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리드 앞엔 총 스무 대의 차량이 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각 브랜드를 대표하는 최신형 모델이라 정말이지 번쩍번쩍 광이 나는 모습이었다. 베링거의 슈퍼 스터드는 8 레인에 위치했다. 국내에 단 두 대뿐이라는 베링거 슈퍼 스터드 880 중 나머지 한 대가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캬, 기깔 나네. 저거 가지려면 월급을 몇 년을 모아야 되냐?”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아무나 살 수 있었으면 베링거가 아니다, 그 말 못 들어 봤냐.”
“하긴. 월급이 아니라 회사를 세워야 명함이나 내밀어 보겠네. 에잇, 못 먹는 떡이라 더 커 보이네.”
관람객들은 햇빛을 받고 선 슈퍼 스터드의 위풍당당한 자태에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에 반해 한주 자동차에 쏟아지는 관심은 미미했다. 한주는 뭐라도 들어 볼까 싶어 귀를 쫑긋 세웠으나 돌아온 건 적나라한 무관심뿐이었다.
‘저깟 것들이 뭘 안다고 저렇게 떠들어 대는 거야? 번지르르한 겉모습에만 홀리는 족속들 같으니라고, 쯧!’
한주는 눈썹을 구기며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잠시 후 사회자가 나와 이번 레이싱의 취지와 진행 방법 등을 간략히 설명했다. 레이싱에 참여한 각 회사의 대표 차량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나씩 차가 호명될 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자, 그럼 레이싱 시작하겠습니다. Start your Engine!”
깃발 신호와 함께 휘슬이 울렸다.
관람객들의 열렬한 호응 속에 차들이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F1처럼 빨리 들어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자율 주행 모드의 안정성을 보여 주기 위한 레이싱인 만큼 잔잔할 거라 생각한 관람객들의 예상은 경기가 시작된 직후 뒤집혔다.
스무 대의 차량은 제 회사의 기술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선두에 있는 것은 역시 슈퍼 스터드였다.
부앙―
빛의 속도로 튀어 나간 슈퍼 스터드를 따라잡기 위해 피트가 분주해졌다. 피트 안의 기술팀들은 모니터에 세팅된 속도를 점차 높여 갔다. 그들이 찍는 숫자가 높아질수록 서킷 위를 달리는 차량의 굉음도 커져만 갔다.
“속도 올려, 더!”
“우와아아아아! 끝내 준다!”
관람객들의 반응이 점차 격앙되었다.
차량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음이 흥분을 더했다. 느긋한 마음으로 관전하고 있던 각 회사의 임원진들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더 빨리 달려! 선두로 들어와야지! 더! 더!”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슈퍼 스터드 뒤로 내로라하는 럭셔리 카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한주 자동차는 그중 맨 마지막이었다. 거의 반 바퀴 이상 처져 있는 자동차를 보며 한주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속도 하나만큼은 외제 차에 뒤지지 않게 세팅해 놨잖아? 어마어마한 연구비를 잡아먹었으면 성과를 보여 줘야지, 이 쓸모없는 머저리들!’
의자를 움켜쥔 한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힐끔 옆을 바라보니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팔짱을 끼고 앉은 유신의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에게 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한주는 피트에 대기 중인 기술팀에게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속도 더 높여! 최고 속도로 치면 우리 한주 자동차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니들이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던 성과를 보여 줘야 할 거 아니야!”
그의 불호령에 한주 자동차의 피트가 분주해졌다. 모니터에 ‘maximum speed’가 찍히자 서킷을 달리고 있던 한주 자동차가 부앙 굉음을 내기 시작했다. 금세 꼬리로 따라붙은 모습을 보며 한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그렇지! 겉만 휘황찬란하지 까 보면 다를 것도 없다니까?’
한주 자동차는 반 바퀴의 차이를 따라잡아 선두 그룹으로 진입했다. 한주는 제 회사의 기술력에 새삼 감탄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이거지!”
따개비처럼 붙은 자동차들이 경쟁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관람객들의 환호가 더욱더 커졌다.
선두 그룹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한주 자동차는 마지막 바퀴를 남겨 두고 슈퍼 스터드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엄청난 속력에 트랙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이제 다 됐어. 저 속력이라면 분명 우리가 1등으로 들어올 거다. 베링거 모터스? 흥, 같잖은 새끼들!’
안정을 찾은 한주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 앉은 순간이었다.
피슈우욱.
볼품없는 소리와 함께 한주 자동차의 보닛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뭐, 뭐야?”
한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속력 제한 장치가 걸려 있잖아! 문제 될 것도 없는데 어째서?’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날실처럼 나풀거리던 한 가닥의 연기가 금세 차량 전면부를 뒤덮을 정도로 거세어진 것이다.
트랙에서 사고가 났음을 알리는 황색기가 허공에 흔들렸다. 내달리던 차량들이 점차 속력을 줄였다. 그러나 한주 자동차만큼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제어 장치에 문제가 생긴 듯했다.
“당장 멈춰! 뭣들 하는 거야!”
파리하게 질린 한주가 고함을 지르며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퍼엉!
요란한 폭발음이 서킷을 뒤흔들었다. 모터의 과열로 인해 엔진이 폭발해 버린 것이었다.
한주는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자동차의 폭발음이 한주의 귀에는 한주그룹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렸다. 전기 자동차의 선두 주자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주 자동차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이벤트였다. 그토록 내세웠던 자체 개발 모터의 결함을 대중 앞에 스스로 까발린 꼴이었다.
“아아…….”
새카만 연기에 뒤덮였던 차량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보닛 부분이 완전히 전소된 차량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사람이 타 있지 않아 망정이지 누군가 타고 있었더라면 필시 목숨을 잃었을 게 분명할 정도의 사고였다.
대기하고 있던 안전팀이 달려와 불을 끄는 모습을 보며 한주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 * *
한주 자동차가 폭발하는 모습을 선율도 지켜보았다.
그녀는 관람석 끄트머리에서 경기를 관전하는 중이었다. 카 레이싱에 특별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광고 관계자로 모터쇼에 참여하면서 공짜로 받은 티켓도 있었고, 사실 먼발치에서나마 유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자리에선 유신의 뒷모습이 엄지손가락만큼 작게 보였다. 그나마도 뒤에 앉은 관람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바람에 잘 보이지 않았다. 선율은 잠깐잠깐 보이는 그의 모습을 치열하게 좇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콰앙!
굉음이 울리는 순간에도 유신의 뒷모습을 좇고 있던 그녀는 한발 늦게 서킷 위의 소란을 알아챘다. 금세 소란스러워진 주변에서 “야, 한주 자동차 폭발한 거 아니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까닭 없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건 마치 유신이 저에게 주는 선물 같았다.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은 불꽃에 과거의 악몽이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다.
‘해냈구나, 유신아.’
8년을 이 순간을 위해 달려왔을 그는 지금 어떤 눈으로 저 광경을 보고 있을까.
후련할까? 어쩌면 조금은 서글플까?
복수는 짧았고 여운은 길었다.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간 후에도 선율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가쁜 숨을 들이켜고 있었다.
“하아…….”
아마 한주그룹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빌리티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게 안전성인데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폭발해 버렸으니 누가 그 차를 사겠는가!
손이 바빠진 기자들이 벌써부터 기사를 써 내기 시작했으니 한주그룹의 몰락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제 존재를 지운 채 물밑에서 웅크리고 살아온 유신이 준비한 완벽한 한 방이었다.
‘조유신 정말 대단해. 진짜 지독할 정도로 완벽했어.’
과감한 남자인 걸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동차를 터트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타이밍을 계산하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상황을 이끌어 간 그의 계획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밀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위가 조용해져서 보니 어느새 그 많은 관람객이 모두 빠져나간 후였다.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럽던 주변에 내려앉은 적막은 무서울 정도였다.
선율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
습관처럼 유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쳐다본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유신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을 보인 채, 그녀를 향해 똑바로 서서.
유신이 휴대폰을 쥔 손을 천천히 귓가에 가져다 댔다. 곧이어 걸려 온 전화.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든 선율이 멍하니 전화를 받았다.
―봤어요?
난간에 걸터앉은 그가 한쪽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물었다. 선율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봤어.”
낮은 음성은 어제와 다름없이 다정했다.
―왜 울어. 좋은 날에.
그 한마디에 왜 가슴이 울컥하는지.
선율은 흐르는 눈물이 그에게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억지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게. 이런 걸 좋아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원하네.”
―좋아해야 하는 일 맞아요. 결과적으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하게 된 셈이니까.
“응. 그런 거겠지.”
그의 말이 맞았다. 저 차가 그대로 출시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다친 사람 한 명도 없이 한주 자동차의 결함을 증명해 냈으니 유신의 말대로 이건 축배를 들어도 모자란 일이다.
―얼굴이 좀 말랐네.
“……너도.”
―그쪽으로 가도 돼요?
“아니. 그러지 마.”
선율은 다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그냥 이 거리가 편한 거 같아. 너랑 나 사이는.”
―그 말 되게 위험하게 들리는데.
유신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미치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선배.
유신이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선율의 숨이 턱 막혔다. 그가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제 발길을 붙잡는 것 같았다.
―사랑해요, 선배.
한 걸음.
―선배도 나 사랑하잖아.
그리고 또 한 걸음.
―그런데도 안 돼요?
선율은 그만 참지 못하고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다가오지 마. 거기 멈추라고!”
빽 소리를 지른 그녀가 흐느끼며 소리쳤다.
“나 너 감당할 자신 없어. 불행한 네 모습을 보는 것도, 나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는 것도 싫어. 그럴 때마다 난…… 나는…….”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단 말이야.
마지막 말을 울음으로 삼키며 선율은 마지막으로 유신을 눈에 담았다. 우두커니 멈춰 선 그의 뒤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섰다.
짧은 침묵 후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왜 선배한테는 내가 일 순위가 아니야?
“조유신.”
―내겐 언제나 선배가 우선이었는데. 뭘 망설이는 건지 알아. 어쩌면 많이 힘든 길이 될 거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그래도, 선배.
한번 숨을 들이켠 그가 뒷말을 이었다.
―그딴 이유 다 집어치우고 나만 봐 줘.
“…….”
―나한테 와. 제발.
선율은 가슴이 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떨군 그녀를 향해 유신이 차분하게 숨을 뱉었다.
―이번에는 선배가 와요.
“…….”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 예쁜 두 발로 나한테 와.
숨 막히는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다.
선율이 고개를 들었을 땐 유신은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