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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 이렇게 소란 피우면 바로 수용실로 복귀시킬 겁니다. 알겠어요?”
감시관이 신경질적으로 주의를 주었다. 기철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간신히 가라앉히며 자리에 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유신을 노려보던 기철이 울분을 토해 냈다.
“온 김에 하나 묻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냐?”
유신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괴롭히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검사가 10년 구형한다며. 그거로도 모자라서 언론까지 들쑤시고 다니는 거야?”
“글쎄.”
유신이 비스듬히 입술을 말아 올렸다.
“몰카를 찍었으니 찍었다고 했고, 내 디자인을 훔쳤으니 도용했다고 했고,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죽을 뻔했다고 했고. 여기서 네가 한 짓 아닌 거 있어?”
“그래도 알고 지내던 정이란 게 있잖아!”
뱉어 놓고도 무안한지 기철의 얼굴이 벌게졌다. 유신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귀를 후볐다.
“정이라. 그 안에서 썩더니 정신이 어떻게 됐나 보네.”
“야! 미운 정도 정 아니냐? 너 코흘리개로 대학교 입학했을 때 챙겨 준 게 누군데! 나 아니었으면 그렇게 수월하게 대학 생활했을 거 같아? 너 농구 동아리 소개해 준 것도 나였고, 또…… 또…….”
“끝까지 구차하네. 없어 보이게.”
유신은 용건 끝났다는 듯 피식 조소하며 일어났다. 형편없이 초라해진 기철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볼일은 다 끝났다. 그나마 하얀 피부가 매력적이던 기철의 낯빛이 퀭하게 죽은 걸 보니 그 안에서의 생활이 어떤지는 안 봐도 뻔했다.
“야, 가는 거야? 그냥 이렇게 간다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앉아 있던 기철이 쇠창살을 움켜잡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유신은 다시는 이곳에 발걸음하지 않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아챈 기철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야, 잠깐만!”
“왜.”
다행히 유신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한 번만 봐줘.”
“응? 잘 안 들리는데?”
“한 번 봐주라고! 네가 합의해 주면 형량 낮출 수 있다며. 여기서 나가면 절대, 두 번 다시는 네 눈앞에 띄지 않을게. 절대 안 건드려! 진짜야!”
“약속할 수 있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뱉어 낸 기철의 낯빛에 언뜻 화색이 돌았다. 그는 쇠창살을 붙잡고 있던 손을 가지런히 가슴 앞에 모았다.
“당연하지.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해. 절대로 다른 마음 안 품어. 진짜야.”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에 따라 형량이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이 나라 법이니까.
유신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기철을 보며 느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어쩌냐. 난 약속 못 하겠는데.”
“……뭐?”
“너 나오면 내가 죽여 버릴지도 모르겠거든.”
타악!
유신이 유리창에 거세게 손바닥을 붙였다.
“그러니까 평생 그 안에서 썩어. 값어치 없는 목숨이라도 부지하고 싶으면.”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숨기지 못한 살의로 번뜩였다. 기철은 심장이 팍 쪼그라들었다. 동시에 분노가 솟구쳤다.
“이 개자식이! 진짜 죽고 싶어?”
그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기하고 있던 감시관들이 신속하게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9403 수용자, 면회 종료!”
사정없이 끌려 들어가면서도 기철은 저주를 퍼부었다.
“너 딱 기다려! 내가 여기서 나가는 순간 넌 뒈지는 거야. 알아?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줄게! 너뿐만이 아니야. 한선율 그 계집애고 황주희고 할 것 없이 너와 관련된 건 다 없애 버릴 거야. 아아아아악!”
유신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해. 거기서 나올 수 있으면 말이지.”
이로써 김기철을 사회에 방생하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낮게 짓씹는 유신의 입술은 살벌할 정도의 한기를 품고 있었다.
* * *
병원 치료가 끝난 후 상미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일상이라고 해 봐야 특별한 건 없었다. 예전에 유신이 감옥에 들어가면서 교편을 접었기 때문에 출근할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살 부대끼고 사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온종일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녀의 집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일 층짜리 단독 주택이었다. 소박한 집에 비해 정원이 넓은 편이라 낮에는 잔디를 돌보고 오후엔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주그룹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었는데 그들이 죗값을 치르고 있는 지금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단조롭기 짝이 없는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님!”
“왔어?”
옆집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퍼지는 저녁, 그녀의 집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쑥스러운 듯 곱슬머리를 긁으며 들어온 이는 바로 복수였다.
“퇴, 퇴근하는 길에 트럭에서 치, 치킨을 팔길래 사 왔어요. 두 마리에 칠천 원, 세 마리에 만 원이라 그냥 만 원어치 사긴 했는데…….”
손에 덜렁거리는 비닐봉지를 등 뒤로 감추는 그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새, 생각해 보니 괜히 샀나 해서요. 누, 누님은 길거리 음식 별로 안 좋아하시죠?”
“왜. 나 이런 거 좋아해. 특히 치킨이면 환장을 하고.”
“화, 환장까지요?”
소심하게 눈치를 보던 복수의 안면에 화색이 돌았다. 덜컥 사 놓고 안 좋아하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생각보다 좋아해 주는 상미의 반응에 힘이 번쩍 났다.
“그, 그럼 같이 먹을까요?”
“그래. 날씨도 많이 풀렸으니 정원에서 먹는 거 어때?”
“좋아요. 좋고말고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복수를 보며 상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나이가 쉰인데 아직도 꼭 중학생 때 그 애 같네.’
무슨 말만 하면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꼭 사춘기 소년 같아서 상미는 절로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친해진 데는 유신의 도움이 컸다. 복수의 첫사랑이 상미인 걸 알게 된 후 그는 은근슬쩍 복수의 옆구리를 찔러 상미의 곁을 맴돌게 했다. 복수는 유신이 아는 한 세상에서 제일 때 묻지 않은 사람이었다. 세상 풍파에 시달리며 지쳐 버린 상미를 보듬어 주는 데 그만큼 적절한 인물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20년이 넘게 홀로 지낸 상미는 처음엔 그런 복수를 부담스러워했으나 차츰 그의 진심에 마음을 열어 갔다. 퇴근한 복수가 집에 들르는 날이 많아지고, 용기 내어 하는 연락이 잦아질수록 상미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럼 밖에서 먹을 거 대충 챙겨서 나올게. 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잠시 후 상미가 집 안에서 나무젓가락과 앞접시를 들고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도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묵직한 무게감을 감지하고 얼른 받아 들러 간 복수는 봉지를 열어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복 누님, 수, 술도 마실 줄 알아요?”
봉지 안에 든 것은 맥주 네 캔이었다. 상미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 뭐 이런 거에 놀라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많이는 못 마셔도 맥주 한 캔 정도는 즐길 줄 알아. 너는?”
“저, 저야 주면 주는 대로 먹죠.”
치킨에 맥주라니, 캬!
복수의 입 안에서 군침이 돌았다. 하늘 같은 누님 앞에서 언감생심 말도 못 꺼내 봤는데 알아서 챙겨 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그럼 먹어 보자.”
복수가 사 온 치킨은 조금 눅눅했으나 맛이 있었다. 딱 옛날 시골 장터에서 팔던 느낌 그대로였다. 짭조름한 치킨에 맥주는 아주 찰떡궁합이었고, 밤공기는 찼으나 분위기는 훈훈했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먹으니 혼자 먹을 때보다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매일 혼자서 먹다가 둘이 먹으니 더 맛있긴 하네.’
이렇게 누군가와 저녁을 함께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상미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 대던 복수가 문득 상미에게 물었다.
“복 누님,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그, 그때 왜 도와주셨어요?”
“언제?”
“애, 애들이 저보고 단수복수라고 놀릴 때…….”
“아아, 그거.”
잠시 기억을 더듬어 본 상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꿀꺽.
복수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안 나.”
“……아, 네.”
역시나 기대했던 대답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복수는 무척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럴 수도 있죠. 벌써 30년도 넘은 일인데요. 돌아서면 어, 어제 일도 까먹는 나이인데요 뭐, 하하.”
애써 괜찮은 척하는 복수를 보니 괜히 마음이 짠했다. 상미는 괜히 솔직히 얘기했나 잠시 후회했다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안 나는데 지금 너 보고 있으니까 그런 생각 든다. 도와주고 싶었나 봐.”
“제, 제가 불쌍해 보여서요?”
“얘 좀 봐. 네가 어딜 봐서 불쌍하니? 머리 똑똑해, 돈도 많아, 직업 탄탄해.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눈치 없다고 사람들이 욕해.”
“그, 그럼요?”
“지켜 주고 싶다는 거지!”
“저를, 지켜 주고 싶어요?”
얼핏 복수의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그 눈빛에 상미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 아니. 내가 널 지켜 주고 싶다는 게 아니라 네가 좀 그런 면이 있다는 뜻이지. 애가 하도 어수룩하니까 보호 본능을 자극한달까 뭐 그런 거 있잖아!”
말을 뱉어 놓고 보니 더 이상해서 상미는 뜨거워진 얼굴에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복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누님이 지켜 주면 한평생 어디 가서 맞고 올 일은 없겠네요.”
히끅!
“지켜 달라고 부탁해도 돼요?”
히끅!
급히 마신 맥주가 목에 걸렸는지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감정이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펌프질을 하듯 쭉 끌어올려졌다.
엄마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사실.
엄마가 되기 전엔 그녀 역시 가슴 설렜던 순간이 있었고, 세상이 끝날 것처럼 불타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새 쉰이 넘어 누군가의 엄마로서도 소임을 다했을 무렵, 다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주책맞게 나 왜 이러는 거야.’
어느새 상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그 감정은 말라 버린 게 아니었다. 사는 게 바빠 그저 잊고 지냈을 뿐이었다. 돌아보면 너무 가슴이 시려서 그저 책장의 맨 뒷장으로 넘겨 두었던 그 감정이 이제야 일어나 무뎌진 가슴을 두드린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하얘져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상미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그런데 너 왜, 왜 말 안 더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