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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서비스 (62)화 (62/85)

62

기철에게서 살해 청부를 받았다는 문형주의 연락을 받은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야, 유신아. 너 김기철이라는 놈 알아? 그 자식이 널 엮으려고 수작을 부리던데?

그에게 전화를 받은 날 유신은 기철이 뻗은 마수에 스스로를 던지려는 계획을 짰다. 기철에게 청부업자를 구했다고 전한 것도, 준기의 묘소에 간다는 얘길 박 주임에게 흘린 것도 모두 유신의 계략이었다. 문형주의 입에서 ‘차로 밀어 버리란’ 얘기가 나온 것 역시 유신이 계획한 바였다.

그는 기철이 제가 파 놓은 구덩이로 스스로 걸어와 줄 거라 확신했다. 기철이 살해 청부를 했다는 것 자체가 궁지에 몰렸다는 뜻이니까. 앞날을 생각하지 않는 놈에게 유신이 던진 미끼는 덥석 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정도로 달콤할 것이다.

두꺼운 방탄조끼를 몇 겹이나 입고서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며 유신은 오직 선율을 생각했다. 그녀에게서 기철을 영원히 격리시켜야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그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질 수는 없었을 거다.

‘기다려, 선배. 반드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해 줄게.’

몰카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매일 집 안을 샅샅이 뒤지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드는 그녀를 알기에.

‘내가 꼭 그렇게 만들 거야.’

화장실에서 작은 인기척만 들려도 화들짝 놀라 뛰쳐나오는 그녀를 알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유신은 형주에게 슈퍼 스터드를 넘기는 조건으로 그를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문형주는 돈과 몰카에 미친놈이었다. 그가 굳이 기철의 소식을 제게 전했다는 것은 그와 지켜야 할 얄팍한 의리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유신으로서는 더 많은 이득을 그에게 안겨 주면 그만이었다. 해서 국내에 단 두 대뿐이라 부르는 게 값인 슈퍼 스터드를 그에게 넘기고 기철을 옭아맬 거대한 수렁을 팠다.

콰앙!

자동차가 둔탁하게 부딪쳐 올 때는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잠시 동안 허공을 날며 얼핏 정신을 잃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유신은 해냈다.

그는 죽지 않았고 기철은 꼼짝없이 붙잡혀 구치소에 갇혔다.

“한주그룹 김한주 회장의 장남 김기철 씨가 구속된 지 나흘이 흘렀습니다. 지난 6일, 대학교 동문이던 조모 씨를 차로 치어 죽이려 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현재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데요. 검찰은 그를 조모 씨 살해 미수 혐의로 기소할 방침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김한주 회장 부자가 나란히 구속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한주그룹의 위기는 계속되고 있는데요. 불매 운동으로 매출이 오십 퍼센트 이상 급감한 와중에 김기철 씨의 구속 소식이 알려지며 정부에서 지급한 연구 지원금을 회수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써 한주그룹은 설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띠리릭.

유신이 보고 있던 뉴스를 껐다.

채널을 돌릴 때마다 들려오는 한주그룹 얘기에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트랙을 달리던 자동차가 터지는 장면은 볼 때마다 흐뭇했지만 기사 말미에 꼭 딸려 오는 한주와 기철의 얼굴을 보는 건 달갑지 않았다.

“어디 갔다 와요. 한참 기다렸잖아.”

“화장실 다녀왔어. 나 찾았어? 왜?”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해요.”

마침 병실 문을 열고 선율이 들어섰다. 젖은 손을 가볍게 옷에 쓱쓱 닦으며 그녀가 핀잔했다.

“아예 주머니에 넣어서 다니지, 왜?”

“들어가는 사이즈였으면 진즉 그렇게 했지.”

“어휴, 정말.”

선율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다치고 나서 얼마나 응석이 늘었는지 눈앞에서 1초만 사라져도 저렇게 야단법석이다. 선율은 사과와 키위를 깎아 그의 옆에 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먹여 줘.”

“손가락은 안 다친 걸로 아는데?”

“사람 근육이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에요. 손가락 움직일 때마다 갈비뼈도 같이 움직인다고.”

“어젯밤엔 잘도 움직이더니.”

“그런 용도론 지금도 잘할 수 있고.”

선율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물들었다. 어젯밤 온몸 곳곳을 휘젓던 그의 손길이 떠오른 탓이다. 괴물 같은 회복력으로 어느 정도 살 만해지자마자 그는 선율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부상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얼마나 지분대는지 선율이 학을 뗄 정도였다. 병실에서 이러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만류해도 곧 죽을 것처럼 매달리니 선율로선 받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 가는데.”

유신의 입에 키위를 쏙 넣어 준 선율이 몸을 일으켰다. 엉덩이를 떼자마자 보채는 그에게 선율이 곱게 눈을 흘겼다.

“무릎 꿇으러 간다, 왜!”

“……엄마한테?”

“응.”

유신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같이 가요.”

“조유신.”

선율은 그런 그를 부드럽게 만류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어쩌려고.”

“네 눈에 내가 한없이 약해 보이고 지켜 줘야 할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나도 엄연한 성인이야. 회사에선 무려 칼선율이라고 불린다고.”

“입에 칼 문 사람인 거 나도 알지.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좀 다르잖아요.”

“한 번만 믿어 봐. 잘할 수 있어.”

선율은 씩씩하게 말했지만 유신은 걱정을 떨칠 수 없었다.

“우리 엄마 독설 장난 아닌데. 한번 찔리면 피가 철철 날 텐데?”

“그 정도 각오는 했어.”

“방탄조끼 빌려줄까?”

“김기철 차에 치일 때 입었던 거? 그건 너덜거려서 못 쓰겠더라.”

선율이 훌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야무진 걸음으로 병실을 나서는 선율의 뒷모습에서 유신은 눈을 떼지 못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작은 한숨이 그의 입가에 고였다.

* * *

상미의 병실은 유신이 입원한 층에서 두 층 위에 있었다. 모자가 나란히 병원 신세라니, 생각할수록 기철이 괘씸해 선율은 계단을 올라가는 내내 속으로 욕을 했다.

‘천벌을 받아도 모자랄 인간 말종! 쓰레기차도 안 주워 갈 놈들 같으니라고!’

그런 놈과 반년을 사귀었다니 정말이지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되면 그대로 주먹이 날아갈 것 같았다.

선율이 유신의 곁을 지키는 동안 상미의 병실은 복수가 지키고 있었다. 복수는 상미에게 유신이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머리를 다친 상미가 행여 충격을 받을까 봐 그렇게 둘러댄 것인데 유신이 예상보다 늦게 의식을 회복하면서 거짓말이 길어지게 되었다.

‘아저씨도 안에 계시려나?’

선율은 발끝을 쫑긋 세우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미는 홀로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복수 아저씨는 아직 퇴근 전인가 보네.’

두 사람이 과거에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다는 얘길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복수의 첫사랑이 상미라는 얘기까지 듣고 나니 인연이란 게 뭔지 새삼 무서우리만치 촘촘하단 생각이 들었다.

“후우.”

심호흡을 한번 한 선율이 다부진 손길로 병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님.”

문을 열고 들어선 선율을 보고 상미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그녀 혼자서 여길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선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상미는 이내 경직된 미간을 풀고 손짓했다.

“왔으면 앉아요.”

“네.”

선율은 간이 의자를 끌어다 상미의 곁에 앉았다. 무슨 말을 먼저 꺼낼까, 여기 오기 전에 계속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먼저 말을 꺼낸 건 상미였다.

“우리 유신이는…… 괜찮아요?”

“무슨 뜻으로 하는 말씀이신지.”

선율은 조금 당황했다.

“나 바보 아니에요.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 줘요.”

상미가 선율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우리 유신이가 출장을 갔다고 복수가 그러더군요.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머님.”

“엄마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는데 출장을 강행할 만큼 모진 아이가 아니에요. 행여 모르고 떠났다 해도 바로 돌아왔을 거예요. 내 아들은 내가 잘 알아.”

게다가 뉴스에선 김기철에게 테러를 당한 조모 씨에 대해 연일 떠들어 댔다. 그걸 보고도 사태를 짐작하지 못할 수가 없었다.

선율은 더 이상 상미를 속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머리를 다친 부분은 잘 회복이 되고 있고 후유증도 없어서 사실대로 얘기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신이 괜찮아요. 교통사고가 나서 조금 다쳤는데 의식 잘 찾았고 회복도 순조롭게 되고 있어요.”

“다행이네.”

“내일쯤이면 얼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아직 갈비뼈가 붙지 않아서 거동이 불편하긴 한데 내일 정도면 휠체어는 탈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상미의 얼굴에 언뜻 안도감이 비쳤다.

“뉴스 보니 맨몸으로 차에 부딪혔다고 하더군요.”

“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 정도로 다쳤으면 큰일은 이미 난 거라 봐야지.”

어쩐지 상미의 말투가 뾰족하게 느껴졌다. 선율이 뭐라 얘기하기도 전에 상미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 사고가 선율 씨와 아주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네?”

“김기철이 저지른 짓이잖아. 아가씨 이전 남자친구 말이에요.”

와……. 어머님 정말 훅 들어오시네. 독설 날리는 덴 일가견이 있는 분이라 들었지만 이렇게 여유도 없이 확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선율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유신이 주문처럼 되뇌던 말을 떠올렸다.

‘선배 잘못이 아니야. 재수 없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돌부리에 걸린 발을 잘라내기라도 할 거예요?’

그는 행여 선율이 잊을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해주었다.

‘그러지 마요. 아프잖아.’

그가 내내 말해 주던 그 말이 선율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선율은 떨리는 시선으로 상미를 응시했다.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곤 말 못 하겠습니다.”

그러곤 수없이 연습했던 그 말을 뱉었다.

“하지만 제 잘못이…… 아닙니다.”

스스로 내내 의심했었다. 정말 내 잘못이 아닌가?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이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나 유신은 그녀가 흔들릴 때마다 몇 번이고 답을 알려 주었다. 몰카를 찍은 것도, 유신의 목숨을 노린 것도 김기철이라고. 피해자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조금도 없다고. 해서 선율은 염치없게도 상미에게 또박또박 말할 수 있었다.

“제 잘못이 아니에요.”

상미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선율을 쳐다보았다.

“선율 씨 잘못이 아니다?”

“김기철 같은 남자를 한때 좋은 사람이라 믿었던 제 어리석음을 탓하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김기철이 저지른 모든 일을 제가 책임질 이유는 없어요.”

“그래요?”

“저 때문에 유신이가 불행하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저로 인해 유신이는 그동안 너무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유신이를 놓아주려고 마음먹기도 했어요.”

“그런데?”

“유신이를 치유해 줄 수 있는 것도 저뿐이에요.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선율은 외운 걸 줄줄 읊는 것처럼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몇 마디 되지도 않는데 왜 이렇게 숨이 차는지, 준비한 말을 후다닥 뱉고 나니 머리가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그게 내 부탁에 대한 선율 씨 대답이군요.”

상미가 묵묵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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