 그놈한테 꼬리 친 거야?”
“적당히 하죠.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요.”
“누가 너더러 참으랬니? 하, 그놈도 참 멍청하지. 어떻게 너같이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홀랑 넘어갔을까?”
계순의 입에서 유신의 욕이 쏟아지는 순간 선율은 뇌관이 툭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아줌마가 진짜.’
연장자고 뭐고 이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저를 욕하는 것도 안 괜찮지만 유신을 욕하는 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인생을 망치려 한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욕이라면 더더욱.
‘누군 성깔 없어서 지금껏 참고 있는 줄 아나.’
필요하다면 육탄전이라도 할 각오로 선율이 두 팔을 걷어붙인 그때였다.
“잠시만, 선율아.”
가만히 선율의 팔목을 잡은 상미가 조용히 한 걸음 나섰다. 그녀의 존재에 대해 털끝만치도 신경 쓰고 있지 않던 계순이 상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신은 또 뭐야? 지나가는 길이면 그냥 쭉 가던 길 가셔. 괜히 상관하지 말…….”
“조유신 엄마입니다.”
“……?”
“우리 애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죠. 그러니까 김기철 같은 인간 말종에게 당했지.”
“!”
우아하게 다가선 상미가 계순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별거 아닌 몸짓이었으나 계순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적당히 해요. 그렇게 아득바득 우겨 봤자 손으로 하늘이 가려지나요.”
“우, 우기긴 누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한주그룹 망한 거 모르는 사람 있나?”
상미의 입술이 가볍게 휘말려 올라갔다.
“당신 남편이 감옥 간 거 모르는 사람은?”
“그만 입 닥쳐!”
“당신 아들이 15년형 받고 복역 중인 거 모르는 사람 여기 아무도 없을 텐데 굳이 그러고 싶을까.”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심지가 박힌 듯 힘이 있었다.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이 수군수군 귀엣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본 계순의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빨개졌다.
“당신 형편은 참 안됐네요. 남편 하나 믿고 살다가 덩그러니 홀로 남았으니 쪼들리기도 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쓰던 걸 환불하고 그러면 모양새가 너무 빠지지 않나?”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당신 명예 훼손으로 고소당하고 싶어?”
“명예 훼손?”
“그래, 명예 훼손! 어휴, 보는 눈이 많아서 참고 말지.”
마지막까지 버럭버럭하던 계순이 슬슬 뒷걸음질 쳤다. 어차피 환불받기는 글렀고 여기 더 있어 봤자 쪽만 팔릴 것 같으니 선심 쓰는 척 물러나려는 것이었다.
“오늘은 그냥 봐주는 거야. 고마운 줄 알아!”
끝까지 빼액 소리를 친 그녀가 꽁지 빠지게 도망가려는 순간이었다.
“누가 누굴 봐준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네.”
“뭐야?”
“제 손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는 주제에!”
그때까지 한 번도 언성을 높이지 않았던 상미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지금껏 침착했던 게 거짓인 것처럼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먹고살아야 하니 돈은 필요하겠고. 그래서 갖고 있던 물건 여기저기 내다 파는 모양인데 아무리 쪼들려도 사기는 치지 맙시다. 그러다 당신도 쇠고랑 차요.”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수군거리던 구경꾼들은 상미의 카리스마에 놀라 입을 멈추었고, 계순은 사고가 정지한 듯 입만 벙긋거렸다. 선율은 조금 다른 의미로 놀랐다.
‘……겁나 멋있어, 우리 어머님.’
조금 전 계순이 선율에게 지껄인 망발을 보란 듯 되돌려 주는 상미의 모습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선율에겐 감동이었다. 상미는 그때까지 꽉 잡고 있던 선율의 손목을 더욱 강하게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계순을 노려보았다.
“아, 감방에서 가족 상봉이라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럼 이러는 것도 이해가 되네.”
“이년이 뚫린 입이라고 감히!”
모욕감을 참지 못한 계순의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상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외려 계순을 향해 한 걸음 크게 내디뎠다.
“쳐 봐, 어디.”
“치라면 누가 못 칠 줄 알고……!”
“하나 경고하는데 8년 전 그 고깃집과 여긴 달라.”
“뭐?”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천장을 힐끗 향했다.
“여긴 CCTV도 많던데. 진짜 한번 해 볼래?”
계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상미를 내리치지 못했다.
* * *
“아유, 시원해! 진짜 태어나서 제일 속 시원한 날이야!”
부티크에서 나오자마자 상미가 트위스트 스텝을 밟았다.
속이 후련하다 못해 시릴 지경이었다. 처참하게 구겨지는 계순의 얼굴을 보니 지난 8년간 쌓인 묵은 체증이 싹 가시는 느낌이랄까.
“그 여편네 표정 봤지? 어유, 언젠가 한 번은 그렇게 큰코다칠 줄 알았다니까.”
한주그룹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짙은 선팅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끔 볕이 좋은 날 계순은 창문을 열고 그 앞을 지나곤 했으니까.
비싼 명품을 온몸에 감아도 천박함을 숨길 수 없던 여자. 내 아들을 수렁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
황준기의 유서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몇 번이나 제 손으로 계순을 찔러 죽이는 꿈을 꿨다. 그러나 사건을 묻은 사람이 계순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도 그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악마가 될 수는 없었으니까.
언젠가는 처참히 망가진 그들의 모습을 보리란 각오로 하루하루 버텨 내던 나날들.
오늘 부티크에서 썩은 호박이 된 계순을 보니 그간의 마음고생이 훌훌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좋으세요?”
“당연하지! 과장 조금 보태면 태어나서 제일 기쁜 정도야.”
문득 상미가 선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넌 표정이 왜 그래?”
“제 표정이 왜요?”
“툭 치면 울 거 같은 얼굴인데? 너 설마 그 여편네가 한 말 곱씹고 그러는 거 아니지?”
정곡을 찔린 선율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냥…… 저런 집안이랑 한때나마 엮일 뻔한 걸 생각하니 끔찍해서요. 과거를 지울 수가 없어 찜찜하기도 하고.”
“과거는 지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좋은 과거는 추억으로 담고, 나쁜 과거는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있는 거지.”
“……?”
“너 그 표정 뭐니? 그런 분이 왜 과거를 이유로 나를 반대하셨을까 뭐 그런 촌스러운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나도 반성하고 있어, 얘!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우리 어머님 원래 이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나.
속사포로 튀어나오는 상미의 위로에 선율은 그제야 밝은 웃음을 되찾았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정말이지?”
“그럼요.”
상미가 팔을 척 내밀었다.
“커피나 마시러 가자.”
“좋아요, 어머님.”
상미가 내민 팔에 선율이 팔짱을 꼈다. 정다운 모녀지간 같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로 길게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