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눈을 떠 보니 창가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선율은 찌뿌둥한 몸으로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아, 머리야.”
어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잔 두 잔 받아먹다 보니 얼큰하게 취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뺄 수가 없었다. 주희와 택시를 탄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집까지는 잘 온 모양인데.
“깼어요?”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유신이 머리를 털며 다가왔다. 선율은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어제 완전 필름 끊겼나 봐. 나 어떻게 들어왔어?”
“주희랑 택시 타고 왔길래 내가 내려갔죠.”
“헉, 업고 들어왔어? 너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어떻게?”
“별로 무겁지도 않던데.”
아이고, 한선율 이 화상아.
선율은 이불 속에서 제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거의 회복이 되었다곤 하지만 유신은 아직 조심해야 할 시기였다. 무거운 걸 든다거나 힘을 쓰는 일은 자제하라고 의사가 거듭 당부했는데 이렇게 민폐를 끼칠 줄이야. 아무리 회식의 주인공이었다고 해도 택시에서 잠들 정도로는 마시지 말아야 했는데 후회가 몰려왔다.
“해장할래요?”
자괴감에 버둥거리는 선율을 향해 유신이 물었다.
“속이 너무 메슥거려. 그냥 아이스크림 먹을래.”
“사 올게.”
유신은 두말 하지 않고 외투를 입고 나섰다. 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선율은 또 한 번 자괴감에 몸부림쳤다.
‘괜히 아이스크림 먹자고 했네. 집에 아이스크림 하나 없을 줄 누가 알았나?’
잠시 후 돌아온 유신의 손엔 온갖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든 봉지가 들려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골라 먹는 재미가 있잖아요. 뭐 먹을래요?”
“음……. 난 이거.”
선율이 고른 것은 아이스크림콘이었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에 꼭 아이스크림으로 해장을 하는 그녀는 그중에서도 바닐라 맛을 제일 좋아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덮고 있는 투명 뚜껑을 야무지게 깐 그녀가 뚜껑에 붙은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차가운 것이 들어가니 속이 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유신은 혀로 할짝할짝 뚜껑을 핥아 먹는 선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가만 보면 되게 야한 여자라니까. 아이스크림을 꼭 그렇게 섹시하게 먹어야 해요?”
“뭐래. 뚜껑에 묻은 거 안 먹고 버리는 건 몰상식한 행동이야.”
선율은 아랑곳없이 뚜껑을 할짝거렸다. 요구르트고 아이스크림이고 자고로 뚜껑에 묻은 게 제일 맛있는 법이다. 뚜껑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남김없이 핥아 먹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본체를 공략하려 할 때 새 뚜껑이 불쑥 내밀렸다.
“뭐야?”
“선배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어느새 새 아이스크림을 개봉한 유신이었다. 선율은 어이가 없어 그를 째려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먹으려고 하는데 자꾸 방해할래?”
“먹으면 되잖아. 아까처럼 핥아서.”
되게 자극되는데 그거.
그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음흉함에 선율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아이스크림 먹는데 자꾸 야한 생각 하지 말라고!”
“선배가 내 몸을 핥아 주는 상상을 했다고는 안 했는데.”
“야!”
선율은 아이스크림을 양손에 들고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헉.”
대참사.
살짝만 틀어막으려 했는데 그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턱이며 귀며 온통 아이스크림 범벅이 되었다. 따뜻한 체온에 금세 녹아 뚝뚝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괜히 미안해진 선율이 타박했다.
“꼴좋다. 그러게 누가 먹는데 건드리래?”
“그러게. 잘됐네.”
유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끈적이는 액체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가 나른하게 고개를 젖혔다.
“핥아요.”
“뭐?”
“해장해야지.”
유신이 아랫입술을 혀로 느릿하게 핥았다. 에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그 모습은 아침에 보기엔 지나치게 색정적이었다. 깨끗하게 닦여 나간 아이스크림 아래로 붉은 입술이 번들거렸다. 선율의 목구멍으로 꿀꺽 마른침이 넘어갔다.
“해장……하긴 해야지.”
갈등도 잠시, 선율은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섰다. 한 방울씩 똑똑 흐르는 액체를 혀로 받아먹은 그녀가 달팽이처럼 유신의 턱선을 핥고 올라갔다. 고개를 젖힌 유신의 목젖이 크게 꿈틀대는 광경에 선율의 입에서 으흥, 절로 콧소리가 났다.
“하…….”
유신의 잇새로 낮은 숨이 샜다. 금세 달아오른 그의 몸이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졌다. 그가 허벅지 위로 올라온 선율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았다. 꽉 조여진 몸이 그의 탄탄한 아랫배에 밀착되었다.
“맛이 어때요?”
“달아.”
“그리고?”
“흥분돼.”
유신은 만족한 듯 치아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곤 곧장 선율의 입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나도.”
달짝지근한 맛이 서로의 입술을 타고 전해졌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이 끈적하게 녹아 서로의 몸에서 입술로 흘러들었다.
아이스크림으로 해장할 줄만 알았지 이렇게 용도가 무궁무진할 줄은 몰랐는데.
몸에 닿았다가 유신의 입 속으로 남김없이 빨려 들어가는 액체를 보며 선율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아침, 그가 선사한 신세계에 또다시 황홀경이 펼쳐졌다.
* * *
삶에도 빛깔이 있다.
유신의 어린 시절은 핑크빛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음에도 할머니와 어머니는 한 치 모자람 없게 사랑으로 품어 주셨고 학창 시절은 나름 재밌었다.
대학교에 입학해 선율을 만난 순간은 완연한 붉은빛이었다. 그녀로 인해 사랑을 알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견뎌 낼 줄 알게 되었다.
기철의 농간으로 감옥에 들어간 순간은 글쎄. 굳이 표현하자면 새카만 어둠이었으나 그 안에서도 유신은 빛을 찾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 빛의 끝에서 복수를 만났고 두 사람은 가족보다 더한 믿음으로 끈끈해졌다.
그리고 지금.
선율을 품에 안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그의 삶은 총천연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고, 푸르고, 따뜻하고 서늘했다. 밤새 시달리다 겨우 잠든 그녀의 천사 같은 얼굴을 바라보면 가슴이 뜨거워졌다가 또 언제 이 행복이 깨질지 몰라 불안했다. 손에 넣었다 싶으면 사라지는 신기루처럼 선율은 언제나 그에게 긴장감을 주는 여자였다.
‘그럼 또 어때. 잡으러 가면 되지.’
유신은 낮게 웃으며 선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오후엔 경찰서에 가기로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지난번 기철이 선율에 집에 설치했다가 변기에 넣어 내려 버린 초소형 몰카를 찾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설마하니 그걸 정말로 찾게 될 줄 기철은 몰랐겠지만 유신은 한번 뱉은 말엔 끝장을 보는 남자였다.
“기왕이면 확실히 조져 놔야지.”
이미 기철은 살인 미수 혐의와 불법 촬영 혐의, 디자인 도용 혐의 등으로 기소된 상태였다. 검찰은 그에게 최소 10년을 구형할 거라 했지만 유신은 그 정도론 성에 차지 않았다.
“아예 바깥 공기를 못 마시게 만들어야겠어.”
그는 이 문제를 공론화할 생각이었다. 선율이 찍혀 있지는 않으나 엄연히 그녀의 방을 2박 3일이나 도촬한 중범죄였다.
그는 이를 언론사에 제보해 몰카 범죄의 심각성을 알릴 계획이었다. 언론이 움직이면 검찰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거고 구형도 달라질 것이다.
담당 형사에게 카메라 메모리를 넘기고 돌아오는 길.
경찰서를 나서던 유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김기철 이 근처에 수감되어 있지 않나?’
아직 확정 판결이 나지 않은 기철은 경찰서에서 멀지 않은 서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은 한번 봐 줘야지.’
씨익 웃은 그가 구치소를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면회 신청하러 왔습니다.”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면회 신청서를 작성하는 유신의 필체가 유독 시원스러웠다.
* * *
기철은 요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 구치소는 여섯 명의 인원이 한 방을 썼다. 방이 세 개나 있는 오피스텔을 독차지하며 살다가 여러 명과 살 부대끼며 지내려니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의 변호사는 미결 수용자만 모여 있는 곳이라 비교적 편할 거라고 얘기했으나 실상은 달랐다.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며 제대로 씻지도 않는 놈들의 몸에서 나는 구린내에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게다가 텃세는 오죽 심한가! 미결 수용자라 만만할 줄 알았더니 개중 어릴 때부터 소년원을 들락거리던 조폭 놈이 하나 끼어 있어 시도 때도 없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하아, 미치겠네. 엄마는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사실 경찰에 잡힐 때만 해도 이 정도로 상황이 암담할 줄은 몰랐다. 늘 그랬듯 계순이 손을 써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김한주 회장이 구속된 상황에서 그가 믿을 사람은 계순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철이 하나 계산하지 못한 건 계순이 할 줄 아는 게 울고불고 짜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남편이 곁에 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당장 닥친 일을 처리하는 데 급급했다. 기한이 도래한 어음을 막고 부도 위기에 처한 한주그룹에 심폐 소생을 하느라 혼이 쏙 빠져 기철을 돌볼 틈이 없었다. 그간 쌓아 온 비자금을 탈탈 털어 어마어마한 경력의 변호인단을 구성해 준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망할, 이러다가 진짜 감옥에서 몇 년이나 썩는 거 아니야?”
구치소에 수감된 지 한 달여가 지나자 기철은 진심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기철에게 면회 신청이 들어왔다. 당연히 계순일 거라 생각한 기철은 두말할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엄마 만나면 방부터 옮겨 달라고 해야겠어. 저 문신 돼지가 코를 고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그는 볕이 잘 들어오는 자리에 떡하니 대자로 누워 있는 조폭을 째려보며 조용히 수용실을 나섰다.
그러나 면회실에 앉아 있는 건 계순이 아니었다.
“조유신?”
죽상을 하고 나온 그의 눈꼬리가 험악하게 구겨졌다.
“네가 여길 왜 와. 죽고 싶어 환장했어?”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앉은 유신의 입가가 씨익 호선을 그렸다.
“얼마나 망가졌나 구경하러 왔지. 그 안이 얼마나 엿 같은지 알거든.”
“이 개새끼가 진짜……!”
콰앙!
순식간에 달려든 기철이 주먹으로 유리를 내리쳤다. 앞을 가로막은 쇠창살이 아니었다면 단번에 목덜미를 잡아챌 만큼 거친 모습이었다.
그러나 건너편에 앉은 유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