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립서비스 (68)화 (68/85)

68

폭풍 같은 밤이 지났다.

선율은 이불을 폭 뒤집어쓴 채 눈만 끔뻑였다.

“아…….”

입에선 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밤새 얼마나 시달렸는지 온몸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뻐근하다.

‘이 정도면 선물이 아니라 고문 아니야?’

그 와중에 유신은 아침 운동을 끝내고 산뜻한 모습으로 룸에 들어서고 있었다. 어젯밤 못 잔 건 매한가지인데 왜 너만 쌩쌩한 거냐. 선율은 무척 억울해졌다.

“조유신, 나 몸살 난 거 같아. 축하 파티 해 준다더니 네 사리사욕만 채운 것 같지 않아?”

유신은 무슨 소릴 하냐는 듯 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러기엔 너무 좋아하던데.”

“…….”

“난 분명 마지막엔 놓아주려고 했어요. 더 해 달라고 매달린 사람이 누구더라.”

할 말이 없어진 선율이 입을 앙다문 채 눈을 흘겼다. 그러자 유신이 오리처럼 내민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삼켰다. 밤새 메마른 입술이 축축하게 젖어 드는 느낌이 좋아서 선율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이것 봐. 또 느끼고 있네.”

“야! 느낀 거 아니거든?”

선율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던졌다.

물론 그녀의 시도는 유신의 괴물 같은 운동 신경 앞에서 빛을 잃었지만.

“나이스 캐치.”

한 손으로 가볍게 베개를 낚아챈 유신이 얌전히 베개를 돌려놓았다. 뭘 해도 지는 기분이라 선율은 뾰로통해져서 일어났다.

“더 자지 왜 일어나요.”

“나 오늘 볼일 있어.”

“무슨 볼일?”

“비밀이거든.”

선율은 유치하게 쏘아붙이곤 일어났다.

‘온몸을 만신창이로 만들어 놨으니 이 정도 애는 태워도 되잖아. 안 그래?’

잠시 후 선율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어딜 가는지 몰라도 머리를 말리는 폼이 심상치 않다. 가까운 데 나갈 땐 대충 말려 질끈 묶는 그녀가 한 올 한 올 정성스레 머리를 말리는 모습에 유신은 괜히 목이 탔다.

‘누굴 만나러 가기에 저렇게 공을 들여? 설마 남자 아니야?’

그의 뇌리로 회사 사람 몇몇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용의자가 없었다.

‘와……. 옷 갖춰 입는 것 좀 봐. 한선율 오늘 아주 작정을 했네, 했어.’

실키한 원피스에 하얀색 카디건. 거기다 동그랗고 반짝이는 귀걸이까지 하니 무척이나 화사했다.

‘가뜩이나 하늘하늘한 체형인데 저렇게 입으니 막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 같네. 방금 전까지 추리닝 입고 있던 사람 어디 갔어?’

선율이 공을 들일수록 유신의 근심이 깊어 갔다. 그러나 선율은 유신이 차려 준 아침을 먹으면서도 끝내 누굴 만나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 올 건데요?”

“글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저녁은 먹고 들어올 것 같은데?”

“내가 데리러 갈까?”

“언제 끝날지 모른다니까.”

선율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신발을 꿰었다.

그녀가 대충 얼버무릴수록 유신의 의심은 커져 갔다.

몰래 따라가 봐야 하나 이거.

“혹시라도 쭐레쭐레 따라올 생각은 하지 마.”

헉, 귀신이네 귀신.

유신은 뜨끔해서 괜히 강하게 부정했다.

“나 그렇게 한가한 놈 아닙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요.”

“응.”

“휴대폰 잘 들고 다녀요.”

“알았어.”

“너무 늦을 것 같으면 연락하고.”

“알겠다고! 내가 무슨 앤가. 쪼그만 자식이 아주 이래라저래라 잔말이 많아.”

선율이 구시렁대며 사라졌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유신은 입맛을 쩝 다셨다.

‘이러니까 더 수상한데.’

그의 안에서 음모론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아무래도 그녀가 돌아오기 전까지 엉덩이 한번 못 붙일 것 같다.

* * *

선율이 향한 곳은 강남의 한 부티크였다.

한낮의 태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마천루 아래 고고히 자리 잡은 부티크 숍. 입이 쩍 벌어지는 명품에서부터 한국에 한두 점 들어오는 한정판 아이템까지, 비교적 값비싼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였다.

선율이 방문한 이곳은 주로 스카프를 취급하는 점포였다. 협찬 물품을 수령하러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데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취향이 퍽 마음에 들어 언젠가 보너스를 받으면 꼭 와 봐야지 생각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점원의 안내에 따라 선율이 가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일행이 있어서요. 일단 천천히 둘러보고 있을게요.”

“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바로 옆에 위치한 백화점에 인파가 바글거리는 것에 비해 이곳은 무척 한적한 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카프 하나가 어지간한 고급 정장 한 벌의 가격을 호가하니 누구나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 두어 명이 내리깐 듯한 시선으로 스카프를 훑어보는 걸 제외하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이런 데 오니까 괜히 의식하게 되네. 나 오늘 제대로 입은 거 맞겠지?’

차려입는다고 입었는데 괜스레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선율은 조금 움츠러든 어깨를 펴며 천천히 매장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와, 예쁘네.”

오늘도 역시나 마음에 드는 아이템이 즐비했다. 실크 원단에 기하학적 프린팅이 그려진 아이보리색 스카프부터, 비비드한 색감을 자랑하는 화려한 스카프까지, 할 수만 있다면 가게를 쓸어 가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잠시 둘러보고 있는데 출입문이 딸랑거리며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선율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기다리던 얼굴에 선율이 반갑게 그녀에게 다가섰다.

“어머님, 오셨어요?”

“응. 오래 기다렸니? 이 앞까진 금방 왔는데 다 와서 차가 막히더라고.”

“아니에요. 저도 방금 도착했어요.”

막 가게로 들어선 이는 바로 상미였다. 그녀는 베이지색 원피스에 하얀색 단화를 신고 캐시미어 숄 케이프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원래 우아한 인상이라 그런지 특별히 신경 쓴 태가 나지 않음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새삼 어머님 미모가 대단하시네.’

청바지에 후줄근한 티셔츠만 걸쳐도 온 동네 시선을 쓸어 담던 유신의 외모가 어디서 나왔나 했더니. 이제 보니 상미를 많이 닮은 것 같다.

“일단 오라고 해서 오긴 했는데 무슨 일이야?”

상미가 조금 어색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저 이번에 상여금 엄청나게 많이 받았거든요. 어머님 선물 하나 해 드리고 싶어서요. 이참에 데이트도 하고요.”

어느새 어머님 소리가 입에 착 붙은 선율이다. 처음 몇 번은 아주머니라고 불렀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심스레 ‘어머님’ 하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상미가 특별히 불만을 표출하지 않아 쭉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안 그래도 큰 상을 받았다는 얘긴 들었어. 얘는, 선물은 네가 받아야지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나한테 선물을 하니?”

“사실 상여금 받으면 유신이한테 좋은 거 하나 해 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걘 돈이 너무 많아요. 제가 굳이 챙겨 줄 필요가 없더라고요. 아, 그렇다고 어머님이 돈이 없으시단 뜻은 아니고요.”

“알아, 얘.”

상미가 선율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웃었다.

몇 달이 흐르는 동안 둘은 꽤나 가까워졌다. 한때 상미가 입에 칼을 물고 반대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되기까진 누구보다 복수의 도움이 컸다.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상미에게 선율의 칭찬을 했고,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를 설파했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다고 상미가 버럭 화를 낼 때까지 그는 복음을 전파하듯 선율을 전파했다.

그 덕에 얼어붙었던 상미의 마음이 자연스레 녹았다. 색안경을 벗고 보니 또 예쁜 구석이 많은 아이라 상미도 어느새 선율을 의지하고 귀애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여긴 스카프 숍이잖아……?’

선율의 마음 씀씀이는 누구보다 깊고 따스했다. 괴한에게 습격을 당할 때 목에 상처를 입은 상미를 위해 스카프를 선물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짐작한 상미는 괜히 울컥했다.

‘얘가 또 아닌 척 사람을 감동시키네.’

무뚝뚝한 아들 하나 키우면서 딸도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는데 그토록 염원하던 딸이 생긴 기분이었다.

“어머님이 키가 크고 날씬하신 편이라 코트를 자주 입으시잖아요. 코트 위에 스카프 하나 걸치면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어떠세요?”

“여기 엄청 비쌀 거 같은데 무리하는 거 아니야?”

“어머님한테만 살짝 말씀드리는데 저 이번에 상여금 진짜 두둑하게 받았어요. 회사에서 받은 거랑 협회에서 받은 거 합치면 연봉보다 많아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요.”

소곤거리는 선율의 목소리가 꼭 종달새 같았다. 상미는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될까?”

“그럼요. 한번 골라 보세요.”

상미는 신중하게 스카프를 골랐다. 예쁜 마음으로 귀한 선물을 해 준다는데 대충 고를 수는 없었으니까.

“어머님 피부가 쿨톤이라 비비드한 색감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퍼플이나 그린이 섞인 것도 예쁘고요.”

“쿨톤이 뭐야?”

“아. 명도와 채도가 높은 컬러를 매치했을 때 생기 있어 보이는 피부색을 뜻해요. 오시기 전에 제가 몇 개 봐 두었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선율은 고심해 고른 스카프를 상미의 목에 대 주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찰떡같이 어울렸다. 상미는 선율이 찜해 둔 스카프 세 개를 들고 거의 삼십 분을 고민했다. 그렇게 마음에 드시면 세 개 다 사셔도 된다고 선율이 종알댔으나 상미는 기어이 그중 하나를 골라냈다.

“나 이걸로 할게.”

그녀가 고른 것은 은은한 아이보리 실크에 보라색 패턴이 들어간 트윌리 스카프였다. 선율이 제일 처음 골라 두었던 제품이었다.

“잘 고르셨네요. 저도 이게 제일 예쁘더라고요.”

“너무 예쁘다, 얘. 고마워서 어쩌지?”

“마음에 드세요?”

“마음에 들다마다! 이런 선물 처음 받아 봐.”

상미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정말 고맙다, 선율아. 내가 이런 걸 받을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어.”

무뚝뚝한 아들놈은 매번 용돈이나 줄 줄 알지 이렇게 고운 선물을 해 준 적은 없었다. 교직에서 퇴임한 후 처음 받아 보는 선물에 상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저녁은 내가 살게. 아주아주 비싼 걸로.”

“저 그럼 진짜 먹고 싶은 걸로 고를게요.”

“삼겹살, 돼지 찌개 뭐 이런 거 절대 안 돼. 나이프 쓰는 곳으로 골라.”

“네, 그럴게요.”

선율이 활짝 웃으며 스카프를 받아 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몸을 돌렸을 때였다. 문득 계산대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지?”

선율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손님 하나가 점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점포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가 왠지 귀에 익었다.

“저 사람은……?”

선율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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