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추락하는 새에겐 날개가 없다.
한주그룹이 딱 그랬다. 거듭된 악재에 연일 한주그룹은 경제면 한복판을 장식했고 주가는 끝도 없이 곤두박질쳤다.
서킷에서 차량이 폭파했다는 기사가 뜨고 난 후 한주그룹에 대한 비난은 날로 거세졌다. 예전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비리 문제부터 경영진의 부패와 갑질, 그리고 최근 밝혀진 기철의 몰카 범죄까지.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기사에 한주그룹은 사면초가에 이르렀다.
김한주가 차량 결함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사업화를 강행한 사실은 녹취록을 통해 공개되었다. 며칠 전 예인정에서 만났을 때 유신은 내실에 장식된 화병 안에 녹음기를 숨겨 두었던 것이다.
―일정 소, 속도가 넘어가면 에, 엔진이 터질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물론 그 점은 인정해. 연구원으로서 자네가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입장도 알아. 하지만 나는 일개 회사원이 아니라 그룹을 이끄는 오너일세. 그런 자잘한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이 가능했고, 난 그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썼어!
복수와의 대화 가운데 김한주가 ‘고의로’ 결함 차량을 출시했다는 게 명명백백히 드러났다. 결국 이 문제는 검찰로까지 송치되게 되었다.
대미를 장식한 건 8년 전 기철과 유신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당시 피해자 황준기를 떠민 게 기철이었고, 그의 거짓 진술로 유신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는 게 세상에 까발려졌다. 그건 주희가 무려 2년 동안 품 안에 숨겨 놓았던 마지막 비수였다.
<한주그룹의 횡포에 세상을 떠난 故황준기의 동생입니다.>
라는 제목으로 언론사에 제보한 그녀의 편지 안엔 그간 숨겨져 왔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대중은 진실로 분노했다. 과거의 잘못을 돈과 협박으로 덮어 버리려 한 김한주 부자의 행태에 치를 떨었고, 선을 넘은 갑질에 분노했다.
한주그룹을 향한 비난은 결국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고 차량 폭발 사고 일주일 만에 한주 자동차의 매출은 반의반 토막으로 줄어들었다.
“아오, 씨팔!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이러다 진짜 우리 집 망하는 거 아니야?”
얼마 전 선율의 집에 몰카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후 숨어 지내고 있던 기철은 초조해졌다.
언론은 연일 한주그룹을 때려 대지, 주가는 끝도 없이 추락하지, 이러다간 정말 해를 넘기지 못하고 회사가 주저앉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연락해 볼까? 아냐, 그러다가 진짜 맞아 죽을 텐데……! 염병, 이게 다 조유신 그 새끼 때문이잖아. 멀쩡한 차가 터진 것도 다 그 새끼 농간 아니야? 씨팔, 이럴 게 아니야. 지금이라도 그 새끼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정말 인생 조질지도 몰라.”
기철은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며 모텔 안을 뱅뱅 돌았다.
유신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은 굴뚝같은데 도통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접근할 방법이 없잖아. 황주희한테도 경호원을 그만큼 붙여 놓았으니 저한테는 몇 명이나 붙였겠냐고!”
얼마 전 주희가 유신의 끄나풀이었다는 걸 알고 반쯤 정신이 돌아 버린 그는 길길이 날뛰며 주희를 찾아갔었다. 그때 주희의 뒤에 경호원이 붙었다는 걸 알았다. 그 덕에 손도 못 대 보고 터덜터덜 돌아오던 길이 얼마나 짜증스럽던지.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그에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아 참, 그 자식이 있었지!’
물밑에서 벌어지는 더러운 사건 사고에 누구보다 빠삭한 인간이 있었다. 기철이 처음 몰카의 세계에 입문했을 때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던 사람이기도 했고, 이번에 선율의 집에 설치한 초소형 몰카를 구해다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 형이라면 분명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여차하면 청부업자를 소개받을 수도 있고!’
기철이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전화를 걸었다.
“형, 부탁할 일이 있어 전화했어요.”
―어. 기철이냐?
상대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기철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로 본론부터 꺼냈다.
“처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쪽 방면으로 아는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요?”
―아는 사람이야 몇 있지. 처리라면 아주 확실한 처리를 말하는 건가? 그럼 가격이 꽤 비쌀 텐데.
“돈이야 상관없어요. 조유신 그 개새끼 죽이는데 돈이야 억만금이 들어도 상관없으니까.”
―누구?
“조유신이라고 제 대학 동창 놈 하나 있어요. 어떻게, 잘하는 업자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상대가 짧은 침묵 끝에 쿡 웃음을 터트렸다.
―조유신이라.
자다 깬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문형주였다.
유신의 감방 동기였던 바로 그였다.
―며칠 기다려. 연락 줄 테니까.
형주가 빙글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업자를 구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기철은 안도감과 동시에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는 물러설 수도, 도망칠 곳도 없다.
* * *
며칠 후 문형주에게서 청부업자를 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신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은 수백 번도 넘게 했으나 막상 진짜로 실행하려 하니 덜컥 겁이 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오가고 덥지도 않은데 손에서는 연신 땀이 축축이 배어났다.
―야, 너 진짜 할 수 있겠어? 곱게만 살아온 자식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래?
문형주의 껄렁껄렁한 목소리에 기철은 오히려 마음을 다잡았다.
“할 거예요. 무조건 죽일 겁니다.”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었다. 한주그룹은 침몰하고 있었고 부친 김한주는 이미 구속된 상황이었다. 8년 전 고깃집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며 기철 역시 경찰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
언론이 들쑤시자 대중들의 반응도 들불처럼 일어났다. 숨어 있는 그를 경찰이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였고 기철은 더 이상 달아날 구멍이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곧장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살인 청부의 특성상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포착할 수가 없었다. 유신은 베링거 모터스의 임원이었고 특히 요새는 모터쇼 기간이라 더욱 바빴다.
며칠 살펴본 결과 유신은 혼자 있는 시간 자체가 많지 않았다. 사무실이나 집에서야 혼자 있겠지만 건물 자체가 대로에 위치해 있으니 흔적 없이 처리하긴 쉽지 않을 테고.
하릴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던 어느 날, 기회는 뜻밖의 타이밍에 찾아왔다.
“기철 씨, 오늘은 회사에도 경찰이 찾아왔더라고요. 이대로 정말 괜찮겠어요?”
퇴근해 돌아온 박 주임이 코트를 벗으며 말했다. 기철은 TV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꾸했다.
“나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지? 그럼 됐어. 지들이 내가 여기 숨어 있는지 알 게 뭐야?”
요새 기철은 박 주임과 동거 중이었다. 몰카 사건이 걸린 이후로 본가에서 나와 모텔을 전전하던 그에게 먼저 손을 내민 건 박 주임이었다.
예전부터 기철을 짝사랑하던 박 주임은 갈 곳 없는 기철에게 자신의 자취방을 내주었다. 기철은 옳다구나 하고 냉큼 그녀의 집에 들어앉았다. 실제로 돈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녀의 곁에 머무르면 유신과 선율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요새도 베링거 모터스랑 회의하나?”
“그럼요. 모터쇼 광고는 끝났고 이제 TV 광고 제작에 들어갔거든요.”
“회의는 여전히 매주 화요일?”
“네. 그런데 이번 주 회의는 펑크예요. 조유신 이사가 회의를 미뤘거든요. 친구분 기일이라고 하던데요?”
별생각 없이 대꾸한 박 주임의 말에 기철은 등줄기에 소름이 확 돋았다.
‘맞다! 이 무렵에 황준기 기일이 있었지, 참!’
이건 신이 준 기회였다. 듣기로 황준기의 묘소는 경기도 어느 야산에 있다고 했다. 으슥하고 후미진 곳이라 보통 사람들이 다니긴 어려운 곳이었다. 추모하러 가면서 사람을 줄줄이 달고 가진 않을 거고.
‘즉, 흔적 없이 해치우기에 이만한 조건은 없다는 뜻이지!’
기철은 쾌재를 불렀다. 청부업자의 날카로운 칼날이 유신의 뱃가죽을 쿡 쑤시고 들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기철 씨는 요새도 조유신 이사와 한 팀장에게 관심이 많은 거 같아요. 아직 미련 있는 거예요?”
박 주임이 스커트 지퍼를 쭉 내리며 몸을 붙여 왔다. 허벅지에 닿은 그녀의 엉덩이가 기철은 몹시 불쾌했으나 겉으론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다.
“미련은 무슨! 당신 일에 관심이 많으니 이것저것 묻기도 하는 거지.”
“정말이죠?”
“그러엄.”
만족한 듯 눈꼬리를 접어 웃는 박 주임을 기철은 억지로 끌어당겨 안았다. 품에 감겨 오는 그녀의 마른 몸은 볼품이 없어서 안을 맛이 나지 않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그녀는 쓸모 있는 패였다. 유신과 선율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자 경찰을 피해 숨은 자신을 보호해 줄 방패막이기도 했다.
‘씨펄, 꼴리지도 않는데 힘쓰게 생겼네.’
기철은 인상을 쓰며 억지로 신음을 냈다. 마른 장작처럼 느껴지는 박 주임의 몸을 어루만지고 핥으며 그는 어느새 선율을 떠올리고 있었다.
* * *
황준기의 기일이었다.
매일을 쪼개 살아도 바쁜 유신이지만 그는 매년 준기의 기일을 잊지 않고 챙겼다. 기일을 챙긴다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고 준기가 살아생전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 놓고 그의 사진 앞에 간단한 음식을 차려 놓고 조촐하게 묵념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올해는 달랐다. 한국에 들어왔으니 이제부터 직접 묘소에 가 볼 생각이었다. 장례식 이후 바로 미국으로 출국한 터라 준기가 묻힌 곳을 가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출장 때문에 하루 먼저 다녀온 주희가 상세한 약도를 그려 주어 유신은 비교적 쉽게 준기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다.
“형, 나 왔어.”
유신이 준비해 온 국화꽃을 내려놓고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오랜만이라 못 알아보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형 원래 사람 잘 못 알아보잖아.”
유신은 깨끗하게 정리된 봉분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남자가 뭐 매일 옷을 갈아입느냐며 같은 옷을 사나흘씩 입던 준기를 떠올리면 참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묘소였다. 그간 주희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묘소를 다듬었는지 알 법했다.
“주희에게 얘기 들었겠지만 김기철이 한 짓이 만천하에 드러났어. 형도 보았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유신은 그간 있었던 일을 두런두런 읊조렸다. 해 질 녘 석양에서 뿌려진 어스름한 빛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아 쓸쓸한 색을 띠었다.
“보고 싶다, 형.”
짧지만 진실했던 우정이었다. 나이 차가 꽤 남에도 불구하고 친형제처럼 아옹다옹하던 사이. 형제 없이 외롭게 자란 유신에게 준기는 누구보다 듬직한 형이었다.
매일 봐서 질린다면서도 뒤돌아서면 찾는 사이.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도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으며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베풀던 사이.
선율에게 줄 목걸이를 사느라 평소보다 일주일이나 먼저 용돈이 똑 떨어진 유신을 먹여 살린 것도 준기였고, 바로 다음 주 이자 쳐서 갚으라며 술을 세 번이나 사게 한 것도 그였다.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날밤을 까도 모자라서 오히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간직해 온 예쁜 날들.
그가 기철에게 돈을 받고 거짓 증언을 했다고 들었을 때도 유신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궁핍한 그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외려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던 그가 얼마나 괴로울까 걱정했다.
그의 기우는 현실이 되어, 준기는 마지막 가는 길까지 유신을 생각했다. 죽기 하루 전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상미에게 편지를 보낸 것만 봐도 알았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편지를 썼을지, 유신을 감옥에 보내 놓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냈을지.
“잘 지내. 또 올게.”
한참을 그의 묘소 옆에 앉아 있던 유신이 일어났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사방이 깜깜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그의 묘비를 한번 털어 주고 일어선 그가 문득 돌아섰다.
“나 떠날 때까지 지켜보고 있어. 형한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