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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하게 빛이 들어오는 복도, 두런두런 말소리가 흘러나오는 병실 안.
조용하다가도 가끔씩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에 더없이 가슴이 포근해지던 과거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여긴 할머니 병실이잖아.’
익숙한 병원 냄새에 유신은 이곳이 할머니가 입원한 요양 병원이라는 걸 알았다.
아까 기철의 차에 치인 기억이 생생한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내가 죽은 건가.
‘그렇다기엔 통증이 너무 심한데.’
몸이 죽어 영혼이 되었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울 리가 없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것처럼 아파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뇌리는 퍼붓는 빛에 백열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유신은 거의 본능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납덩이라도 단 듯 무거운 발이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었다.
대충 이게 꿈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 현실인가 싶기도 했다. 유신은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천천히 병실 앞으로 다가섰다.
마침 병실 안에서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서요, 엄마. 저번에 엄마가 꼬불쳐 둔 양갱이 너무 맛있어서 똑같은 거 있나 마트에서 찾아봤거든요? 마침 집 앞 슈퍼에 있기에 냉큼 사 먹어 봤는데 맛이 다르더라고요. 엄청 실망했잖아요.”
“내 새끼 그럴 줄 알고 하나 더 꼬불쳐 뒀지. 이리 와 봐. 아무한테도 주지 말고 너만 먹어야 해. 오빠한테도 절대 주지 말어.”
그건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들의 음성이었다. 자신을 딸로 착각하는 할머니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선율과 그런 그녀를 귀엽다는 듯 포근히 안아 주고 있는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신 할머니가 어떻게 눈앞에 있는 건지 사고가 되지 않아 유신은 멍청히 눈만 끔뻑거렸다. 너무나 생생해서 차마 꿈이라고 믿을 수조차 없는 광경이었다.
“선배…….”
유신의 시선이 흐르듯 선율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8년 전 그대로 앳되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에게 기꺼이 말벗이 되어 주었던 그때의 선율은 지금보다 훨씬 밝고 애교가 많았다.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는 유신의 귓가로 할머니의 따스한 음성이 스몄다.
“너랑 맨날 같이 놀러 오는 친구 말이여. 이름이 유신이라고 했나?”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유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보면 볼수록 맘에 안 든단 말이여. 인자 갸는 떼어 놓고 너 혼자만 와!”
……아, 할머니.
치매 때문에 손자 얼굴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할머니가 이제는 제 험담까지 하고 있다. 유신은 꿈인 걸 알면서도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요, 엄마. 알고 보면 괜찮은 애예요.”
“성격은 어떨랑가 몰라도 내 마음에는 안 찬당께. 잘생긴 놈은 얼굴값을 하는 법이여!”
“에이, 잘생기긴 뭘. 인물값으로 따지면 내가 훨씬 비싸지.”
“야가 거울은 폼으로 들고 산당가? 솔직한 말로 인물은 갸가 한참 못 미치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선율을 보며 유신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둘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기적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살면서는 다시 못 본다는 게 가슴 미어지도록 아파서 유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선율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를 딸로 아는 할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선율의 얼굴을 쓰다듬기도 하고 가끔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기도 했다. 같은 방을 쓰는 할머니들과도 어느새 친해졌는지 저마다 똑같은 주전부리를 들고 오물거리고 있다.
‘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해사하게 웃는 선율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그녀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지던 순간이 핑크빛이었다면 지금은 온통 새하얗기만 했다.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을 만큼 강렬한 빛이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받기 충분한 여자였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걸었다. 그 여자를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지켜 낸 자리에 함께 서고 싶어서.
문득 할머니의 시선이 병실 쪽창으로 향했다. 할머니가 정확히 유신을 바라본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꿈이라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이렇게 생생할 수 없을 테니까.
‘놓치지 말고 꽉 잡어. 한없이 아까운 내 딸이니께.’
입으로만 벙긋거리는 할머니의 말이 정확히 해석되어 가슴에 박혔다. 유신은 이게 할머니가 제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럴게요, 할머니. 꽉 잡겠습니다.’
뜨거운 눈물이 유신의 얼굴을 적셨다.
할머니는 그를 향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이제 속이 후련하다는 듯이, 이승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
* * *
주희로부터 유신의 사고 소식을 들은 선율은 겉옷도 걸치지 못하고 곧장 병원으로 뛰어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네?”
그녀는 수술실에서 나오는 의사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물었다. 의사는 몹시 피로한 표정으로 간단히 유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지고 왼쪽 정강이뼈에도 금이 갔다고 하는데, 선율의 귀엔 오직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라는 말만 기계음처럼 반복되어 울렸다.
그녀는 급히 연차를 내고 유신의 곁에 머물렀다. 주희와 복수가 저녁에 잠깐 교대해 주는 시간을 제외하곤 온종일 붙박이처럼 딱 붙어 있었다. 메마른 유신의 입술을 거즈로 닦아 주고 손발을 주물러 주는 손길이 한없이 애틋했다.
“사람 애먹이는 방법도 가지가지네. 뻥 차 버리자마자 이런 식으로 돌아오는 법이 어디 있어?”
수술은 잘되었다고 하는데 유신은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그간 누적된 피로와 극도의 스트레스가 겹쳐 그런 것 같다고 의사는 말했다. 깊은 잠에 빠진 유신의 곁에서 선율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너 깨어날 때까지 절대 안 울 거야. 아무 데도 안 가고 딱 붙어 있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좋은 꿈만 꾸다 와.”
복수로부터 사고의 전말을 듣게 된 선율은 기철이 유신을 살해하려 했던 것에 분개했다. 눈앞에 있다면 당장 목을 조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의 무자비한 계획을 미리 눈치챈 유신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차로 뛰어들었다는 얘길 들을 땐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조유신 진짜…….’
지독하리만치 계략적인 남자란 건 알고 있었지만 살인 미수를 받아내기 위해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도 않고 맨몸으로 들이받았다는 소릴 들으니 숨이 턱 막혔다.
정말이지 미친놈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독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넌 반드시 깨어날 거야. 난 걱정 안 해.’
그러나 자잘한 상처가 가득한 유신의 손을 보니 왜 자꾸 마음이 불안해지는지, 조금 전까지 걱정 안 하겠다고 한 다짐이 무색해져 선율은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누워 있는 모습 보는 거 처음인 것 같네.”
선율이 유신의 손을 닦아 주며 가만히 읊조렸다.
“못된 말만 골라서 해도 좋으니 이제 그만 일어났으면 좋겠다. 아침에 어머님도 의식 차리셨어. 눈뜨자마자 너부터 찾더라.”
복수는 상미에게 유신이 급한 일이 생겨 출장을 갔다고 둘러대었다. 정신 들자마자 아들이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아직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언제까지고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너 없이도 잘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헤어지자고 말하고 돌아온 날 별로 눈물이 안 나기에 진짜 괜찮을 줄 알았거든?”
선율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음을 꺼내 놓았다.
“그런데 아니더라. 지난 8년간 한 번도 날 놓은 적 없다고 그랬지? 나도 그랬었나 봐. 8년간 단 하루도…… 너를 놓은 적이 없더라.”
그에게 반드시 해 주고 싶었던 말.
“내가 잘못했어.”
그러나 솔직하지 못한 마음이 너무나 초라해서 번번이 입 안으로 삼켰던 말.
“사랑해, 유신아.”
그가 눈을 감고 있을 때에야 마음껏 뱉어 본다.
“내가 잘못했어. 헤어지잔 소리 다시는 안 할게.”
기어이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선율은 유신의 손을 잡고서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손 아래에 있던 유신의 손이 움직인 건 그때였다. 느릿하게 손을 뒤집은 그가 손깍지를 껴 온 순간 선율의 울음이 뚝 멈추었다.
“지장 찍어요.”
“……조유신?”
딸꾹! 딸꾹!
너무 놀라 딸꾹질을 하는 선율의 귓가로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는 헤어지잔 소리 안 한다며. 공증받자고.”
선율은 눈을 크게 뜨고 유신을 살펴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틀이나 잠들어 있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혈색이 돌아온 입술과 느긋한 미소가 걸린 얼굴을 보니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선율은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수선을 떨었다.
“너 정신 멀쩡해? 어디 아픈 데는 없고? 숨쉬기는 어때? 불편하지 않아?”
“하나씩 물어요. 정신없어요.”
유신이 픽 웃으며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오랜만에 눈을 뜨니 형광등 불빛에 눈이 부신 모양이었다. 선율은 곧바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조명을 껐다.
“이제 눈 괜찮지? 아직도 밝아?”
“괜찮아요, 이제.”
“팔 움직이는 거 괜찮아? 너 갈비뼈가 세 대나 나갔다고 했어. 막 움직이면 절대 안 된다고 그랬다고! 안 되겠다. 일단 선생님부터 불러야겠…….”
“선배.”
부산스러운 선율의 팔목을 유신이 움켜쥐었다. 막 돌아서던 선율은 끌어당기는 반동에 의해 철퍼덕 침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가지 말고 잠깐 나랑 있어.”
“안 돼. 일단 선생님한테 상태부터 보이고…….”
“힘없어. 그러니까 그냥 좀.”
……나랑 있자고.
유신이 툭툭 옆자리를 두드렸다. 겨우 엉덩이를 뗐던 선율은 마지못해 다시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끌어당겨 안은 유신이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꿈에서 할머니 만났어.”
“정말? 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어?”
그리운 사람 얘기에 선율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유신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선배 놓치지 말라고.”
“어……?”
“그래서 말인데.”
유신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나 절대 선배 안 놔. 할머니 유언이라고 생각할 작정이니까.”
죽을힘을 다해 덤빌 거야. 그러니까 도망갈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마.
강렬한 눈빛에 전해 오는 진심에 선율의 심장이 펌프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눈을 감고 있을 때는 잘만 나오던 진심이 정작 이런 순간에는 쑥 들어가고 만다. 그러나 선율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는 더 이상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나도 너 안 놔.”
눈을 질끈 감고 진심을 토해 냈다.
“생각해 보니 아직 어머님 앞에서 무릎도 안 꿇어 봤잖아. 계속 반대하시면 무릎이 너덜거릴 때까지 꿇고 있어야지. 뭐든 해 볼 거야.”
유신의 입매가 휘어 올라갔다. 허리를 감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어 선율을 끌어당긴 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엄마 얄짤없는데. 고딩 때 몰래 피시방 갔다가 여섯 시간 꿇은 적도 있어요.”
“퍽이나 위로가 된다.”
하여간 산통 깨는 덴 뭐 있다니까.
선율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 순간 유신과 눈빛이 딱 마주쳤다. 애정이 넘실대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선율의 입에서 숨기지 못한 고백이 흘렀다.
“사랑해.”
유신의 눈꼬리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게 휘었다.
“그 말 들으려고 깨어난 것 같네.”
그의 손이 가볍게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스르르 끌려간 선율이 우물을 찾듯 유신의 입술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