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멀쩡하게 말하니까 목소리가 너무 좋잖아! 듣기 좋게 퍼지는 은은한 중저음에 상미의 얼굴이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제, 제가 그랬어요?”
화들짝 놀란 복수가 다시 어물쩍 말을 더듬는 걸 보고 상미는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됐어. 말 안 더듬으니까 장복수 같지 않아서 이상해. 그냥 편하게 해.”
“아,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너 막 선택적으로 말 더듬고 그러는 건 아니지?”
“그, 그런 건 아니에요. 좀 많이 기, 긴장하거나 그러면 가끔 안 더듬을 때도 있긴 있지만…….”
“내 앞에서 긴장할 일이 뭐가 있어.”
누님 앞이라 긴장하는 건데요.
복수는 속으로 대답하며 그저 허허 웃었다.
그를 세상에서 제일 긴장하게 하는 사람이 그녀인 걸 그녀는 아직 모른다. 그녀의 밝은 웃음소리가 얼마나 가슴을 간지럽히는지, 곱게 주름진 눈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와 재회한 순간부터 다시금 요란하게 뛰는 심장이 뭘 말하는지 복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자신과 달리 상미는 한번 결혼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장성한 아들이 있고. 사랑에 나이가 전부는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쉰이 넘으니 조심스럽기도 했다.
‘지금 이대로도 좋잖아. 부담 없이 만나서 저녁 식사도 할 수 있고, 가끔 주말에 만나서 영화도 볼 수 있고.’
섣불리 마음을 표현했다가 그녀가 덜컥 부담을 가질까 싶어 복수는 천천히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상미의 말에 복수의 다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 앞에선 긴장하지 마. 물론 네가 말 더듬는 게 좋다는 얘긴 아니지만…… 아, 그렇다고 싫다는 얘기도 아니고.”
“…….”
“말을 더듬으나 안 더듬으나 다 좋다는 소리야.”
아,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다 조, 좋다고요?”
“응?”
“방금 그, 그랬잖아요. 마, 말을 더듬으나 안 더듬으나 다 좋다고요.”
“네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상관없다는 뜻이야! 물론 그렇다고 네가 싫다는 얘기는 또 아니지만…….”
변명하다 보니 외려 수습이 어려워진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복수의 눈빛과 당근처럼 빨개진 상미의 얼굴.
분위기가 참을 수 없이 어색해졌다.
“어머, 선율이한테 전화 왔네.”
이 순간 걸려 온 전화 한 통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상미가 물티슈로 손을 닦으며 주절주절 혼잣말을 했다.
“밥때 전화를 건 거 보니 무척 급한 전화인가 보네. 얼른 가서 받고 올게.”
얼른 휴대폰을 들고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복수는 조금 전 그녀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다…… 좋아? 내가 싫지도 않고?’
겨우 잠재운 가슴이 다시 쿵쾅댔다. 그건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 느껴 본 가슴의 떨림이었다.
스무 살 때 몇 달 사귄 여자를 잊지 못하고 제 인생을 갈아 바친 유신을 보며 세기의 사랑꾼 납셨다고 놀려 댔었는데.
‘이제 더는 못 놀릴 것 같아…….’
망아지처럼 뛰는 심장을 꾹 누르며 복수가 한탄했다.
아무래도 이제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
* * *
선율이 만든 TV 광고는 공중파를 휩쓸었다. 주말 광고의 메인 시간대에 당당히 들어간 광고는 좋은 호응을 얻었고 베링거 모터스의 위상도 한층 높아졌다. 맥파이가 디자인한 자동차의 압도적인 비주얼을 잘 살려 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한 유튜버가 흑표범 대신 두꺼비를 삽입한 것을 계기로 패러디 열풍까지 불었다. 그야말로 호재였다.
선율은 이 광고 하나로 ‘올해의 광고인 상’을 거머쥐었다. 재작년에 바이디오에서 제작한 커피 광고가 같은 상의 후보작으로 올랐다가 미끄러진 걸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선후배 광고인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상패를 받던 날 선율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입사해 그 빡세다는 광고판에서 구르고 뒹군 노고를 이제야 인정받는 것 같았다.
방성범 부장은 그녀의 수상을 제 일처럼 기뻐하며 성대하게 축하 파티를 열어 주었고, 선율은 바이디오의 모든 직원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그러나 진짜 파티는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시작이었다.
“왔어요?”
캄캄한 호텔 룸 안에 동그란 유리병에 담긴 촛불이 반짝반짝 길을 만들고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길을 따라가 보니 호텔 발코니와 연결된 야외 수영장에 유신이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수 풀장 바깥에 따뜻한 난로가 켜진 카바나.
유신은 그 안에 비스듬히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수영장에 있었는지 머리는 흠뻑 젖어 있었고 몸엔 하얀 가운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야밤에 웬 수영이야? 촛불은 또 뭐고.”
“축하 파티 해야지.”
그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에게서 물 냄새가 났다.
“선배 주려고 곱게 매듭도 지어 놨는데.”
그가 선율의 손을 끌어 느슨하게 묶은 허리 매듭 위에 올려놓았다. 축하 파티에서 샴페인을 많이 마셔 조금 알딸딸한 선율은 그의 뜨거운 눈빛에 취기가 배가되는 것 같았다.
“설마 선물이 너야? 너무 고전적인 수법이잖아.”
“받고 나서 울지나 말아요.”
귓바퀴를 느리게 훑는 숨결에 선율의 가슴이 요동쳤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해도 끝내는 울먹이게 만드는 그를 잘 알기에 오늘 그가 얼마나 대단한 밤을 선사할지 기대가 됐다. 선율은 매듭을 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이거 풀면, 파티 시작인 거야?”
“시작은 그런데.”
유신이 씩 웃으며 말했다.
“선배가 원할 때 끝낼 수는 없을 거예요.”
어둑한 조명 아래 드러난 또렷한 윤곽은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이며 붉은 입술이며 뭐 하나 섹시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선율은 끌리듯 유신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시선 바로 앞에 펼쳐진 탄탄한 가슴 근육이 흠잡을 데 없이 매끈했다.
이걸 어떻게 거부해.
제아무리 목석이라도 지금의 유신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선율의 입에서 더운 숨이 새었다.
“네 마음대로 해. 나도 그럴 테니까.”
선율의 손길에 유신의 가운 매듭이 스르륵 풀렸다. 유신은 선율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입술을 비스듬히 올렸다.
“내가 어디까지 할 줄 알고?”
“설마 죽이진 않겠지.”
“죽여주게 잘할 자신은 있어요.”
선율이 두 팔로 유신의 목을 감는 순간 그녀의 발이 번쩍 들렸다. 유신은 그녀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친 채 따끈하게 데워진 카바나로 향했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사이 선율의 재킷이 벗겨지고 블라우스 단추가 반쯤 뜯겨 나갔다. 허벅지에 딱 붙는 펜슬 스커트는 어느새 말려 올라가 제 기능을 상실했다.
초옥, 촉.
입술이 섞이는 야릇한 마찰음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율의 몸은 푹신한 담요 위에 눕혀졌다. 선율은 달아오른 눈으로 유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가운이 툭 떨어지는 순간 그녀의 시선이 저절로 그의 몸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흉포한 기세로 일어난 그의 몸이 위협하듯 선율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의 머리칼에서 뚝뚝 떨어진 물방울이 선율의 블라우스에 닿아 진한 얼룩을 만들어 냈다. 얇디얇은 블라우스 위로 도드라지는 곡선을 유신이 한입에 머금었다.
“흣.”
온몸에 퍼지는 야릇한 감각에 선율이 고개를 젖혔다. 유신은 가볍게 선율의 목덜미를 한 손에 쥔 채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옷 위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에 선율의 아랫배가 간질거렸다.
‘더, 조금만 더.’
그에게 점령된 말초 신경이 아우성쳤다. 선율은 유신의 젖은 머리칼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달뜬 입술에선 자꾸만 신음이 흐르고 가슴은 폭발할 것처럼 뛰었다.
“오늘따라 더 예민한 것 같은데.”
크게 들썩이는 가슴 위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자극적이라 선율은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술을 좀 마셔서 그런가 봐.”
“더 잘해 줘야겠네.”
유신의 입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동시에 그의 왼손은 두어 개 남은 블라우스 단추를 툭툭 풀어내었다.
맨살에 히터로 데워진 바람이 닿았다. 정반대로 카바나 바깥으로 뻗어진 두 발에는 찬 공기가 스쳤다. 그것 자체로 묘한 쾌락이 느껴졌으나 유신은 조금 차가워진 그녀의 두 발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손을 뻗어 탁자 위의 유리병 하나를 집었다. 호리병 모양의 그것은 손바닥 반만 한 길이의 예쁜 병이었다.
“그게 뭐야?”
“기분 좋게 해 줄게요.”
쪼르륵.
투명한 액체가 선율의 발목을 타고 흘렀다. 매우 부드럽고 미끌미끌한 감촉에 선율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사지 오일인가 보네.’
차가웠던 발이 금세 후끈해졌다. 매끈한 종아리를 따라 유신의 손바닥이 천천히 오갈 때마다 선율의 가슴이 함께 들썩였다.
“아……. 나른하다.”
취기가 오른 선율의 눈꺼풀이 감기려 했다. 그러나 유신은 그것 역시 용납하지 않았다.
“설마 자려고? 안 될 텐데.”
종아리를 마사지하던 손이 미끄러지듯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파라핀으로 한 겹 씌운 듯 보들보들한 손이 촘촘하게 감각을 깨웠다.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선율의 두 다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유신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너무 나태하게 굴었네. 이제부터 여유 부릴 시간은 없을 거예요.”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거침없이 선율을 몰아쳤다. 마사지로 나른하게 풀린 선율의 몸 곳곳을 훑고 예민해진 살갗을 빨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백기를 든 선율의 위를 짓이길 듯 내리누르며, 때론 아기를 다루듯 보드랍게 감싸며 끊임없이 선율을 구름 위로 인도했다.
“좋아……. 너무 좋아, 유신아.”
선율의 잇새를 타고 연신 신음이 흘렀다. 유신이 참지 못하고 터트린 거친 숨은 그녀를 더욱 절정으로 몰아갔다.
“아흑!”
온몸의 근육이 꽉 조여들었다가 이내 느슨해졌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그녀의 어깨에 유신이 길게 입을 맞추었다.
“힘들어요?”
선율은 땀에 젖은 유신의 앞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며 대답했다.
“응, 조금.”
너 같으면 안 힘들겠니.
그러나 유신은 자비가 없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뻗으면 안 되죠.”
장난스레 웃은 그가 움푹 파인 쇄골 아래에 쪼르륵 액체를 따랐다. 미끌미끌한 마사지 오일이 곤두선 살갗에 닿아 부드럽게 퍼졌다. 그것만으로도 또다시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졌다.
“지금…… 바로 하자고?”
“응. 지금, 바로.”
선율은 몹시 팔팔한 그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다시 한번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